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호 - 김문환 논설위원 칼럼[탈옥수 에디 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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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당시, 상하이에 주둔한 일본군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츄(C.M.Chow)는 실제로는 중국의 사주도 받는 이중첩자였다. 1942년 초 일본군이 동남아 전역을 점령하자 츄는 자바점령군 소속으로 배속되어 자바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긴다. 종전이 되자 츄는 고국인 중국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자카르타에 잔류하며‘Indonesian Overseas’라는 선박회사를 설립하여 사업기반을 구축해 나간다. 동시에 그는 모택동으로부터 중부자바, 동부자바, 수마뜨라, 술라웨시 지역의 화교들을 보호하라는 특명을 부여 받는다. 이때 츄의 보호를 받는 대상자들 중 탄(Tan Tek Hoat)이라는 화교가 있었는데, 그의 자손들이 바로 1980년대 인도네시아 금융계를 흔들어 놓았던 에디 딴실(Eddy Tansil)과 헨드라 라하르자(Hendra Rahardja) 형제였다. 지금도 북부자카르타 꼬따지역에 우뚝 서있는 BHS(Bank Harapan Sentosa)건물이 헨드라 라하르자의 소유였으며 그룹의 본사였다. 헨드라는 당시 최대재벌 림수룡과도 협력관계를 이뤄 고향 복건성에 합작공장을 건설할 정도로 밀월시대를 구가하였다.
에디 딴실은 1953년 우중빤당(현 마까사르)에서 Tan Tjoe Hong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상기 언급했듯이 그의 부친은 바로 일본군정시 일본군과 모택동 사이에서 이중첩자였던 츄(Chow)의 후 원을 받았던 탄(Tan Tek Hoat) 이었으며, 후일 수하르또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이 되어 권력자로 위세를 떨쳤던 수도모 제독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이 점이 바로 그의 아들 에디 딴실이 수도모 당시 정치안보조정장관을 끌어들여 소위‘바삔도은행 부정대출사건’을 일으킨 빌미가 된다.
에디 딴실은 사업초기 부친의 일을 도와 버까시군 땀분(Tambun) 지역에 PT. Tunas Bekasi Motor를 설립하여, 인도제 삼륜차인 바자이(Bajaj) 총대리점권을 취득한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더불어 도시가 개발되고 도로가 정비되기 시작하자 때마침 정부는 재래교통수단인 베짜를 오토바이로 대체하는 정책을 펼치게 된다. 에디 딴실의 자카르타 시내 뻐쩌농안(Pecenongan) 본사는 인도기술자와 바이어들 왕래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여세를 몰아 BCA 은행으로부터 2천5백만불 융자를 받아 일본 브랜드인 가와사키 오토바이 조립공장을 인수하는 한편, 자체 브랜드인 빈떠르(Binter) 라인을 구축하였다. 에디 딴실은 기존 일제 오토바이 브랜드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마켓구조를 파고들기 위한 묘책을 찾기에 골몰하였다. 그는 자신이 자전거 타이어 공장을 운영할 당시 부자재인 한국산 타이어 코드를 공급하며 사업적인 동반관계를 맺고 있던 한국인 B사장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종합상사 주재원으로 재직하며 잔뼈가 굵었으며 당시 30대 초반 나이에 독자적인 무역회사를 세워 동띠모르 군납을 포함한 무역업을 영위하던 업계의 총아였다. 아직 초보적인 인도네시아 무역업계에 전문 인력이 부족한 반면, 마침 한국에는 고도성장에 편승하여 종합상사에서 배출한 전문인력들이 가용할 시기였으니 이들을 영입하여 지역책임자로 맡겨 보라는 조언을 한다. 에디 딴실이 이를 즉각 수락하자 B사장의 추천에 의해 10여명의 한국인 전문인력이 속속 입국하여 자카르타 본사를 비롯하여 수라바야, 반둥, 메단, 사마린다, 반자르마신, 발리, 우중빤당 등지로 뻗어나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1980년대 말 수하르또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따라 외자도입이 러시를 이루며 재벌기업군이 형성되자 그들간에도 과도한 경쟁이 유발되어 정치적인 배경에 의해 서로 충돌하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었다. 에디 딴실 형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디 딴실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수도모 정치안보조정 장관과 대통령의 막내아들 또미를 등에 업고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지주회사인 Golden Key Group 명의로 1989년 6월 국영은행인 바삔도 은행(Bank BAPINDO) 신디케이트에 참여하도록 여타 국영은행에 압력을 넣어 5억6천5백만불이라는 거액을 유산스 신용장(Usance L/C) 형태로 대출을 받게 된다. 바로 메락지역에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기 위함이었다. 1억불 단위의 공장 7개소를 건설하는 대형 프로젝트로서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어야 하는 까닭에 이를 위해서는 권력층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성사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소리없이 팽창해가고 있는 에디 딴실 형제 그룹의 사업수완에 위협을 느낀 기존 재벌그룹들이 잠자코 있을리 없었다. 한때 중국본토에 대형 공장을 함께 투자하여 동업할 정도로 우호적이었던 살림그룹과의 관계도 사업이권이 상충하자 이들의 관계는 적대관계로 변모되고 있었다.
