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유마스(Banyu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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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레알의 임대료를 받는 조건으로 끄두(Kedu) 000 점에 달합니다. 이 외에도 국 보급 보물들과 아름다운 끄리스 단검들 000명의 끄라톤 경비대 병사들이 일자리를 잃고 말았습니 다.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병사들을 등떠밀어 내모는 낯부끄러운 일까지도 모두 신두네고로 재 상의 일이었습니다. 강제 퇴역당한 병사들 상당수 가 자바섬 바깥 000짜짜(cacah)에 이르는 땅을 봉토로 떼어주었습니다. 이 지역은 빠꾸알라 만 봉국(Kadipaten Pakualaman)이 되어 현대까 지 이르게 되는데 노토꾸수모 왕자는 깐젱 구스티 빵에란 아디빠티 아리야 빠꾸 알람 1세(Kanjeng Gusti Pangeran Adipati Arya Paku Alam I) 000짜짜의 땅을 받았 습니다. 딴진싱은 꺼두(Kedu 1793-1803)와 족 자(1803-1813)의 화교집단 우두머리였는데 하 멍꾸부워노 2세를 폐위시키려는 영국군과 결탁해 미리 만들어놓은 대나무 사다리들을 공급해 끄라 톤의 벽을 타고 넘을 수 있도록 도왔던 것입니다. 이듬해인 1813년 그는 래플스에게서 깐젱 라덴 뚜먼궁 쓰짜디닝랏(Kanjeng Raden Tumenggung Secadiningrat)이란 귀족의 칭호를 받아 나 족자 술탄국(분홍색) 서남쪽의 빠꾸알라만(녹색) 출처 -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id/c/cf/ Peta_seri_DIY_AA_1945.png 30 I 한인뉴스 2024년 4월호 요꼬의 군수(Bupati Nayoko)가 되는데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딴진싱의 모습을 무스타하르 왕자 가 지독히 혐오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 이었습니다. 대관식에서 무스타하르 역시 번도로 아리오 디포 네로고 왕자(Bendara Pangeran Ario Diponegoro)라는 새로운 호칭을 받습니다. 후세가 길이 기억하게 되는 ‘디포네고로 왕자’라는 이름은 이때 매우 모욕적인 상황에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였습니다. 왕족들은 물론 귀 족들도 지위가 변할 때마다 호칭이 변했고 그 역 시 훗날 또 다른 호칭을 갖게 되지만 무엇보다도 ‘압둘 하미드’란 아랍식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 했던 그를 후세의 인도네시아인들은 ‘디포네고 로 왕자’라는 이름으로 선택적인 기억을 하게 됩 니다. (제2장 끝) 제3장 왕위를 포기하다 하멍꾸부워노 3세는 술탄이 된 후 아직도 뒤숭숭 한 왕궁의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매번 식사를 물 리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 건강문제를 노출시키며 국사에 대해 아무런 의욕 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기저에는 그가 어떤 의 지와 목적을 갖든지 영국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결코 성취할 수 없으리라는 절망감이 자리잡고 있 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 왕국에서 일어난 사건 들로 인한 충격과 이제 술탄으로서 왕국을 위하 기보다는 이민족들에게 휘둘려야만 한다는 현실 은 큰 중압감으로 다가왔고 정신적 부담을 견디 지 못한 그의 육체는 날로 쇄잔해 꼬챙이처럼 말 라갔습니다. “이럴 때 왕자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술 탄 전하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이번만은 궁전에 남아 아버지와 왕실을 지키겠다 고 마음먹은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왕가의 먼 친척이자 동부자바의 동쪽 끝 반유마스(Banyumas) 지역 군수 출신인 마스 뚜 멍궁 신두네고로(Mas Tumenggung Sindunegoro)입니다. 