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어쩌면 그 옛날 무적과도 같았던 청나라와 러시아를 육전과 해전에서 보란 듯이 거꾸러뜨리던 일본의 위력 앞에 경악하던 조선민족의 마음속에 시나브로 움텄던 일말의 경외감와 동경심, 그리고 두려움이, 350년간 동인도제도에서 폭압으로만 일관했던 네덜란드군을 거침없이 격파한 일본군의 진주를 목도하던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의 마음 속에서도 들불처럼 번지며 뜨겁게 타올랐을 것이다. 당시의 수까르노처럼 말이다. 그 마음을 가늠 해 보기 위해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서 연합군을 격파하던 과정을 잠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 일본은 현대산업국가로의 변모에 성공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다. 아시아 대부분이 미국이나 유럽열강의 지배하에 있을 때 일본은 아슬아슬하게나마 독립을 유지한 몇 되지 않는 나라 중 하나였고 얼마 후 유럽열강 중 하나인 러시아를 러일전쟁에서 완파하며 놀랍게 향상된 군사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중국을 침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스스로 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를 자임했다. 그들은 일종의 상권개념의 ‘아시아 공영권’을 주창하며 이를 주도한다는 명목으로 동남아에도 눈길을 돌렸다. 일본은 20세기 전반기 동안 아시아 전역에서 점차적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고 1920년대부터 동인도제도와도 교역관계를 개설했다. 그 교역은 작게는 작은 마을의 이발소, 사진관, 방물장수 등의 개인사업자들로부터 크게는 백화점, 사탕수수 무역으로 상권을 장악하는 스즈키, 미쯔비시 같은 대기업들까지 총망라했다.이 지역의 일본인 거류민 인구는 1931년 6,949가구로 정점을 찍었고 그 이후 네덜란드 총독부와의 갈등으로 인해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일본정부는 일단의 거류민들을 공작원으로 활용해 현지 민족주의자들, 특히 무슬림정당 인사들과 교분을 쌓도록 했고 그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것은 일본이 추구하는 ‘아시아 인들을 위한 아시아’로 가는 길이었고 인도네시아인들이 네덜란드에 반기를 들게 만드는 것은 자국의 이익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네덜란드의 착취와 차별구도가 조만간 종식될 것이라는 일본인들의 약속에 대다수의 인도네시아인들은 희망을 품었으나 식민정권의 비호를 받아 특권을 누리던 화교들만은 예외였다. 1930년대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화교들이 막대한 규모의 항일전쟁 지원기금을 모금한 사실에서도 일본에 대한 그들의 우려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밑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일본은 타파해야만 할 또 하나의 파시스트국 가일 뿐이었다. 네덜란드 정보국으로서도 잠재적 적국 국민인 일본인 거류민들을 눈여겨 감시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일본에 대한 현지의 이해구도는 그렇게 극명히 나뉘어져 있었다.

1941년 11월 종교정치조직인 인도네시아 인민 대표회의와 무역연대집단들은 일본의 전쟁위협에 대비해 인도네시아인들을 동원하자는 청원서를 네덜란드 총독부에 제출했는데 총독부는 공식적 인민대표단체의 청원이 아니라며 간단히 거부해 버렸다. 불과 4개월 후 동인도제도 전체가 일본군 손아귀에 떨어지리란 것을 오만한 네덜란드 총독부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상상조차하지 못 했던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네덜란드는 일본에 전쟁을 선포했다. 일본이 아니라 네덜란드가 선전포고의 주체였다니 좀 의외이긴 하다. 이듬해 1월, 동남아 전역의 연합군 부대들을 조율할 목적으로 아치볼드 웨이블 장군 휘하에 미국-영국-네덜란드-오스트렐리아의 연합사령부(ABDACOM)가 설치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는 하인 텔 폴텐 장군 휘하의 네덜란드군 8만5천 명이 있었지만 네덜란드인 장교들과 현지인 병사들로 구성된 이 부대들은 훈련상태나 장비면에서 일본군과 맞서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그들을 향해 진격해 오던 일본군 주력은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의 제 16군으로 제2, 제38, 제48 사단 및 제56 혼성여단을 휘하에 두었고 막강한 해군화력을 등에 업고 있었지만 병력규모 자체는 네덜란드군의 절반 정도였다. 그러나 연이어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함락시키며 연합군을 대파한 일본군의 위용에 공포에 질린 동인도제도의 네덜란드군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심리적으로 패배한 상태였다. 고위관료들은 침공 몇 주 전부터 가족, 개인비서들을 대동해 호주로 망명했고 정치범들도 후송되기 시작했다. 당시 현지 연합군 대부분은 본국이 나찌에게 점령 당했거나 나찌와의 전쟁에 거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었으므로 머나먼 태평양에서 지역 최강의 해군력을 보유한 일본군과 홀로 일전을 벌여야 했지만 그것은 승산없는 게임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으므로 일본군이 상륙하기도 전, 현지 치안 시스템은 급격히 무너져 내렸고 라이벌집단들간의 유혈충돌이 벌어지면서 살인과 납치, 실종사건 들이 빈번하게 벌어졌고 많은 화교들과 네덜란드인들의 생명과 재산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1942년 초 일본군의 침공은 신속하게 전개되었다. 1941년 12월 15일 브루나이 침공을 시작으로 일본군은 영국령 사라왁의 유전지대에 상륙했고 24일에는 쿠칭, 1월 11일에는 북부 보르네오의 타라칸까지 진주했다. 이후 1월 24일에는 발릭 빠빤의 유전지대가, 2월 10일에는 반자르마신이 함락되면서 자원의 보고 보르네오섬 전체(오늘날 의 깔리만탄)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하지만 일본군은 사용가능한 유전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원유 확보는 남방작전을 수행하는 일본군의 최대 과제였으므로 정유시설을 파괴하면 그 일대의 모든 유럽인들을 참수하겠다며 엄포를 놓았지만 이런 경고를 비웃으며 로열더 치쉘의 민간 원유기술자들은 일본군이 도달하기 전 발릭빠빤의 유정들과 정유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했던 것이다.

