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01월 Jalan-Jalan Jakarta / YANI대장 박물관<사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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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 경(한*인니문화연구원장/한국문인협회인도네시아지부장)
혁명 영웅 YANI 대장 박물관
SASMITALOKA PAHLAWAN REVOLUSI
JENDERAL TNI ANUMERTA ACHMAD YANI
“나는 왜 군인이 되었는가, 나는 애국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왜 애국자인가. 나는 내 조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Jend. Achmad Yani
Yani 장군이 즐겨 사용하던 말이며 집무실 액자에 친필로 그렇게 적혀 있다.
아흐맛 야니(ACHMAD Yani) 장군은 1922년 중부 자바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식민 시절에 기 초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는 일본 통치기에 청년 조직PETA(Pembala Tanah Air)에 가입해 장 교훈련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전쟁 에 참가했다. 또 이리안자야를 네덜란드로부터 독 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63년 수카르 노는 말레이시아의 영국 식민지 프로젝트는 인도 네시아의 미완의 혁명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그 래서 야니 장군을 말레이시아와의 무장 투쟁에, 또 종교적 혁명에도 참가하도록 했다. 그는 빠르 게 진급했고, 1962년 6월 군 최고 장성으로 임명 되었다.
1965년 10월 1일은 7명의 혁명 영웅을 잃어버 린, 국가적으로 슬픈 날이다. 인도네시아 국가 이 념인 빤짜실라(PANCASILA) 정신을 잘 고수했 던 그들의 죽음이라 이 날을‘빤짜실라 데이’라 고 부른다. 6명은 장군이었고 한명은 장군의 부관 이었다. 삼성 장군 아흐맛 야니(Achmad Yani)도 이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서거하고 나서 별 네 개 로 진급한다.
그는 금요일(10월1일) 새벽4시 30분, 집에 쳐들어 온 공산군에 의해 피살되고, 시체는 끌어내 어져 Lubang Buaya으로 옮겨졌다. 10월 4일 희 생된 다른 군인들과 깔리바따 (Kalibata) 영웅 묘 지에 묻힌다.
1930년-1940년대 지어진 이곳은 처음에는 네 덜란드의 사립 항공사 관계자의 자택이었다. 1950년대에는 군사 주택 사무소에 의해 관리되 었다. 이 박물관은 장군Yani가 거주하던 집이며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야니대장의 애국심을 기리기 위해 수하르토의 지시로 장군이 돌아가신지 1년째 되는 날, 즉1966년 10월1일 에 박물관으로 개관되었다. 현재 인도네시아 육군 역사 관리 기관이 운영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역 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왜 공산당들은 야니 장군을 지목했는지, 그가 정말 영국과 미국의 모 종의 작전에 개입했는지, 타락한 집단의 일인자였 는지, 장군이 천명한 대로 그러한 음모와 무관한 지는 잠시 접어두고 싶다. 보이는 그대로의 그는, 따뜻한 아버지였으며, 훌륭한 군인이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거사 주모자들은 주로 수카르노 대통령 경호실 소속 인물들이었다. 이 사건은 수카르노를 실각시 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를 진압한 수하 르토가 이 때부터 실세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후 반제국주의와 반식민주의 그리고 혁명을 강조 하였던 수카르노 시대와는 달리9.30 사태이후 새 로운 인도네시아 정부는 경제 개발과 반공을 최우 선으로 삼았다. (10월 1일 새벽에 일어난 사건이나 9월30일 밤에 작전을 개시했 으므로 9.30사태라고 한다.)
이 곳에는 방문자 대기실, 보좌관 집무 실, 휴식을 취했던 코너가 잘 보존되어 있 고 응접실 벽에 걸린 큰 그림에 그 때의 처절하고 급박했던 상황이 잘 나타나 있 다. 이 사건을 예견한 듯 장군의 방에는 사망하기 이틀 전 번개를 맞은 자국이 그 대로 보존되어 있다. 부엌에는 그가 총에 맞아 쓰러진 자리가 표시되어 있으며, 다 큐멘터리 사진으로도 전시되어 있다. 그의 삶과 죽음에 관한 사진들 외에는 그때 당시의 집안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첫 번째 방은 대기실이다. 방 안에는 다양한 종 교와 권위를 상징하는, 정부 부처에서 받은 기념 품과 동료들이 선물로 준 예술품, 무기, 배지, 메 달, 코끼리 상아 등 많은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두 번째 방은 보좌관이 근무했던 방으로 사무에 필요한 용품과 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방에서 는 몇 개의 유리 상자와 그의 장교 시절의 사진과 장교를 상징하는 수집품이 있다. 이를 보면 그의 영웅의식과 함께 뛰어난 군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傳記도 있고 군대와 일반지식에 관한 모음 집도 있다. 주치의에게서 선물 받은 수마트라 호 랑이가 박제로 전시되어 있다.
