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 김문환 논설위원 컬럼 - 코리아 타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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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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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환/논설위원
제3공화국 정권의 2인자인 JP와 그의 셋째형 김종락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우애가 깊었다.
일본 니혼대 경제과를 나와 한일은행 전무를 거쳐 서울은행장까지 역임하는 동안 탁구협회, 야구협회를 주도했던 김종락이 운동기구 제작사업을 위해 대한체육회회장인 민관식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면서 미국 쾌속정 조선업체인 타코마(Tacoma)사의 관계자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자기들이 만드는 군함을 한국에서 만들기 위한 합작사업을 제의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그 내용을 해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에게 전달하자, 마침 최신형 함정이 절실하던 해군이 쌍수를 들어 반기게 된다. 김종락은 1970년 전격적으로 ‘코리아타코마 조선공업㈜’이라는 조선소를 설립하여 1991년까지 회장직에 앉게 된다. 이 당시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공업 육성과 함께 방위산업도 우선순위에 올려놓을 때였다.
코리아 타코마사의 지분 45%를 보유한 최고경영자가 된 김종락은 1980년대 초 해군상륙함 수주 차 자카르타를 자주 드나들고 있지만 최종 승인은 함흥차사였다. 당시 인도네시아 방산관련 국책사업은 수하르또 대통령을 정점으로 유숩 국군총사령관, 각군 참모총장, 국방부 군수국장 순서의 구조였는데, 김종락은 JP의 배경을 업고 요기 수빠르디 군수국장(주일대사 역임)은 물론 유숩 대장까지도 다 결재를 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재가가 떨어지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군부철권정치가 정점을 이룬 때였으며, 특히 치안질서회복사령관(KOPKAMTIB)인 수도모(Sudomo) 제독의 역할은 막중하였으며 그의 활동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매스컴에 등장할 정도였다. 어느 날 김종락은 혹시 수도모 제독이 그 해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여 그를 면담하여 고민을 털어 놓았다. “제독, 귀하도 아시다시피 국군의 최고 결정권자인 유숩 대장의 내락을 받았는데 왜 발주서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수도모 제독은 특유의 쓴 미소를 지으며 김종락을 가까이 끌었다.
“여보 미스터 김, 당신은 아직 모르시는 겁니까? 인도네시아엔 오성(五星) 장군이 있다는 것을?”
김종락은 어한이 벙벙했다. “오성 장군이라뇨? 유숩 대장 말고 그 위에 또 누가 있습니까? 혹시 수하르또 대통령을 말하는 겁니까?” “허허… 미스터 김, 아직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구만요. 수하르또 대통령이야 말 그대로 대통령이지 무슨 장군입니까? 베니 무르다니 장군을 아직 모르고 있소? 그가 바로 오성 장군이요. 베니 장군의 협조서명이 나와야 최종결재 되는 겁니다.” 수도모 제독과 면담을 마치고 나온 김종락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뻐근하였다. 한편 제대로 정곡을 찔러준 수도모 제독이 무척 고맙기도 하였다. “베니 장군이라???…….얼마전까지 별 두 개 달고 국방부 정보참모인가 하다가 중장으로 진급하여 전략정보사령관(BAIS ABRI)인가 하는 그 과묵한 사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온갖 궁리를 다하며 베니 장군에 대한 신상을 더 알아보고 대책을 세우기로 하였다. 김종락이 여러 채널을 통해 알아본 그의 이력 중 특이사항은, 1970년부터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사 및 대리 대사 재직 중, 1974년 1월 급거 귀국하여 인도네시아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3성 장군이란 사실이었다. 이 사람이 실세라니 김종락은 자기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너무 무지했으며 심지어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다소 얕잡아 본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김종락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한국인 미스터 초이(Mr.Choi)를 통하면 베니 장군과의 얘기가 쉽게 풀린다는 귀뜸이었다.