한편 셀레베스섬(오늘날의 술라웨시) 북단 마나도에선 해군소속 공수부대 투하를 시작으로 일본군의 강습이 시작되었다.이 작전은 태평양 전역 최초의 공수작전으로 기록된다. 일본은 1940 년 당시 프랑스 침공에서 활약한 나찌독일 공수부대에게 감명을 받아 육군과 해군이 44식 기병총이나 2식 소총으로 무장한 연대급 공수부대를 각 각 창설하여 육군은 이들을 정진연대(挺進連隊), 해군은 공정부대(空挺部隊)라 불렀다.

그렇게 창설된 해군육전대의 공정부대 1개 대대가 1942년 1월 11일, 마나도 비행장에 낙하된 것이다. 전선 후방에 낙하한 공수부대가 적군 전술 비행장을 우선 점령하는 것은 이미 고전적 작전이 되어가고 있었다. 네덜란드군 수비대의 저항은 대세를 되돌리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다음 날 2차 공 수부대가 추가로 낙하하고 상륙작전도 동시에 진행되자 패퇴를 거듭한 마나도의 네덜란드군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2월에는 일본군이 빨렘방을 비롯한 수마트라에 상륙했고 이에 고무된 아쩨인들이 네덜란드 총독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2월 19일 이미 암본을 장악한 일본군 특임대가 띠모르섬에 상륙했고 꾸빵 인근 서띠모르 지역에도 공수부대가 투하되었다. 2월 27일 일본군의 병력전개를 막으려던 연합군 측 해군은 자바해전에서 전멸당하다시피 했고 그 결과 1942년 2월 28일에서 3월 1일 사이 일본군은 자바섬 북쪽 해변 4개 거점을 통해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상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암본과 띠모르, 깔리만탄, 그리고 자바해의 주요 거점들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네덜란드 부대가 주둔하지 않았던 발리에서는 거의 이렇다 할 연합군과의 육상교전이 없었다.

결국 1942년 3월 8일 하인 텔 폴텐 네덜란드군 사령관이 용키어 A.W.L 자르다 반 슈탄켄보러 슈 타카우워 총독과 함께 일본군에게 전격 항복하기까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서 수많은 접전이 벌어졌지만 그중 세계 전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몇 몇 전투들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기로 한다.

빨렘방 전투 

빨렘방 전투는 1942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빨렘방과 그 인근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일본제국군은 쁠라주 지역 인근 로열더치쉘 석유회사의 정유시설 탈취를 주목표로 잡고 있었다. 연합군에 의해 원유 엠바고가 발동된 상황에서 빨렘방 유전 지대에 있는 양질의 원유와 엄청난 매장량, 완벽한 정유시설, 그리고 인근에 소재한 군용 비행장 등은 일본군에게 너무나 매력적이고도 중요한 전략적 목표였다.

그해 1월 ABDACOM은 수마트라의 공군력을 빨깔란벤뗑 P1 비행장과 쁘라부물리의 P2 비밀 비행장 두 곳에 집결시켰다. 영국공군은 제225 전폭기 편단을 빨렘방에 조직했는데 이는 호주공군 두 개 편대와 다수의 영국 편대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40기의 브리스톨 브렌하임 전폭기와 35기의 로키드 허드슨 경폭격기를 보유했다. 브렌하임 전폭기는 독일과 이태리의 전투기를 감당하기엔 너무 노후해 중동과 이집트에서 퇴역한 기종이었다. 미군 극동공군의 신예 B-17 플라잉 포트리스 전폭기가이 지역에서 잠시 운용되었지 만 빨렘방 전투 직전 자바섬과 호주로 부대가 옮겨진 상태였다.

제226 전투기편대는 영국항모 인도미터블 편으로 2월 초 빨렘방에 도착한 호커허리케인 전투기 2개 편대로 편성되었다. 그들은 이미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심각한 손실을 입은 영국, 호주, 뉴질랜드 공군의 허리케인, 브루스터 버팔로 전투기 편대의 잔존 항공기들과 함께 재편성하여 임박한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 성능을 차치하고이 항공기들을 모두 합쳐도 앞으로 일본군이 몰고 올 A6M 제로기와 전폭기들을 포함, 350여기 규모의 항공기들과는 큰 전력차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