세 번째 방은 장군이 휴식을 취했던 방이다. 휴식 을 취하는 동안 그는 정원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을 바라보곤 했다. 이 방에는 골프채가 보관되어 있는데 골프는 그가 좋아하는 스포츠 중의 하나였 다. 또 Yani 장군 동상 모형이 있는데 수마트라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에 많은 일을 한 장군이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동상으로 만들 수 없 다하여 수카르노 대통령이 반대를 했으나 야니 장 군이 죽은 후에 세워졌다.
네 번째 방은 특별실이며 작업실이다. 이곳에서 부관으로부터 브리핑을 받곤 했다. 벽에는 장군이 사건 당일 공산당과 격투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피의 새벽”이라고 한다. 1965년10월 1일, 공산당G30S/PKI 150명이 집을 포위 하고 차량을 막았으며, 4명은 집으로 들어와 경비 원과 일하는 사람을 협박해서 부엌문에서 장군을 불렀다. 그 당시 잠에서 깬 7살인 막내아들 에디 는 그들을 보고 침실로 가서 아빠를 깨웠다. 그가 나갔을 때G30S/PKI 소속 무키쟌 중위와 상사는 “시간이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기다리고 계십니 다.”라며 빨리 동행할 것을 재촉했고, 장군은 “ 이른 아침부터 웬 소란이냐 세수라도 하고 가자” 라고 말했으나 그들은 “장군님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세수도 안됩니다. 지금 당장요”했 다. “피의 새벽”은 야니 장군이 화가 나서 주먹 을 날려 중위를 때려눕히며 그들과 격투하는 장면 을 1967년 BP. Omar 화가가 그린 것이다.
다섯 번째 방은 식당과 바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식당은 그의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장소였 다. 이 방에는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다양한 물건 들을 찾을 수 있다. 춤추는 사람들이 새겨져 있는 카펫을 매형 Mr. Sumadi와 누나가 Yani와 Yayu Rulia 가1944년 결혼할 때 결혼 선물로 준 것인 데, 그가 무척 아끼던 것이다. 독립전쟁 때 그는 이 카펫을 담요로 쓰곤 했다. 또 해외에서 들어온 수집품과 장식품과 사진들. 같이 희생된 혁명 영웅 들의 사진. 부인이 좋아했던 유채물감으로 그려진유리컵 받침이 잘 정돈되어 있다.“yon 530 Para Garuda Ⅲ Conggo”라고 새겨져 있는 아프리카 코끼리 상아가 있는데 이는 콩고 대통령이 인도네 시아 군인들이 콩고에서 6개월간 훈련을 받고 임 무를 완전하게 수행했을 때 선물로 준 것이다.
빌딩 전체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A. Yani 장군 이 죽어서 쓰러질 때의 위치는 Sasmitaloka 건물 의 성스러운 장소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화가 나 서 공산군을 때리고 부엌문을 닫고 들어가는 순간 7발의 총을 맞고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실 에서 죽어갔다. 더 안쪽으로 가면 야니의 가족사 진으로 꾸며 있는 식당이 보인다. 공산단원들이 총을 맞아 몸에서 피가 떨어지는 야니를 부엌으로 끌어갔다. 게다가 총알 2개가 야니 침실 밖에 있는 그림을 뚫었다. 이 날 장군의 부인 Rulia는 자신의 생일(10월1일)을 정갈하게 맞이하기 혼자 조용 히 기도하려고 수카르노 대통령에게서 선물 받은 집으로 가고 없었다. 이렇게 그는 1965년 10월 1 일 새벽에 G30S/PKI의 무리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바닥에 그가 죽 은 곳을 표시해 놓았다. 벽에는 그때의 총탄 자국 을 아직도 볼 수 있고, 유리문도 총격에 의해 뚫려 있다. 장군의 시신은 질질 끌려 나가 트럭에 실렸 다. G30S/PKI의 무리들은 사건 종결 후 20년 후 에 사형이 집행된다.
