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허균의 이유있는 쓴소리 <월간문화재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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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식적인 세상을 향해 항의해도 괜찮아
문장가 허균의 이유있는 쓴소리 이 칼럼은 과거 의 인물이 현대인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가상 칼럼입니다. ※허균 :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회 모 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을 집필했다. 당대 명가의 후예로 태어났지만 자유분방한 삶과 파격 적인 학문을 추구하며, 부조리와 맞섰다. 파직을 당하며 굴곡 있는 삶을 살았지만 끝까지 자기의 꿈을 실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형을 따라 다니며 글을 배우던 시절, 형의 글 벗이었던 사명당을 만났고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 냈다. 불교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사명당은 나에게 “남의 잘잘못을 말하지 말게나. 이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재앙까지 불러온다네”라며 조 언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지키지 못할 거란 걸 알 고 있었다. 내게 주어진 천성에 따라 살겠다고 스 스로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성리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예절의 가르 침을 내세워 인간의 본성을 구속하는 시대였다. 나아가 그들은 온갖 특권을 누렸고, 나라는 불평 등해졌으며 전쟁은 수시로 일어나 강산을 유린했 다. 나는 그런 유학자들을 척으로 두고 대결해야 만 했다. 중국에서 이탁오가 유교반도로 몰려 처 형당했는데 조선에서는 바로 이 몸 허균이 유교반 도[1]의 길을 걸어갔던 셈이다.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오. 뜨고 가라 앉는 것을 다만 천성에 맡기노라. 그대들은 그대들 의 법을 쓰게.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 - 파직 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쓴 시 -
결국 그자들의 손에 의해 파직됐지만 나는 그 순 간에도 문장을 갈고 닦으며 수련했다. 그때 나의 불멸의 소설 『홍길동전』도 태어났다. 『홍길동 전』은 단지 규방 아낙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려고 쓴 것이 아니었다. 조선을 다스리는 임금과 임금 에게 아부를 떨며 권력을 쥐고 사는 벼슬아치들을 향한 경고의 일침이었다. 권력의 늪에 빠져 조금 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할 말을 해야만 했었다.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이다. 백 성은 물이나 불, 범이나 표범보다도 더 두렵다. 그 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백성들을 제멋대로 업신여기며 모질게 부려먹는다. 도대체 어째서 그 러한가? - 허균 「호민론」 -
이러니 임금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날 좋아할 리 가 없었다. 난 어디에서도 어울릴 수 없는‘시대 의 서얼’이었다. 그럼에도 할 말을 멈추지 않았 다. 『유재론』에서“하늘이 재능 있는 사람을 내 었는데, 사람이 이를 가문과 과거로 한정시키는 것 은 옳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조선에서‘오문장가[2]’로 불 릴 만큼 내로라하는 가문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난 뛰어난 재주를 지녔음에도 서얼이라는 신분 때 문에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는 친구들과 어 울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대의 부조리를 논 했고, 이런 불평등한 세상을 갈아엎는 게 장부의 나아갈 길이라는 것을 천명했다. 결국 나를 비롯 한 강변칠우[3]들은 역적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 로 사라지고 말았다. 난 죽음 앞에서도“할 말이 있다!”라고 외쳤다.
그 ‘할 말’은 4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 도처에 깔려있는 비상식적이고 몰상식적인 행동 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지적하고 항의하 고 개선하도록 할 말을 다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 면 비상식적인 일들은 마땅히 뻗어 나가야 할 뿌리 라도 되는 양 사회 곳곳에 자리를 잡고 말 것이다.
[1] 유교반도란 사회가 지나치게 유교화되면서 허균을 구속하자 유교에 염증을 느껴 반유교적인 성향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2] 허씨 다섯 명의 문장가를 일컫는 말로, 아버 지 허엽을 비롯해 허성, 허봉, 허균, 허난설헌 등 4 남매를 말한다.
[3] 강변칠우란 선조, 광해군 때 7인의 서얼 출신 서생들로,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 인, 박치의 ,김평손을 이르는 말이다.
글/김해등 작가 [월간 문화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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