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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동집약산업에 이어 기술집약산업 등 제조업 투자 진출 1988~1992년 기간에 한국 기업의 대인도네시 아 투자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섬유 1970년 경남교역이 동부칼리만탄주 따라깐에 20 만 헥타르 1973년에는 한니흥업이 중부칼리만 탄주 라만다우 강 유역에 11.5만 헥타르 1975년 공장을 완공하고 이듬 해부터 조미료 중간제품(DGA)의 생산에 돌입했 으며 1976년 말에는 아주임업이 서부칼리만탄주 멀라위 강 유 역에 11.5만 헥타르의 천연림 개발에 착수하면서 한국기업에 의한 인도네시아 산림개발이 러시가 이루어졌다. 한국 기업들이 의해 개발한 임지에 서 생산한 원목은 대부분 한국 1978년 본격적으로 사탕수수를 발효한 조 미료(MSG) 생산을 시작했다. 1972~1985년 기간에는 자원확보형 투자 이 외에도 건설과 무역업의 진출이 주류를 이뤘다. 1972년 12월 삼환기업이 수마트라 횡단고속도로 공사계약을 인도네시아 정부와 체결했다. 1973 년 6월에는 대림산업이 가스압축플랜트 공사를 수주했으며 1980 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성화(Sung Hwa Dunia) 1980년 초 원목 수출금지 조치 이 후 기존의 한국계 원목개발 회사들 중 합판공장 을 소유한 코린도와 코데코 정도의 기업들만이 원 목개발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까 지 산림 분야 사업을 지속하고 있는 기업은 코린 도가 유일하다. 대한민국 1호 해외공장은 1973년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미원(현 대상 1980년대는 한국 1990년대 이후에는 인 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 중국이 전 세계 생산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1980년대 후 반기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따른 노동쟁의 증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인도네시아 정치·경 제와 사회적 혼란 상황에서 과거 경영관행에 익숙 했던 대부분 한국계 신발기업은 경영 악화에 직면 한다. 이에 인도네시아 신발 투자기업 1세대로 분 류될 수 있는 성화 2006 년에는 서부자바주 보고르 룸핀(Rumpin) 지역에 현대식 양묘장 조성사업을 시작했고 2007년 한-인니 산림포럼 구 성으로 양국의 산림협력은 한층 도약하게 되었다. 2005년 수마트라섬 북부를 휩쓴 쓰나미로 파괴 된 해안 맹그로브숲을 복원하기 위한 한국국제협 력단(KOICA)의 개발원조 사업을 선두로 2009년에 는 롬복 섬에 소규모 산림전용·황폐화 방지와 산 림탄소축적 증진활동(REDD+) 시범사업 등 기후 변화 대응역량 강화사업을 추진했다. 정부 간 산림협력사업과 조림투자 기업에 대한 지원 등을 위해 한국 산림청과 인도네시아 산림부 가 합의하여 2011년 인도네시아 산림부(현 환경 산림부) 내에 한-인니산림센터를 설치하고 이탄 지복원 200만 켤레 2차 제조업 3차 서비스 산업 4차 디지털 산업 등으로 단계별로 산업이 발전했지만 4차 산업이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에 살아도 언어와 문화 CJ 등과 같은 전 자와 바이오 산업이 진출해 수출뿐만 아니라 내수 시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1993년 이후 인도네시아의 최저임금 인상률이 급등하자 CJ 등과 같은 투자성공 사례를 낳는 기반 을 마련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 봉제와 신발 등 노동집약적 한국 기업이 동남아 국가를 투자 대상으로 주목한 이유 는 원화의 절상 JC케미칼 KMK LG 상사 PT Miwon Indonesia)이다. 인도네시아 진출 초기 미원의 과장급 한국인 영업 사원들은 경쟁이 치열한 대도시의 일본과 대만계 브랜드 아지노모도와 사사(Sasa)와의 경쟁을 피 해서 섬과 산간지역을 찾아다니며 미원을 판매했 다. 특히 무더위 속에서도 단정한 복장을 한 한국 인 중견사원들이 장터를 누비고 다닌 열정적인 모 습은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미원은 판매 영업부터 시작해 [특집] 한국-인도네시아 우정의 50년 여정 1 한국은 박정희 정부의 주도로 산업 구조 근대 화와 자립경제의 확립을 촉진한다는 기치 아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년) 을 시행한 데 이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 획’(1967~1971년)을 한창 진행할 때 “Namo Buddhaya” (불교 인사) “Om Swastiastu” (힌두교 인사) “Salam Kebajikan” (유교 인사)” 등 각 종교의 인사말을 2~3개 섞어서 대중연설을 시작한다. 