전차상륙함(LST)
자존심만 움켜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김종락은 만다린호텔에 장기투숙하고 있는 최계월 사장과 곧장 약속일정을 잡았다.“최 사장, 귀하가 인도네시아 실력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내 아우를 도와 한일회담 성사에 크게 기여한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런데 내 지금 고충이 하나 있소.”최 사장은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다 감을 잡고 있었으니 조용히 경청하기만 하였다.“최 사장, 베니 장군과 각별하시지요? 이제 베니 장군만 협조해주면 우리가 수주할 군함을 인도네시아에 팔 수 있게 되었소. 국가적인 사업 아니요? 베니 장군에게 잘 좀 얘기해 주시구려. 부탁 드리오.”최계월과 JP와의 특별한 인연은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계월은 1990년대 중반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에서 한일회담의 주역인 JP와 이동원 외무장관을 민간베이스에서 측면지원한 바 있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독도밀사’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한일간을 드나든 김종락과의 인연도 이때 맺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떻든 김종락의 언급대로 대한민국 국책사업이 아닌가? “알겠소. 우선 알아보고 최선을 다해 보겠소.” 회동을 마치고 나온 그날 저녁 사내임원 회식자리에서 최계월은, “총리의 형이면 이곳에서도 다 통하는 줄 알고 나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더니 이제 와서 도와 달라고 애원을 하는 건 뭐꼬? 한편으론 괘씸하기도 하지만 국익을 위하는 측면에서 어쩌겠나? 도와줘야겠지?” 이렇게 토로하는 것이었다.
바로 다음 날 저녁 남부자카르타 떠벳(Tebet) 지역에 소재하는 베니 장군의 집무실을 찾은 최사장은, “베니 장군요, 이거 하나 도와줘야겠쑤다. 군함 수주건 말입니다. 그 회사의 오너가 장군이 한국총영사로 계실 때 남산 외교구락부인가에서 함께 만났던 JP의 셋째형 아닙니까? 우리 양국의 경제협력 차원에서 굉장히 의미있는 사업이니 꼭 성사되도록 부탁 드립니다. ”그렇게 하여 코리아 타코마사는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해군 상륙함(LST) 수주에 성공하였으며 코리아 타코마사는 그 후로도 정비, 보수 등 파생사업으로 계속 연결하게 된다.
미국과의 기술제휴로 상당한 기술력을 자랑했던 코리아 타코마사였지만, JP의 정권복귀를 두려워한 노태우 정권이 이 회사에 대한 자금지원을 끊어버리자 이후 한진중공업을 거쳐 성동조선소에 매각되었다. 코리아 타코마사는 그간 엘리게이터급으로 불리는 전차상륙함을 남미,동남아시아 국가에 수출하면서 외화가득과 방위산업 발전에 일조한 바 있다. 1980년에서 1982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해군에 전차상륙함 6척, 1983년에서 1984년 사이에는 베네수엘라 해군에 전차상륙함 4척을 수출하였고, 그리고 1988년에는 태국에 전차상륙함 설계를 유상으로 제공하였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코리아 타코마 조선공업은 정부로부터 특수선 전문화업체로 지정되었으며, 1987년에는 한국형 전차상륙함의 기본 설계를 맡기에 이르렀고, 4년간에 걸친 상세설계 및 시제함 건조를 담당하며 공기부양선, 잠수함도 건조하였다. 결국 한국 군함제작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코리아 타코마사는 1991년 한국 국내 정치지형에 좌우되어 그 수명을 다하고 만다. 그 당시 인도네시아공화국에 무력합병된 동띠모르(Timor Timur)에 군수품을 대량 공급했던 국내 H그룹과 함께 그 효시를 이루었던 대 인도네시아 군납, 방산수출은 이와 같이 권력구도의 변화라는 외풍에 맞아 맥이 끊기며, 20년 후인 2000년대에 들어와 고등훈련기니, 잠수함이니하며 그 초석을 새로 깔아야 하는 어려움을 감내하게 된다.
캐리커츄어 : 작가 배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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