(2007년 4월호) 한인사회의 뿌리를 찾아서 - 제12부 암바라와(Ambarawa) 의거와 조선인 민회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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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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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 문 환
1944년 중반부터 조선인 군속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2년의 계약기간이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귀국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면서 계약조건은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더구나 이들을 귀국시키고자 해도 주변 해역이 연합군의 해군과 공군 세력으로 포위되어 귀국 수송선을 띄울 방법이 없었다. 그러자 조선인 군속들이 가장 많이 배치되어 있는 반둥, 서마랑 지역에는 조선인들의 난동과 군기위반 행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서부자바 반둥시는 화란군(KNIL) 사령부가 주둔하던 지역이라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자바 지역 내에서는 가장 많은 포로들이 억류된 곳이다. 반둥을 중심으로 찌마히(Cimahi) 수용소까지 포함하여 총 3만여 명의 연합군이 억류되어 있었고 이들을 감시할 조선인 군속들도 3백 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었다. 1944년 7월 반둥 분소 소속의 박창원(朴昶遠)은 지금 헌병대 구금소에 수감되어 영창 10일의 중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다. 같은 수용소에 배속되어 있던 유도 5단의 일본인 경부(警部, 지금의 경감직위에 해당됨)가 평소 민족차별 감정에 치우쳐 수시로 조선인 군속들을 구타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박창원 일행이 의도적으로 그를 집단 폭행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즈음 자카르타 본소에는 제16군 사령부 참모인 바스키(馬衫一雄) 중좌가 조선인 군속들을 모두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일어난 김주석(金周奭) 탈주사건과 최근 빈발하는 조선인 군속들의 난동사건을 질책하고 2년으로 만료되는 근무기간을 연장하도록 설득해 보겠다는 취지였다. 바스키 중좌는 원래 경성 조선군사령부(현 후암동 병무청 자리) 재직 시절 정보장교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 조선인에 관한 문제라면 자신이 권위자인양 담당 수용소장인 나까다(中田正之) 중좌를 제쳐놓고 전면에 나선 것이다. “최근 제군들이 꽤 흥청거리고 다닌다는 좋지 못한 정보가 있다. 이 중대 시국에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술만 퍼 마시고 다니질 않나, 심지어 상관을 폭행하지 않나, 이게 어디서 나온 버르장머리야! 제군들 조선출신들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가 우수한데 말이야 여럿이 모였다 하면 삼인칠당(三人七黨)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이란 말이야. 그래서 제군들의 나라가 일본 통치하에 있다는 사실 알기나 하나! 이런 중차대한 전쟁시국에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구? 그게 바로 삼인칠당의 버르장머리란 말이다. 그러니 잔말 말고 꾹 참고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정신으로 재무장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제군들의 임무를 다해 주게.” 이렇게 훈시가 끝나자마자 군속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든다. “중좌님, 질문 있습니다. 삼인칠당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세 사람이 일곱 개의 당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지요? 저는 그런 고등수학을 이해 수 없습니다.” “이놈아, 상관에게 모욕을 줄 작정이냐? 너 같은 놈은 군법회의 감이야!” 바스키 중좌는 이렇게 말을 돌리고는 얼굴이 백지장이 되어 총총히 퇴장해 버렸다. 이 질문을 던진 장본인은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다닌 김현재(金賢宰)란 군속이었다. 그는 뒤에 고려독립청년당 군사부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플로레스(Flores) 지역에서 군속들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비행장건설을 마친 후 연합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이 섬 저 섬 표류해 가며 겨우 자바 섬에 도착한 시점은 1944년 9월경이었다. 사지(死地)를 넘어온 플로레스 귀환자들의 감정은 극도로 난폭해져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주어진 휴가일에는 군 당국이 지정한 식당을 무시하고 아무 장소에 출입하거나 여자를 끼고 다니면서 일본군들에게 시비를 걸어 폭행을 행사하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일본인에 대한 원한 감정을 발산하기 위해 일본인 위안부가 있는 장교구락부까지 쳐들어 갔다. 