비평가들은 “종교분쟁은 종교가 이유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2000년대 아체에서는 강성 이 슬람과 온건 이슬람 주민 간 충돌 “Shalom” (기 독교 인사) 가루다인다와 가습기도 가파른 원화 절상 및 임금 상승에 따른 제 조비용 상승으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악화하면서 국내 노동집약적 중소기업들이 해외진출을 모색 하게 됐고 각 종족을 대표하는 아나운 서 즉 외모가 다른 사람들이 표준 억양과 발음의 인도네시아어로 뉴스를 전했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들을 보면서 머리를 도끼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가 있다. 도끼로 머리를 맞으면 아프고 상처가 남지만 허물어진 경계를 넘는 새로운 생각의 촉수 도 생겨난다. 이를 통해 내 나날의 삶과 사고가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끝] 같은 해 12월에는 현대건설이 자카 르타와 남부 외곽 보고르(Bogor) 지역을 잇는 자 고라위(Jagorawi) 고속도로 건설계약을 체결했 다. 종합상사로 한남무역(1971년 쌍용그룹 인 수)이 1968년 진출하여 인도네시아에 시멘트를 수출하고 커피를 수입했다. 1973년 11월에는 한 일시멘트가 동부자바주 수라바야에 철근 생산 공 장인 한일자야(Hanil Jaya)를 설립했다. 197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한국 정부는 본격적인 원유 확보와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실로 1981년 5월에 코데코에너지 와 국영 석유회사 뻐르따미나(Pertamina) 간 서 부 마두라(Madura Barat) 유전공동개발 사업이 승인되었고 건설 등 한국 기업들이 이미 현지에 진출해 있었던 터라 인도네시아에 직접투자는 진출에 따른 초기 비용 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고대 중동 사막에서는 현대 한국과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체계 가 형성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들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무슬림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접 하는 이슬람과 무슬림은 서구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과 건설 노동자들이 경험한 아랍국가의 이슬 람이 대부분이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 골까르당과 연합개발당은 인물 중심의 여러 정당으로 갈라졌다. 한편 투쟁민주당은 수많은 성향의 집단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총 재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돈이 있어도 바나나를 마음껏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절대적인 공급 부족. 1990 년대 말 파푸아에서는 바나나가 귀했다. 파푸아는 토양이 척박하고 농사가 막 시작된 상황이어서 바나나와 파파야 같은 열대과일조차 귀했다. 도시처럼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바나나와 파파야 를 먹으려면 재배하거나 타지역에서 재배한 것을 사와야(유통) 한다는 것. 당시에 한국은 농사도 유통도 발달해서 어디서나 비용을 지불하면 사과와 배를 마음껏 살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교역하면 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국가가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이슬람교 신자 즉 무슬림 수가 가 장 많은 국가이지만 세속국가이다. 세속국가는 종교국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기존의 생각을 뒤흔들어 새로운 시각을 열 어주는 강력한 도구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후에 많은 작가와 문학 평론가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저명한 작가이자 평론가인 박웅현이 자신의 저서 『책은 도끼다』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내 입장에서 ‘책’을 ‘인도네시아’로 바꾸면 기존의 한국계 원목개발 회사들 가 운데 합판공장을 소유한 코린도와 코데코 정도의 기업들만이 원목개발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같이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국의 합판산업을 육 성 발전시킴에 따라 인도네시아의 합판 생산량과 수출량은 꾸준히 늘어나 마침내 1990년 중반에 한국 기타 이념과 종교 세력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 로 모은 민주당(PDI. 현 투쟁민주당 PDIP)로 나눴다. 52 I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그래서 이념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아닌 종교적으로 이슬람과 비이슬람(민족주의)으로 나뉘는 것.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고 개혁 시대에 접어들면서 기후변화 대응 난로도 필요없다. 대신 거의 모든 음식을 냉장 고에 보관해야 한다. 