그는 시티힝길 대전에서 목이 날아 간 다누레죠 2세의 후임 재상으로 하멍꾸부워노 2세를 도와 정사를 돌보며 끄라톤의 경비병력을 강화하는 등 모든 일에 비범한 수완을 보였던 사 람입니다. 하지만 현저한 전력 차이로 처음부터 승패가 뻔했던 스뻬히 전투 초반에 바로 옆에 떨 어진 영국군 포격으로 큰 부상을 입고 며칠 간 사 경을 헤맨 끝에 결국 다리를 절게 되었죠. 끄라톤 이 함락되는 것을 맨정신으로 보았다면 당장 칼 을 입에 물고 자결했을 사람이었으니 당시 정신 을 잃고 있던 것이 어쩌면 다행이었는지도 모릅 니다. 사람들은 그를 다누레죠 3세 재상이라 불 렀습니다. “몸도 불편하신 재상께서 궂은 일을 모두 맡아주 시니 술탄 전하를 대신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신두네고로는 디포네고로의 대답에 헛헛한 웃음 을 웃었습니다. “선왕을 지키지 못한 신료들은 모두 죽어 마땅한 자들인데 부끄럽게 살아남은 제가 이런 일 하는 것이 뭐 대수겠습니까?” 재상이 하멍꾸부워노 2세와 같은 강경파임을 영 하멩꾸부워노 3세 한인뉴스 2024년 4월호 I 31 정말 곤혹스러운 부분은 족자 술탄국의 군대를 궁 전경호 정도만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었습니다. 끄라톤 경비대의 강력한 저항을 경험했 던 영국은 총독부가 용인하는 규모 이상의 군대 를 술탄이 가질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대신 영국 군과 세포이 부대로 궁전 경비대의 주축을 구성했 죠. 물론 그들은 경비대를 빙자했지만 그것은 왕 실 턱밑에 칼끝을 밀어넣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 니다. 그 과정에서 당초 왕궁경비를 담당했던 부 기스족 경비대 https://www.flickr.com/photos/agusyr/4215790206 수라카르타와 족자의 병사들 https://hiveminer.com/Tags/soldier%2Cyogyakarta 참 각 지방의 지방총독 보 좌관(부지사) 국가 군사적 역량을 키워오던 중 마침 말뚝 사건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자바 전쟁으 로 비화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디포네고 로 왕자가 드디어 숙청의 빌미가 될 미끼를 물었 다고 다누레조 재상과 네덜란드 총독부가 쾌재를 부르던 그 순간 정작 디포네고로 왕자 자신은 자 바땅을 되찾아 이슬람국가를 세우기 위해 그동안 준비한 모든 역량을 동원할 시기가 드디어 온 것 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4장 끝) 제5장 불타오르는 자바 “우리들의 전략적 목적은 이 땅에서 네덜란드인 들과 중국인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왕국을 우리 손 으로 되찾아 온전히 지배하는 것입니다.” 고아슬라롱에 마련된 본진 사령부 막사에서 망 꾸부미 왕자와 끼아이 모조를 비롯해 왕족 군사전략과 세 부 행동에 대한 기초를 완성했습니다. 하멍꾸부워 노 4세 입누자롯이 처참하게 유명을 달리한 후 세 살짜리 술탄이 즉위해 족자 술탄국이 실질적 지도 자 없이 표류할 때 지난 십 수년간 끄라톤에서의 활동을 통해 분명한 자리매김을 한 디포네고로 왕 자를 유일한 희망이자 진정한 지도자로 여긴 백성 들과 이슬람 지도자들 귀족 들로 구성된 지휘관들에게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 저항전쟁의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침략자인 네 덜란드뿐 아니라 오랜 기간 동인도에 뿌리를 내리 고 살아온 중국인(화교)까지 몰아내야 할 이민족 으로 규정한 것은 그들이 정부의 세금징수업무를 위임받아 위세를 부렸고 총독부나 네덜란드 개인 사업자들의 하수인으로서 자바 백성들 위에서 대 체로 군림하며 호가호의하고 있다는 이유가 컸습 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1812년 아버지 하멍꾸 부워노 3세의 두 번쨰 즉위식에서 영국군에게 협 조하여 끄라톤 함락에 일조한 공으로 뚜먼궁의 작 위를 하사받고 나요코(Nayoko)의 영주가 된 현 지 중국인 사회 우두머리 딴진싱(Tan Jin Sing) 이 희희낙락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결 과적으로 그는 하멍꾸부워노 2세를 폐위시켜 유 배보낸 공로자 중 한 명으로서 그 아들인 하멍꾸 부워노 3세에게 표창과 포상을 받은 것입니다. 