장교용 위안소에는 주로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이 섞여 있었으며 사병용 위안소에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조선 여성들은 속아서 군 위안부로 끌려오거나 조선인 브로커들이 돈을 주고 모집하여 오기도 했던 것이다. 일본당국은 처음에는 제3자를 통해 위안부들을 모집하였으나 1943년 후반부터는 주둔군 군정감부가 직접 주관하여 자카르타, 반둥, 뻐까롱안(Pekalongan), 마걸랑Magelang), 서마랑(Semarang), 본도워소(Bondowoso) 등지에 위안소를 설치하였다. 특히 오지인 동부제도로 보낼 위안부들은 강제 동원되다시피 하여 할마헤라(Halmahera), 암본(Ambon) 등지로 조선인 여성들이 다수 끌려 갔다. 일본군 주둔군인 제16군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는 인근 지역인 자카르타 반뗑 광장(당시 명칭 ‘캉 호닝 광장’) 주변엔 ‘사꾸라(櫻) 구락부’란 위안소에 20여 명의 유럽여성이 소속되었고 또 다른 장교전용 위안소인 ‘테레시아 구락부’에도 12명의 유럽여성이 기거하였다. 2007년 2월 17일 미국하원 청문회에서 일본계 마이크 혼다(Mike Honda) 하원의원에 의해 일본 수상의 직접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제출되면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와 화란출신 위안부 희생자였던 ‘오헤른’ 할머니가 증언한 점에서도 이 사실들을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서마랑 지역엔 화란 민간인들이 집단적으로 억류되어 있던 탓에 이들 중 일부 여성들이 강제적으로 위안부로 동원된 것으로 유명하였다. 실제로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오지 여부를 불문하고 위안소가 항상 따라다녔던 것이다.
1945년 10월 5일 인도네시아 국민방위군(TKR)이 창설된 후 수디르만(Sudirman) 장군은 11월 12일까지 동부자바 바뉴마스(Banyumas)와 께두(Kedu) 지역을 관할하는 제5사단장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었다. 11월 26일엔 서마랑(Semarang) 방향에서 진격해 오는 화란군과 연합한 영국군이 암바라와(Ambarawa)를 점령하자 수디르만은 사단 예하 지휘관들을 마걸랑(Magelang)에 소집하여 암바라와 탈환작전을 세우게 된다. 서마랑과 암바라와를 잇는 도로를 먼저 장악한 정부군은 1945년 12월 12일 새벽을 기하여 암바라와에 대해 총공세를 펴기 시작하였다. 4일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수디르만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은 12월 15일 마침내 암바라와를 탈환하였다. 이 전투의 영웅인 수디르만 장군은 이 직후부터 인도네시아 국군(TNI)의 전신인 국민방위군 총사령관에 정식 취임한다. 1949년 12월 27일 자로 화란군이 철수하면서 독립전쟁이 종결된 직후인 1950년 1월, 불과 34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족자카르타에서 타계하였으니 국민들은 그를 「국군의 아버지(Bapak TNI)」라 추앙하며 자카르타 중심지 수디르만 가(Jalan Sudirman) 입구에 큼직한 그의 동상을 세워놓고 있다. 이후 인도네시아 전사(戰史)에는 이 전투를 독립전쟁 기간 중 정부군이 연합군에 대해 개가를 올린 가장 눈부신 전과로 기록하며「암바라와 전투(Palagan Ambarawa)」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 같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사의 중요한 사적지인 암바라와 면은 주변에 3천 미터가 넘는 머르바브 산(Gunung Merbabu), 숨빙 산(Gunung Sumbing)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2천 9백 미터 높이의 활화산인 머라삐 산(Gunung Merapi)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박성까지 더하여 이곳의 풍수지리를 상징하고 있는 듯 하다. 이러한 일촉즉발의 활화산 지역에 다수의 조선인들이 발을 들여 놓게 되었으니 이들은 1944년 3월 부로 연합군 민간인들까지 구금하는 억류소가 이곳에 6군데나 설치되면서 이들을 감시할 조선인 군속들이었다. 암바라와 면 북서쪽 10키로 지점에 자리잡은 수모워노 교육대에서 한 달 예정으로 조선인 군속 재교육이 거의 끝나가는 12월 20일경 조선인 신경철(申暻喆)이 암바라와에 나타났다. 그는 황해도 출신으로 도꾜에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나와 동맹통신사 자카르타 특파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동맹통신사(同盟通信社)라 함은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관영통신사로 후일 부통령이 되는 아담 말리크(Adam Malik)도 일본 점령시기에 이 통신사의 자카르타 주재원으로 근무한 전력이 있었다. 신경철이 암바라와에 불쑥 나타난 목적은 같은 고향친구의 동생인 문학선(文學善) 군속을 만나러 온 것이었다. 문학선은 이 활에 의해 비밀결사조직의 자카르타 책임자로 내정되어 있던 참이었다. 문학선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 활과 임헌근(林憲根)을 대동하고 신경철이 묵고 있는 암바라와 여관을 찾았다. 신문사 기자 신분으로 국제정세에 누구보다도 밝고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신경철은 이들과 의기투합하여 비밀결사 조직에 참여하기로 약속한다.