Bar에는 국내외에서 생산된 다양한 종류의 술이 보관되어있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손님에게 대 접하는 용도였고, 야니 장군 혼자서는 마시지 않 았다고 한다.
여섯 번째 방은 장군의 침실이다. 가정적이고 자 상한 아버지였던 그는 크지 않은 침실에서 자식 들은 침대에서 자게하고, 자신은 항상 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박제화 된 영웅 군인의 이미지 가 아니라 따뜻한 인간으로서의 숨결이 느껴진다. 침대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상태가 좋다. 침대 위에 8명의 자녀들과 찍은 흑백사진이 있는 데, 사건 당시 장남이 18살이었다고 한다. 침실 오 른쪽 윗부분 벽에 크게 금이 갔는데 야니 장군이 피살되기 며칠 전 번개가 부딪쳐 일어난 일이었 다. 그때 그의 부인은 불길한 예감에 아주 불안해 했다고 한다. 이방에는 또한 많은 무기와 G30S/ PKI (공산군부대)에서 쓰던 탄알들이 있다.
공산군들이 Yani 장군을 사살할 때 사용했던 총Thomson 총은 체코에서 만들었다. 11323 번, 12839번의 총은 S. Parman과 작은 영웅들, AdeIrma Suryani을 쏠때 사용했던 총이다. 라 이트 머신 건이 있는데 이는 Yani의 동지인 혁명 영웅들을 Lubang Buaya에서 사살할 때 사용했 던 것이다.
그가 즐겨 입던 셔츠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 은 부인이 장군에게 생일 선물로 준 잊지 못할 선 물로 그가 죽었을 때 흘린 피를 닦았던 옷이다. 1965년 10월 그의 마지막 급여인 12만루피아( 당시 가격)는 아직까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 고 케이스에 잘 보관되어 있다. 또한 몇 개의 반 지, 유리 컵, 부대 스티커, 군복 등 오래된 것들도 잘 보관되어 있다.
일곱, 여덟 번째 방은 장군의 아이들 방인데, 나 무 침대와 옛날 60년대 우리들이 가지고 놀았던 미제 인형 같은 것들도 있었고, 여행 기념품, 그리 고 장군이 The Great kapitan Patimura로 진급 했을 때 받은 전통 의복, 그가 죽기 하루 전 딴중 쁘리옥(Tanjung Periok)에서 통신사 기자 누르 딘(Nurdin)에게 준Lucky Strike라는 담배도 보관되어있다. 장군의 셔츠, 아이들의 일기장도 보 관 상태가 좋다.
아홉 번째 방은 또 다른 거실로 사용. 지금은 문서 보관실로 사용되고 있다. 사건 당시 군인들이 루 방 부아야(Lubang Buaya)로 끌려가는 장면, 우 물에서 시신을 끌어 올리는 장면, 영웅묘지 칼리 바타로 가는 장면 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열 번째 방은 혁명 영웅들의 방이다. 장군과 9.30 사태 당시 같이 희생된 장군들과 관련된 수집품을 보관해 두었다. 소에프라프토 장군은 직접 문을 열어주었고, 그는 전통 복장을 입은 채로 끌려갔 다. 시간을 개의치 않는 대통령의 호출에 이미 익 숙해진 파르만 참모 총장은 곧 옷을 갈아입고 따 라 나섰다. 판쟈이만 장군은 용감히 맞섰으나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하르조노 역시 총살당했다. 독립 영웅이었고 국방 장관인 나스디온 장군은 야 니 일파는 아니었다. 그는 부인의 등을 타고 옆집 이라크 대사관으로 피신하다가 발이 삐었다. 화는 면했으나 대신 그의 부관과 어린 딸이 죽었다. 그 가 당시에 사용하던 지팡이와 침대가 전시되어 있 고, 어린 딸 아데이르마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건 직후 군부가 공산탕 소탕하는 일로 인도네시아 전 역에 폭력과 사살이 난무했다. 이 곳의 많은 전시 품들은 영어와 인도네시아어로 잘 안내되어 있고 가족들이 사용하던 차(Made in America)도 전 시되어 있다.
기념 우물 옆에 자리한 커다란 YANI의 동상은 집을 감싸고 있는 산뜻한 정원에 서 있다. 동상 아 래에 새겨진 글귀는 국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천년을 살 것이다.”
Jl. Lembang No. D-58,
Menteng, Jakarta Pusat (021) 31901623 개관 화요일-일요일 08:00~16:00입장료: 무료(미리 전화를 하고 가 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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