디 포네고로 왕자는 그날 아버지의 얼굴에 나타났던 치욕적인 표정을 마치 조금 전에 벌어진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자 바땅의 중국인들은 딴진싱으로 대변되는 반역자 들이란 인상이 강했던 것입니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들 http://www.sekelumitpandang.com 28 I 한인뉴스 2024년 10월호 포네고로군에 합류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렇게 확보된 조직을 토대로 술탄국 전체를 몇 개의 전역(戰域)으로 나누고 각 지역사령관과 부 대장들 귀족들이 속속모여 들었던 것이죠. 뜨갈레조는 자바를 떠돌며 포교활동을 하 던 이슬람 학자들과의 부단한 서신교환을 통해 자 연스럽게 자바 전역과 연대하고 소통하는 네트워 크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소통을 통해 그는 자바 전역의 지역사회 를 분석하고 지지기반으로 삼았는데 군대를 구성 할 때에도 각 지역별 특성을 전투능력의 데이터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거든요. “마디운(Madiun) 사람들을 첫 번째 공세를 막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14 아내는 데에 훌륭한 능력은 발휘하지만 그 후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소. 빠장(Pajang) 사람들은 용 맹스럽기 그지없지만 역시 오래 버티기엔 능하지 않아요. 바글렌(Bagelen) 사람들은 자기 지역에 서 전투가 벌어질 경우 가장 요긴한 전력이 될 것 이요. 하지만 타 지역 전투에 투입된다면 쉽게 전 열이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데 마타람 사람들은 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오. 그들은 강고히 적과 맞설 수 있고 전투의 우선순위를 알 뿐 아니라 전 쟁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처참한 파국조차 초연히 견뎌낼 수 있소.” 뿐만 아니라 그는 은밀하게 정보망을 구축해 활 용했는데 이는 자바 전쟁을 수행하면서 적의 동향 을 파악하는 데에 오랫동안 큰 도움을 주었습니 다. 그는 네덜란드 지방총독과 부지사들은 물론 그들과 손잡은 끄라톤 왕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궁전뿐만 아니라 다누레조 재상 그로봉안(Grobongan) 지역을 네덜란드 에게 조차하는 계약은 물론 까노만 부대(Pasukan Kanoman) 등 을 창설했습니다. 이외에도 각각의 부대는 오스만 투르크 군편제에 따라 뚜르끼야(Turkiya) 끄디리 등은 망운느가라 군수(Bupati Mangunnegara)에게 위임되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의 군세는 족자 술탄국 끄땅궁 부대(Pasukan Ketanggung) 끄라톤 직할지인 아디 까르토(Adikarto) 지역을 영국의 총애를 입은 노 토꾸수모 왕자에게 이양한다는 증서 등을 만드는 한편 관련 지역의 영주들에게도 필요한 조치를 해 야 했습니다. 왕국에겐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어쨌 든 누군가 관련 행정처리를 매듭지어야 했습니다. 족자의 부기스 부대 복장 (오늘날 축제행진) https://www.flickr.com/photos/pra-yudi/12116870673 네덜란드 식민정부 관료들 및 그들 과 가까이 지내는 귀족들 뉴트로 부대(Pasukan Nyutro) 댕 부대(Pasukan Daeng) 뚜멍궁 다누꾸수마(Tumenggung Danukusuma)는 바글렌(Bagelen)지역을 뚜멍궁 수르요네고 로(Tumenggung Suryonegoro)와 뚜멍궁 수로 네고로(Tumenggung Suronegoro)는 족자 동 편을 뚜멍궁 신두레조(Tumenggung Sindurejo) 및 디포레조 왕자(Pangeran Diporejo)에게 뚜멍궁 쪼끄로네 고로(Tumenggung Cokronegoro)에게는 고데 안(Godean)의 방어를 맡았습니다. 