암바라와 면에서 마걸랑(Magelang), 족자카르타(Yogyakarta)로 빠지는 방향 우측에 높게 솟은 성당의 뾰족탑이 서있다. 해발 5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한 이 마을은 옛날부터 화란군 주둔지로 이용되었던 관계로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암바라와의 상징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성 요셉 성당건물과 부속시설들이 적성국(敵性國) 민간인들을 구금하는 억류소로 쓰이고 있었으니 그 정식명칭은 「자바포로수용소 및 억류소 서마랑 분소 제2분견소」였다. 성당건물 뒤편에 길게 늘어져 있는 건물에는 화란인 부녀자들만 수용되어 있는 제1억류소가 있다. 이 제1억류소는 조선인 군속들이 감시하고 인도네시아 병보(兵補, Heiho)들이 군속들을 보조하고 있었다. 이 억류소 맞은 편에는 위생창고와 무기고가 배치되어 있었다. 1945년 1월 4일 오후 3시경, 한대의 트럭이 분견소 사무실 앞을 막 떠나고 있었다. 싱가폴로 전출명령을 받은 조선인 군속 6명과 조선인 운전사, 그리고 인솔 하사관인 야마자끼(山崎) 중사(軍曺), 이렇게 총 8명이었다. 이들 중에는 바로 6일 전 수모워노 교육대 취사장에서 혈서를 쓰며 고려독립청년당 혈맹당원이 된 손양섭(孫亮燮,24세, 충남)을 비롯하여 손양섭이 포섭하여 조직당원으로 입당시킨 민영학(閔泳學, 27세,충북)과 노병한(盧炳漢, 25세,강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 활동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싱가폴로 전출명령을 받았으니 이들 세 사람의 당원은 분한 마음을 억지로 삭이며 전출 길에 오른 것이었다. 특히 전날 밤 송별식에서 과음한 탓도 있지만 민영학은 격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며 거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일본군 N 상사(曺長)가 자기를 외지로 전출시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앙심을 품게 된 민영학은 그 N 상사와 결투라도 한번 벌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민영학이 좋아하던 현지인 여성과 이별하여야 하는 아픔도 그의 감정을 더 출렁이게 했다. 20리 정도 달렸을 때 민영학이 슬그머니 총부리를 운전석을 향해 겨누자 김인규(金麟奎) 운전사는 지레 겁을 먹고 갑자기 트럭을 멈춰 세웠다. 바웬(Bawen)면 메락마띠(Merakmati)라는 마을 근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미리 눈치 챈 야마자키 중사는 재빨리 뛰어내려 도망쳐 버렸다. 이때 손양섭이 “암바라와로 돌아가자!”라고 소리쳤다. 노병한도 이에 호응하여 김인규를 트럭에서 밀어내고 운전대를 잡았다. 암바라와로 되돌아온 3명의 당원들은 “왜놈의 새끼들, 모조리 쏘아 죽이자!”라고 절규하며 교회 앞에다 트럭을 버리고 유유히 무기고로 걸어 들어갔다. 경기관총과 소총, 실탄으로 무장한 이들 세 사람은 분견소 사무실 앞에 주차되어 있던 소장용 시보레 승용차를 탈취하였다. 노병한이 운전대를 잡고 손양섭이 조수석, 민영학이 뒷자리에 앉았고 그 옆자리에는 탈취한 무기와 실탄을 가득히 쌓아 놓았다. 성당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만종(晩種) 시간인 오후 5시인가 보다. 그러나 세 번씩 세 번 울리는 이 만종이 이 세 사람의 의사(義士)를 위해 울려준 마지막 타종이 될 줄이야…..
