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 이선진 전 대사의 일기 - 제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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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사하는 일이 무엇이야”
내가 대사로 부임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아서 여름 방학 때 자카르타를 찾아 온 대학생 애가“아빠, 대사 하는 일이 무엇이야?”고 물었다. 이에 대해 교과서적인 답변을 하였지만 내가 대사로서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졌고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대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내가 대사로 있을 당시 주인도네시아 대사관 직원은 서울 파견 직원 20 여 명과, 현지 직원을 합하면 7-80 명 규모이다. 인적 규모면에서 영국, 불란서에 주재하는 한국 대사관보다 크다. 이와 같이 직원도 많고, 좋은 집(관저)도 주고 많은 나랏돈을 쓰면서 대사가 과연 하는 일이 무엇인가?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다. 솔직히 이질문에 대하여 지금도 명료하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다만, 대사는 24시간 혼신을 다하여 일 해야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다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 정부 부처나 기관, 그리고 교민들의 요구를 받아 처리하는 최종 책임자는 대사인 만큼 머릿속이 항상 복잡한 것이 대사의 하루이다. 그 동안 연재한 대사의 일기를 통하여 대사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 되었으면 좋겠다.
2. 후임 대사에게 하고 싶은 말
나의 일기를 공개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인도네시아에 부임하는 후임 대사들에게 참고가 될까하는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직업 외교관 (career diplomat)이 아닌 외부 인사들이 대사로 부임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나는 직업외교관 출신이지만, 나의 대사 롤 모델은 황병태 前 주 중국 대사이다 (제1화). 내가 주 중국 대사관에서 2년 이상을 모셨다.
황 대사는 경제부처 관료와 정치를 하던 사람이었지만 직업외교관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일에 대한 열정 및 강한 추진력, 사업추진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칠 때 돌아가는 지혜, 公私의 엄격한 구별, 항상 공부하는 자세 등등.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황 대사라면 어떻게 하였을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직업 외교관의 경우, 대사가 되려면 20 여 년 걸려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하는 만큼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단기적 성과보다 벽돌을 하나씩 쌓는 (brick by brick) 방식을 좋아한다. 나의 경험을 들어 직업 외교관 출신의 답답함(?)한 모습을 설명해보고자 한다. 어느 날 대통령 궁의 의전비서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한국 대기업의 CEO가 대통령과의 면담을 몇 시간째 기다 리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한국 대사는이 기업인의 대통령 면담에 찬성하느냐고 물었다. 한국 기업 서열 10 대 이내의 대기업이다. 나는 그 기업의 총수가이 나라 대통령을 만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무슨 사업 건인지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대사로서 한국 기업인이 무슨 일로 대통령을 만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 면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이 나라 정치인이 자기의 영향력을 과시하려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장담하였던 것 같으나 대사의 한 마디로 무산된 결과가 되었다.
나는이 일로 우리 기업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방해하였다는 죄목(?)으로 구설수에 크게 오를 뻔 하였다. 나는 양국 경제교류에 많은 정력을 쏟았지만 “한 건 주의”식 사업 방식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면 후임 대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인도네시아는 인구, 국토면적, 경제규모 면 에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큰 나라이다. 또한,이 나라는 인구 2억 3천만 명, 세계 제5위 경제권 아세안의 맹주이다. 지리적으로 보면, 태평양-인도양의 연결고리에 위치하고 있어 앞으로 정치.안보 분야에서 이나라의 국제적 지위는 계속 높아 질 것이다.
한국 경제에서 인도네시아의 비중은 갈수록 커 질 것이고, 미국과 중국의 경쟁 구도 속에서 한국의 정치. 안보 면에서도 이 나라의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우리 방산 수출의 제일 큰 시장의 하나이다. 이 나라 잠수함 3척을 수주하여 건조하고 있고, 한국산 T50 초음속 고등 훈련기도 이 나라에 수출하는 등 방위산업 분야에서의 협력 잠재력도 계속 커질 것이다.
신임 대사는 이와 같이 중요한 나라에 관하여 부임 전부터 많이 공부하고 전문가, 기업인, 문화인 등 다양한 인사들과 토론하여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한 자기만의 과제(agenda)를 준비했으면 좋겠다. 주 인도네시아 대사는 본부의 지시만을 충실하게 이행하면 되는 자리가 아니고, 즉 현재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양국 관계를 양적, 질적으로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 자리이다.
나는 이제까지 인도네시아 발령을 받아 부임 준비하는 후배 대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 하였다.