또한 조요꾸 수모 왕자(Pangeran Joyokusumo-베이 왕자 (Pangeran Bei)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림)가 뚜멍궁 수라딜로고(Tumenggung Suradilogo) 의 도움을 받아 족자 북방을 마게탄 마디운 만둥 부대(Pasukan Mandung) 망꾸느 가라안 봉국 그리고 빠꾸알라만 봉국 군대를 모두 합친 것의 세 배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이제 디 포네고로 왕자는 본격적으로 네덜란드와 싸울 준 비를 갖춘 것입니다. 여기고 끄라톤 호위부대로서 만띠레조 부대(Pasukan Mantirejo) 몇몇 보좌관들도 임명하는 등 조직을 만 들어 갔습니다. “우리 군대는 족자 술탄국의 편제나 네덜란드군 의 모델을 따르지 않을 것이오. 우린 강성함을 세 상에 떨쳤던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 편제를 따를 것이오.” 16세기 오스만 투르크의 칼리파 부대 자니사 리(Janissari) 조직이 당시 디포네고로군에 적합 하다고 본 것은 이슬람의 기치를 세운 그에게 어 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3세 기 전 소아시아에 있던 한 국가의 군대편제를 꿰 고 있던 것에서 그의 학식의 깊이와 독서량을 가 늠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단장 급인 알리 파 샤(Ali Pasha)가 디포네고로 군에서는 알리바사 (Alibasah)로 몬쪼네고로(Monconegoro) 동부지역 등 술탄국 전역의 영주들과 수라카르타 수난국 경계 의 영주들에게도 전달했습니다. 그 명령서에는 그 들을 디포네고로군의 지휘관으로 삼는다는 임명 장도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이 인간은 자기가 술탄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들 중엔 아직 디포네고로 왕자와 일면식도 없 이 네덜란드와 이익을 공유하는 이들도 있었으므 로 이렇게 반응하며 거절한 영주들도 있었으나 상 당수의 영주들이 그 명령과 임명장을 수용하고 디 자바전쟁 삽화 한인뉴스 2024년 10월호 I 29 Anom) 무스타하르로서도 문화 바글 런(Bagelen) 발리 기병대를 비롯한 9 빠 찌란(Paciran)의 일부 빠장(Pajang) 지역은 머르톨로요 왕자(Pangeran Mertoloyo) 사실상 자바전쟁은 1813년 술탄 하멍꾸부워노 3세가 화병으로 사망할 때 태동하여 그로부터 10 년 후인 1823년 술탄 하멍꾸부워노 4세가 독살되 던 시기에 이미 불붙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뜨갈레조에서 스스로의 생각 을 정리해 사상과 정치 세랑(Serang) 수까 와티는 까르토느가라 군수에게 수라카르타 수난국 슬라롱을 방어하는 조요네고로 왕자(Pangeran Joyonegoro)와 수르요디닝랏 왕자(pangeran Suryodiningrat) 식민정부가 소유한 외곽 농장에 서 천덕꾸러기처럼 구박받으며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군대의 해산과 축소는 끄라톤뿐 아니 라 족자 술탄국 전역에서 네덜란드군의 감시 아래 진행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국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영국으로서도 족자 술 탄국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끄라톤이 제 기능을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그의 성향을 문제삼으며 신두네고로를 족자 술탄국의 재상으 로 인정할 수 없다는 공식입장을 세우고 있었지만 병상에서 일어난 그가 재상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 을 굳이 막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능함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영국이 끄라톤을 무릎 꿀린 후 족 자 술탄국 정치지형의 변화로 처리해야 할 행정업 무들이 산더미 같았는데 신두네고로는 그 일을 묵 묵히 감당해냈습니다. 