“왜놈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 손양섭이 또 한번 외쳤다. 분견소에서 300미터 거리에 있는 분견소장 스즈끼(鈴木准) 대위의 관사로 들이닥치자 그는 마침 외출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민영학이 방아쇠를 당겼으나 스즈끼는 반사적으로 납짝 엎드렸다. 총탄이 군모(軍帽)만 관통하였다. 스즈끼 대위가 피격된 줄로 잘못 알고 이들은 다음 장소인 형무소장과 일본인 납품업자 관사를 차례로 습격하였으나 모두 부재 중이었다. 역사(驛舍) 쪽으로 이동하여 마침 눈에 뜨이는 일본인 역장을 향해 발포하였으나 총탄은 빗나가 철마(鐵馬)의 두꺼운 철판만 두드린 채 메아리로 돌아왔다. 분견소 사무실에 들이닥쳐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그 안에 있던 납품업자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일본도를 차고 있던 형무소장에게도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분견소 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총성이 울려 나왔다. 민영학이 왼쪽다리를 관통 당하여 쓰러졌다. 민영학과 구원(舊怨) 관계에 있는 N 상사가 쏜 총탄이었다. N 상사는 부산 서면 교육대 시절부터 민영학의 상사였으며 암바라와로 오기 전 반둥 수용소에서도 상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손양섭과 노병한은 민영학을 부축하여 인근 옥수수 밭으로 퇴각하였다. 민영학은 “나를 놔두고 그냥 가달라.”고 부탁하며 총구를 자기 가슴에 대고 구둣발로 소총 방아쇠를 걸어 자결하였다. 동료의 장렬한 죽음을 목격한 손양섭과 노병한은 분견소 쪽으로 다시 돌아와 위생자재 창고로 은신했다. 분견소장 스즈끼 대위는 서마랑 분소뿐만 아니라 헌병대와 보병부대에게 병력지원을 긴급 요청하여 심야에 수십 명의 병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밤 중에 진압부대가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였다. 날이 밝아 1월 5일 아침, 암바라와 파출소에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사건의 동기가 3명의 군속들뿐만 아닌 조선인 군속 전체의 불만에서 야기되었다는 판단을 내린 수사본부는 즉시 모든 조선인 군속들에게 실탄 휴대를 금지시키고 한 장소에 모아 연금시켜 버렸다. 우기철이 되어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으스스한 밤시간, 은신해 있던 위생창고에서 나온 손양섭과 노병한은 분견소를 다시 습격하여 후꾸루(福留) 통역과 시모야마(下山) 위생병을 살해했다. 운명의 1월 6일이 밝았다. 고려독립청년당 혈맹당원으로 암바라와 부지부장인 동료 군속 조규홍(강원 출신, 25세)은 이 사건으로 인해 당조직이 들통이 날까 전전긍긍하며 식당에 들어가 20여명의 동료 군속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때 불쑥 손양섭과 노병한이 이들 앞에 나타났다. 손양섭은 얼굴에 미소마저 띄며, “여러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할 일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입장을 난처하게 해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다시 위생창고로 돌아가렵니다. 만약 총소리가 나면 깜짝 놀라는 척하며 도망가 주십시요.” 자결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조규홍에게 담배 한 개피를 청하여 피우고 나더니 굳은 악수를 나누고 다시 창고로 은신하였다. 잠시 동안 동료들은 숨을 죽이며 창고 쪽을 응시하였다. 그런데 창고 문이 삐끔이 열리더니 손양섭이 다시 조규홍에게 다가 왔다. “ 이 책을 자카르타에 있는 박승욱(朴勝彧) 동지에게 전해 주게.”하고는 한 권의 책을 건네 주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니체(Friedrich W. Nietzsche)가 지은 철학 서적이었다. 그는 박승욱과 충청남도 동향으로 절친한 관계였다. 이날 오후 3시 반경 위생창고 안에서 고독한 총소리가 울려 나왔다. 조규홍을 비롯한 동료 군속들이 달려가 피가 낭자한 손양섭, 노병한의 주검을 부등켜 안고 흐느끼고 있었다.