첫째, 자기만의 agenda를 가지고 부임하라고 권하였다. 본부 지시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보다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자신만의 과제를 가지라는 의미이다. 이에 집중하여 3년 후 이임할 때는 작은 성과라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조언하였다.
나는 2005년 5월 두 가지 개인적 agenda를 가지고 부임하였다 (제1화). 하나는, 인도네시아. 북한 특수 관계를 남북한 관계의 안정화에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 인도네시아 경제 교류를 활성화하여 한 단계 높인다는 목표였다. 그 결과에 관하여는 이미 본문에서 설명하였지만 북한 문제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후술). 그래서 북한 과제를 접고 한. 인도네시아 경제 교류에 집중하였다. 그 내용은 제6화 “경제에 매달리다”에 상세 기술하였다.
둘째, 부임하면서부터 한국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방문 준비를 시작하라고 권하였다. 인도네시아의 중요성에 비추어 대사 임기 3년 중 한국 대통령의 인도네시아 방문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 방문은 수시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몇 년에 단 한 차례 있는 기회이다. 양국 정상의 만남은 국제회의 계기 등에서 수시로 있으나 긴 면담과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정상방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상 방문에 대비한 대사의 준비란 의전이나, 외교적 선전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국간 정치, 경제, 문화 분야의 실질 협력 분야를 찾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지고, 정상간에 이 사업들에 관하여 합의하고, 이를 후속 조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하여, 실질적 성과가 나타나는 1-2년 후까지를 내다본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대사가 주재국 정세의 흐름을 놓쳐서는 안 되고, 주재국 정부. 재계. 언론. 학계 인사들과 만나면서 대통령 방문 성과물을 찾는 작업을 인내심 있게 추진해야 한다. 또한, 우리 교민들도 오랫동안 이 나라에서 살면서 쌓아 온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아이디어(inspiration)를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사업이 세월이 지나면서 가능한 항목으로 바뀔 수도 있다.
나는 2006년 새해 벽두부터 유도요노(SBY) 대통령의 한국 방문 계획 설이 나오면서 정상회담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SBY의 한국 방문이 몇 차례 연기되었고 결국 그 해 12월 노무현 대통 령의 방문이 먼저 이루어졌다. 거의 1년에 걸쳐 발굴되고 준비된 사업들은이 때 활용되었다. 그다음 해(2007년) 200여명의 한국 기업인의 자카르 타 방문, SBY의 한국 방문으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후속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97/8 동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단절되었던 양국 경제인 교류가 재개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한국 기업의 신뢰와 투자가 회복되었다.
셋째, 아세안의 경제통합(2015년 ASEAN Economic Community 창설) 진전을 중시해야 한다. 한국은 아직까지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개별 국가에 대한 나라별 전략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이제부터 인구 6억 3천만 명, GDP 대비 세계 5 대 경제권으로 부상한 아세안 경제통합을 주목하여 아세안에 대하여 “國別 plus 地域 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기업은 물론 우리 정부도 “國別 plus 地域 전략”을 추구해야 하며, 일본과 중국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하였다. 이는 내가 외교부 퇴직 후 대학 강단에 서면서부터 시작한 동남아 배낭여행을 시작하면서 동남아의 통합이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제안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미얀마와 라오스를 제외하고 모든 아세안 국가들과 육상이나 해상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
아세안 주재 한국 대표부 대사가 아세안의 통합에 관하여 전담하겠지만 주 인도네시아 대사도 아세안의 통합을 주시하여 필요시 우리 정부와 기업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한국.인도네시아 정부가 협력하여 아세안 공동체 (정치/안보, 경제, 문화/사회 3개 분야)을 활용할 방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는 경제공동체 발족이전에 아세안 각 국에 흩어져 있던 가전제품 생산 공장을 베트남 공장(호치민 시)으로 모으고 있다. 한국 중소기 업들도 미얀마에 한국 기업 명의로 진출하기보다 인도네시아나 베트남 기업 명의로 진출할 경우 보다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일본의 기업들은 아세안 통합에 대비한 기업 전략을 훨씬 전부터 실행해 왔다. 제2기 아베 총리는 아베노믹스 (Abenomics)라는 경제기치를 내세워 출범 1년 내에 아세안 10개국 전부를 방문하였다.
한국의 성장 동력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현재 정부나 기업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도네시아 주재 우리 대사관의 비전과 노력에 따라 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우리 정부와 기업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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