우선 족자 술탄국이 형식적으로나마 매년 100 아니 라덴 마스 온또위료 역시 더욱 큰 상실감에 빠진채 대관식에 임하고 있 었습니다. 이틀 동안 끄라톤 궁전이 이민족들과 반 역자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는 동안 자신은 무력 까지 동원해 만류하는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꼼짝 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치 할아버지 하멍꾸부워노 2세를 폐위시키는 데에 공이라도 세 워 상을 받는 것처럼 아버지의 큰 아들로서 대관 식에 참석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대관식에 참석한 래플스 총독대행은 스뻐히 전 투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노토꾸수모 왕자에 게 그 포상으로 족자 술탄국의 서남부 아디까르 토(Adikarto) 군의 4 아디수르야 왕자(Pangeran Adisurya)와 수 모네고로 왕자(Pangeran Sumonegoro)는 꿀 론 쁘로고(Kulon Progo)를 아디위 노노 왕자(Pangeran Adiwinono)와 망운디뿌로 왕자(Pangeran Mangundipuro)는 꺼두(Kedu) 지역 일대를 아르 끼야(Arkiya) 같은 터키식 명칭이 붙었고 오스만 투르크 정예부대인 불키요(Bulkiyo)라는 명칭이 붙은 부대도 있었습니다. 한편 병사들에게는 총포를 비롯한 무기 일체와 함께 숲속 화약공장에서 직접 만든 탄약들도 지급 되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은 반군답지 않은 매우 훌륭한 병참 시스템을 갖춰 병사들의 무장상태가 우수했는데 그것은 오랜 기간의 사전준비를 반증 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적대 세력의 귀족들과 자신을 돕는 귀족들의 명단을 각 각 작성해 지휘관들에게 배포했는데 그 블랙리스 트와 화이트리스트를 통해 이제 누구와 손잡고 누 구를 상대로 싸워야 할지 분명해진 것입니다. 슬라롱에서 디포네고로는 지휘관급 왕족과 귀 족들에게 임무를 나누어주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의 아들 아놈 왕자(Pangeran Diponegoro 전투복을 입은 자바인(좌) 아부바까르 왕자(Pangeran Abu Bakar)와 뚜멍궁 자야 무스토포(Tumenggung Jaya Mustopo)는 로와노(Lowano) 지역 을 악기들이 수레에 산더미처럼 담겨 네덜란드 주지사 저택으 로 옮겨졌습니다. 영국군의 그런 야만적인 약탈행 위를 족자 술탄국의 왕가와 백성들은 감수할 수밖 에 없었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삐낭섬 (Pulau Pinang) – 당시 족자 술탄국의 귀족들 대부분은 삐낭섬이 어 디에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한인뉴스 2024년 4월호 I 29 족자 술탄 하멍꾸부워노 2세는 차기 술탄으로 마 음에 두었던 아들 망꾸디닝랏 왕자(Pangeran Mangkudiningrat) 여단장 급인 파샤(Pasha)는 바사 (Basah)로 불렸습니다. 한편 대대장급은 아가둘 라(Agadulah)를 본따 둘라(dulah)라 했고 중대 장은 세(Seh)라 칭했습니다. 디포네고로군은 족자 끄라톤 장악을 기정사실로 “그러기 위해선 단계적인 전술목표들을 수립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효과가 큰 목표는 왕국을 상징하는 족자 의 끄라톤 궁전을 탈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궁 경비대는 물론 네덜란드군이 철통같이 지키 는 그곳을 치려면 우선 지역적 반란을 일으켜 각 지역의 끄라톤 옹호세력들이 끄라톤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디포네 고로 왕자는 끄라톤을 고립시키고 유럽인들과 중 국인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꺼두(Kedu) 영국군 포위망을 넘나들었 던 머르타사나 왕자(Pangeran Mertasana)와 함 께 스마랑으로 압송되었다가 머나먼 말레이 반도 의 뻬낭섬(Pulau Penang)으로 유배되고 맙니다. 