일본군 자바 포로수용소 당국이 작성한 공식문서인 <死沒者 관계사항 처리 열람표>에 의한 민영학, 손양섭, 노병한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망내보(死亡來報) : 1945년 1월 12일
-사망통보 : 1945년 1월 15일
-자살이므로 은상(恩償) 받을 자격 없음
-유골의 처리 : 일본인 묘지에 매장
-사망이유 : 군 인사명령에 의한 말레이 포로수용소 전속에 불만을 품고 이를 기피하려는 행동에서 발단됨. 전출 출발 당일 도주하여 이틀간에 걸쳐 군인, 군속, 일본인, 원주민 등 12명을 사살하고 3명을 부상시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
-사망장소 :자바섬 서마랑
-사망월일 :민영학 1945년 1월 5일
손양섭 1945년 1월 6일
노병한 1945년 1월 6일
-사망구분 :변사 (자살)
이상과 같이 세 명의 조선인 군속에 의한 반란사건은 인근 머라삐 화산(Gunung Merapi)이 요동치듯 이 작은 마을 암바라와를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 수뇌부에게는 심대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일본 헌병대는 제2차 폭동을 예견하고 ‘요 주의 인물’ 명단에 오른 조선인들을 자바 헌병대에 분산 감금하고 배후세력을 철저히 캐기 시작했다. 헌병대가 파악한 사건의 진상은, 전출명령에 대한 불만과 애정문제 등이 서로 얽히면서 직접적인 동기를 유발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2년의 계약기간 만료에도 불구하고 귀국 못하는 불만, 일상적인 차별대우, 민족감정에 기인한다는 결론은 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일본의 패전이 임박하자 일본인에 대한 보복 감정과 멸시감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조선의 독립이 멀지 않았다고 하는 우쭐한 생각을 갖게 만든 <카이로 선언>에 언급된 ‘조선의 독립 보장’ 정보가 널리 유포된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불에 기름 붓는 격으로 「고려독립청년당」이라는 조직의 결성은 이들 3명에게 직접적인 활력과 용기를 불어 넣었던 것이다. 암바라와 의거는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조직에 바탕을 둔 거사의 신호탄이었다는 점에서 해외독립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3명의 당원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는 보고를 접한 고려독립청년당 총령 이 활은 1월 7일 간부 동지들을 소집하여 암바라와에서 당원 3인이 일으킨 반란을 「고려독립청년당 제1차 거사」로 규정하고 「제2차 거사」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다름아닌 전호에서 기 기술한 「스미레 마루호 탈취기도 사건」이었다.
8월 15일 천황의 항복방송이 있었고 8월 17일엔 수까르노, 핫따가 독립을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16군 감방에 그대로 수감되어 있던 고려독립청년당 사건 수감자 10명은 8월 하순에 접어들어도 석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히로시마에 특수폭탄이 떨어지고 천황이 항복하였다는 전갈을 간수가 이상문에게 넣어 준 지 3일이 지난 날 드디어 반응이 나타났다.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던 재판장 기따(木田庫之助) 대위가 찾아와 수감자 모두를 마당에 집합시켰다. ”자네들 감사보은(感謝報恩)이라는 말 잘 알고 있겠지. 하루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되네. 어이, 마쓰오까(李相汶), 자네 생각은 어떤가?” 기따 대위는 고려독립청년당 수감자들을 모아놓고 이들의 심경을 탐색해 볼 목적으로 찾아와 본 것이다. 일본군은 어쩌면 패전 후의 보복을 두려워했었는지도 모른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일본군이 패전한 이상 정치범들을 즉각 석방하여야 한다고 일본 당국을 채근한 사람은 다름아닌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郞, 한국명 許 泳)라고 하는 조선인이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육군의 후원을 얻어 1941년 조선에서 「너와 나(君と僕)」라는 선전영화를 감독하고 자바에 들어와 제16군 선전부에 배속되어 「Calling Australia」라는 또 한편의 어용영화를 감독한 후 지금은 「자바 연극연맹」을 이끌고 있는 꽤나 유명한 연극, 영화 예술인이었다. 조선인 군속들 사이에서는 히나츠라는 인물은 ‘눈이 부시어 쳐다보기도 어려운 사람’으로 비춰졌고 실제 그가 감독한 「너와 나(君と僕)」라는 영화를 관람하고 지원병을 자원한 조선인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따 대위는 3일 후인 8월 26일 재차 구금소를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눈부신’ 히나츠 에이타로가 배석하고 있었다. 