자신의 막내아들이 연루설이 불거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입장을 취한 수하르또 대통령의 결단으로 1994년 2월 부정대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에디 딴실은 결국 법정에서 20년형을 선고 받고 자카르타 근교 찌삐낭(Cipinang) 형무소에 수감된다. 2년여가 지난 1996년 5월 3일 에디 딴실은 교도소 감시원에게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자카르타 시내 하라빤병원(Rumah Sakit Harapan)에서의 검진을 요청한다. 외진을 허락받은 에디 딴실은 다음날 오후 철문을 나서게 된다. 사후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교도소를 나선 에디 딴실은 출구 앞에 세워둔 교도소 경비대장 차량에 올라 3키로 정도 달린 후 다른 차로 갈아타고 사라진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도소장은 에디 딴실의 미귀사실을 3일이 지난 5월 7 일이 되어서야 상급부서인 법무부 교도청장과 지청장에게 보고하였다.
이날 교도소를 방문한 우스만 법무장관은 교도소장을 즉석에서 면직시키고 차량을 제공해준 경비대장에게는 파면조치를 내렸으며 그 외 교도소 관련자 20여명이 경찰조사를 받았다. 에디 딴실 탈옥 후 3년이 지난 1999년 한 시민단체는 에디 딴실이 중국 복건성 푸 티안시(Pu Tian)에서 독일맥주 상표인 Becks Beer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2011년 9월 8일자로 중국정부에 에디 딴실에 대한 범죄자인도를 정식 요청하였지만 그가 소환되었다는 뉴스는 들려온 바 없다.
한편 권력개입의 중심에 섰던 수도모 제독은 2012년 86세로 사망하기 전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에디 딴실에게 대국적인 견지에서 권고하여 골든키그룹을 통해 메락지역에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하도록 밀어줬지만 결국은 그에게 이용만 당하고 배신당한 결과만 가져오게 되었다고 강변하였으나, 해외도피 중인 에디 딴실과의 내통설이 계속 유포되는 상황이었다.
1980년대 다수의 한인전문인력들이 인도네시아 국내유통망에까지 진출하여 노하우를 전수하며 우리 한국사회와 특별한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용단을 내려준 에디 딴실의 반전된 상황을 접하게 되면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의 그림자를 감지하게 된다. 석유생산국인 인도네시아의 석유화학공업은 충분히 금융권의 자금지원을 받을 수 있는 유망업종으로, 에디 딴실의 포부가 좌절된 후 또 다른 권력형 투자가 그 지역에 들어선 사실이 이를 증명해 준다. 그리고 탈옥 과정이 보여 주듯이 그가 유유히 걸어나간 점은 고의성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으니, 정치적인 부담을 느낀 권력상층부의 개입설이 흘러나온 이유이기도 하다. 표면상으로는, 현재 환산가치 10억불에 상당하는 당시 5억6천5백만불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연금은행(BTN)만 제외하고 대부분 국영은행들이 신디케이트로 동원되어 바삔도은행이 간사 은행이 되어 수도모 장관의 청탁공문 하나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던 당시 금융구조의 취약성은 바로 개발 독재의 부산물일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정경유착이 낳은 부작용일 수도 있다.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인도네시아 금융산업이 재정비되고 튼튼해지기를 국민들은 염원하였지만 10년 후에 밀어 닥친 IMF 외환위기는 금융산업을 비롯한 전 산업계를 초토화 시키며, 그제서야이 나라의 금융산업 구조도 근본적인 개혁국면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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