전투가 끝나고 며칠 후 또 다시 대관식이 열렸습 니다. 아디빠티 아놈로서도 영국군이 끄라톤 중심부를 압박해 오자 술탄 하 멍꾸부워노 2세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입관을 앞둔 시체처럼 온통 흰색 옷으 로 갈아입고 걸어나와 패배를 인정했고 왕과 왕 족들은 무기는 물론 걸치고 있던 귀금속과 패물 들을 영국군에게 압수당하는 치욕을 겪었습니다. 영국군은 끄라톤 궁전 안의 중요 문서들도 마구잡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7 이로 압수하여 영국으로 가져갔는데 이때 약탈당 한 문서들은 7 위르요꾸수모 왕자(Pangeran Wiryokusumo)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오지로 유배를 떠나 돌아올 기약 도 없게 되었고 스뻐히 전투 당시 영국군 포격에 어머니마저 잃고서 애도할 틈도 없이 이민족에게 등떠밀려 술탄이 되는 것은 견디기 힘든 모욕이기 도 했습니다. 끄라톤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사람 들 중 그가 얼굴이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 위에서 자신이 다시 하멍꾸부워노 3세가 되어 술탄의 왕좌에 오 르는 것은 그들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만 같았습니 다. 게다가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술탄이 되어야 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떠밀 려 술탄이 되면 영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될 것임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대관식 내내 얼굴에 웃음 한 점 띄우지 않았습니다. 라덴 마스 무스타하르 이슬람국가 건설에 대 해 반대입장에 있는 사람들 집안에 하인이나 마구 간지기 등을 포섭하거나 첩자를 들여보내 비밀리 에 정보를 수집했던 것입니다. 지난 호에 이어 한인뉴스 2024년 10월호 I 27 그가 하멍꾸부워노 4세의 죽음을 통지받기 전에 미리 알고 끄라톤으로 달려갔던 것도 그런 정보망 이 작동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성들을 동원해 1825년 중반까지 쌀을 대 량으로 구매해 군량미로 비축하기도 했으니 비밀 리에 전쟁을 대비한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의 아버지 하멍꾸부워노 3세가 1813년 승하한 이후 12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동안 디포네고로 왕자가 지역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며 용의주도하게 사회 적 자빤(Japan) 정말 가고 싶지 않은 대관식이었습니다. 두 번째 대관식을 갖게 되는 아디빠티 아놈으로서는 두 번 모두 자신의 아버지를 끌어내리고 그 빈 자리에 앉게 된 것이 결코 즐거울 리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 아버지와 믿음직스럽던 형제들은 모두 조요위노토 왕자(Pangeran Joyowinoto)에게는 족자 남쪽 방면을 맡 겼고요. 구눙 키둘(Gunung Kidul)은 싱오사리 왕자(Pangeran Singosari)와 와라꾸수모 왕자 (Pangeran Warakusumo)에게 줄여서 빠꾸알람 1세라는 봉건영주로 자리매김합 니다. 그의 이름 앞에 붙은 요란한 칭호들은 분명 왕보다 아랫단계였지만 사실상 그 자치구를 배타 적으로 통치하는 절대 영주가 된 것입니다. 중국인 우두머리 딴진싱(Tan Jin Sing)이란 자 도 영국군을 도운 공으로 1 지방총독( 주지사) 지방총독의 비서 지빵(Jipang) 하층 자바인 복장(우) https://m.kibla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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삥땅동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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