기따 대위는 수감자들을 식당에 집합시켜 카스텔라, 우유, 홍차를 대접하며 말문을 열었다. “여러분들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 여러분들을 석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석방에 앞서 당신들의 신병을 인수할 단체나 또는 개인 후견인이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 배석한 히나츠 군이 주도하여 조직결성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 조직이 결성되면 여러분들을 그 조직에 인계하도록 하겠다.” 단체 결성을 위해 히나츠는 동맹통신사 기자 최호진(崔浩鎭)과 군속 대표 1명을 대동하고 제16군 사령부를 찾아가 자바에 거주하는 군속, 위안부, 간호원, 부두노무자, 기타 민간인들을 한데 결집할 단체 결성 허가를 신청하였다. 그러나 <암바라와 반란사건> 등으로 조선인 군속들에 대한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군사령부는 난색을 표명하며 이에 대한 허가를 꺼리고 있었다. 히나츠는 군사령부 직속의 선전부에 소속되어 군정감부를 위해 연극영화 활동을 한 유명세를 이용하여 군사령부를 매일 들락거리며 고려독립청년당 수감자 석방과 단체조직 허가 문제를 계속 설득하고 나섰다. 머지않아 연합군이 상륙하면 군정이양을 하여야 하는 일본군 입장에서는 당초의 강경방침을 완화하여 군대의 내무규칙과 유사한 회칙을 첨부하는 조건을 붙여 결국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1945년 9월 1일 자로 자카르타에 <재 자바 조선인 민회> 라는 조직이 탄생하게 되며 이는 인도네시아 땅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국인 친목단체인 셈이다. 이는 아직 연합군이 자바에 진주하기 직전 통치권 공백상황(Status Quo) 하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민회는 자카르타 북부 꼬따(Kota) 지역의 한쪽 주거지 주택을 여러 채 임차하여 사무실, 회관, 숙소 겸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일본군정의 수중에 있던 라디오 방송국을 이용하여 “8월 30일부터 9월 5일까지 조선인은 전원 자카르타에 있는 민회로 집합하라”는 방송을 반복하여 내보내고 있었다. 이 방송을 듣고 서부자바 및 자카르타 인근 지역으로부터 동포들이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이 민회 단체야 말로 그들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리고 9월 5일 상기 민회(民會) 간부들은 구금되어 있던 고려독립청년당원 10명의 신병을 인수하여 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부자바 지역의 군속들도 서마랑(Semarang)에 집결하여 <재 서마랑 조선인 민회>를 출범시켰다.
총 1,600여 명의 조선인 교민들 중 포로수용소 및 억류소 감시요원들인 군속 출신이 1,300여 명에 달했고 나머지는 위안부, 간호원, 항만 노역자 그리고 동맹통신사 기자 등 극히 소수의 민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회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회원들에게도 숙소를 제공하여 집단생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과 교섭하여 3년 정도는 넉넉히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생활물자와 군표(軍票)를 확보하게 되었다. 수일 내로 연합군이 상륙하면 어차피 이 막대한 재고물자를 연합군에게 넘길 바에야 이 조선인 단체에 기부하는 것을 일본군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갑자기 물자가 넘쳐나는 기묘한 이 「해방구역(解放區域)」엔 활기가 넘쳐 <재 자바 조선인 민회>라는 버젓한 간판도 걸리고 군속들이 총을 들고 입구에서 보초도 서고 있었다. 조선어 교실이 개설되어 귀국을 앞둔 동포들에게 모국어도 열심히 가르쳤고 재봉틀도 장만하여 여성들에게는 양재기술도 가르쳤다. 「조선인 민보」라고 하는 기관지가 등사판으로 인쇄되어 매주 배포되었다. 당시 전범색출 문제로 조선인 출신 군속들의 입지가 어려워져 가는 상황을 감안하여 감시원 시절 연합군 포로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종전이 되어 연합군들의 환심을 사고 있던 김만수(金萬壽)를 제4대 회장으로 내세워 회원들의 권익을 대변해 보려고 애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무사 귀국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다.
상기와 같이 9월 1일 자로 <재 자바 조선인 민회>가 결성되어 귀국을 열망하는 조선인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소식이 수마뜨라 지역에도 전파되자 일본군 제25군이 통치하고 있던 수마뜨라 지역의 남부도시 빨렘방(Palembang)에도 1945년 10월 18일 자로「빨렘방 조선인회」가 결성되고 있었다. 이들 회원들은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麥) 계열의 농원담당 회사원 5명, 포로감시원 64명, 정신대(挺身隊) 출신 48명, 일반인 48명, 현지출생 아동 7명, 유부녀 5명, 도피자 5명 등 총 18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초대 회장에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일본군 오장(伍長; 하사)으로 제대한 조경옥(趙敬玉)이 선출되었으며 통역담당에는 전남 광주 출신으로 미쓰비시 계열의 농업회사인 「동산농사주식회사」사원이던 강석재(姜碩宰), 내무담당엔 강석재의 직장 동료들인 수원 출신의 정규동(鄭圭東)과 춘천 출신의 안상겸(安相謙), 그리고 광주 출신의 이종남(李鍾南)은 운전기사로서 인도네시아 행정기관에 대한 섭외를 담당하였다. 별도의 직책은 없었지만 미쓰이 계열 농업회사 소속의 신상옥(申尙玉)은 누구보다 조선인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인회 사무실에는 국기를 게양하고 김 구(金 九) 선생의 초상화를 내걸고 있었다.
1946년 4월부터 그렇게도 기다리던 귀국이 시작되었다. 자카르타 민회에도 3일 뒤부터 승선하라는 통지서가 날아 들었다. 회원들은 환성을 지르며 급히 신변을 정리하며 고국의 가족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데 부산하였다. 귀국선을 타기 직전인 4월 13일 자로 <재 자바 조선인 민회>도 해산시켰고 군속, 민간인들 모두 천 6백여 명이 일제히 귀국선에 올랐다. 그 중 군속 출신 천 3백 명은 별도로 다른 배에 승선하였다. 이들이 딴중 쁘리옥 항을 떠날 때만 해도 이 같은 분리승선에 대한 저의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었다. 3년 동안의 자바 근무를 마친 조선인 군속들은 선상에서 단지 멀어져 가는 자바 섬을 바라보며 아쉬운 감회에 젖을 뿐이었다. “죽은 동료들이 꽤 많았지. 그러나 나는 이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가는구나. 잘 있거라, 상하(常夏)의 땅 자바 섬이여, 정든 자바인들이여, 먼 훗날 우리 후손들이라도 다시 찾아올 날이 있겠지…….”
이 무렵 고국 조선에서는 남방 각 지역에서 속속 귀국하는 징용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손로원 작사, 이재호 작곡의 『귀국선』이라는 대중가요가 가수 이인권에 의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
*다음 호의 제목은 <제13부 전범으로의 전락과 35년간의 인권투쟁> 입니다.
☞주요 참고문헌
-조선인 반란/백남철 역, 1981년
-수마트라의 남십자성/강석재, 藝鄕 1995년 4월호
-일본군 위안부의 지역적 분포와 그 특징
/강정숙, 1997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보고서
/국가보훈처&독립기념관, 2006년
사진설명
1. 일본 군정기간 중에 사용되던 군표(軍票). 패전한 일본군은 수일 내에 연합군이 진주하면 이들에게 모든 물자 재고와 군표를 넘겨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이전에 차라리 조선인들에게 양도하는 것도 괜찮다고 판단하여 1,600명의 회원들이 3년 정도는 견딜 수 있는 다량의 물자와 군표를 <조선인 민회>측에 넘기게 된다.
2. 암바라와의 상징인 성 요셉 성당(Gereja Katolik Santo Yusup, Jl. A.Sugiyapranta SJ No.56, Ambarawa).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 3인은 이 성당 앞에서 그들이 탈취한 트럭을 버리고 거사를 시작하여 1945년 1월 4일부터 1월 6일까지 3일간 12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모두 자결하였다.
3. 1월 4일 거사 당일, 총상을 입은 민영학은 인근 옥수수 밭으로 들어가 먼저 자결하였다. 사진 왼쪽은 민영학이 자결한 옥수수 밭 입구이며 오른쪽이 자결한 옥수수 밭이었으나 현재는 벼가 재배되고 있다.
4. 버마 전선에서 탈출한 조선인 위안부들. 이들 중 맨 오른쪽에 임신상태로 서 있는 여인의 이름은 박영심으로 북한에 거주하다가 2006년 8월 7일 사망하였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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