쌀을 상온에 두면 쌀벌레가 생기거나 곰팡이가 생긴다. 옷장에 제습제를 넣 “인도네시아는 도끼다”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I 51 어두어도 옷을 입을 때 눅눅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현지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샤워한다. 한국 에서는 피부가 건조해진다고 샤워를 자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렇게 하면 ‘땀 띠’와 ‘습진’ 같은 피부질환이 생길 수 있다. 나는 성경 속에 묘사된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들 이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국인투자법(1968) 노사분규 뉴발란스 대규모 무 역수지 적자를 겪으면서 경상수지 적자를 면치못 했다. 인도네시아는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가 증가 했지만 정확한 외채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 로 금융과 자본시장에 대한 관리감독이 소홀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자국의 통화가 고평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정책 당국은 조정을 주저했다. 결국 인도네시아는 외환위기를 맞으며 1997년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 구조조정계획 절차를 밟게 됐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동시에 발생한 외환위기 로 현지 한국계 기업들은 위기를 맞는다. 1997년 경제 위기와 1998년 이후 민주화 과정의 정치사 2. 제조업 중심의 한국기업 투자 급증: 발전기(1986~2002년)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53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회적 불안정은 한인 사회 존속을 일시적으로 위협 했다. 특히 1998년 5월 폭동 때는 5천여 명의 한 인들이 비상 탈출해야 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을 귀국시킨 뒤에도 많은 한국계 기업 의 임직원들이 현지에서 근무하면서 인도네시아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정상적으로 가동했다. 이때 부터 인도네시아 관리들이나 현지인들은 한국에 대해 어려울 때 도와준 진정한 친구라고 여긴다. 2) 25만명 고용을 창출한 한국 신발업체 신발산업 가운데 스포츠화의 경우 1970년대는 일본 대로를 벗어나면 저 소득국가의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자연환경이 다르면 생활방식이 바뀐다. 일 년 내내 덥고 습한 열대기후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여 름옷만 있으면 된다. 겨울옷도 대부분 국가는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한국도 세속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정치면에서 민주주의 국가이고 경제면에서는 자본주의국가이다. 종교국가는 아니지만 이슬람교를 포함해 개신교와 가톨릭 대상지로 동남아와 중국이 부상했다. 당시 한국과 대만의 신발제조업체들이 대거 동남 아와 중국 등지로 생산기지를 이전시킨 배경에는 나이키 도로에는 태평양전쟁 시기부터 1990년 최신 모 델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자동차 모델이 모두 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자바어 나 순다어 같은 종족어를 쓰고 공용어는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다. 당시에 저녁 6시 에는 모든 채널에서 국영방송국이 제작한 동일한 뉴스를 방송했는데 도손(Doson Indonesia) 도시 소비자 눈에는 농사도 유통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국가가 한국과 같은 단계로 발전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는 전국에 유선전화망이 설치되 기 전에 무선전화로 이동했다. 자기 집 전화번호를 가져보지 못하고 개개인이 핸드폰번호를 갖게 된 것이다. 인터넷도 유선망이 도시를 중심으로 깔리다가 이동통신으로 넘어갔고 독재자 수하르토 동 양(Dongyang Indonesia) 동조 동조(Dong Joe Indonesia) 땅그랑은 수도 권의 대표적인 한인 집중 거주지로 부상했고 리복 말레이시아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이 먹는 것은 허용했다. 2000년대 초반에 테러 사건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무슬림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테러의 피해자들이었다. 실제로 인도 네시아에 처음 이슬람을 전파한 사람들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아랍 무역상들로 미숙한 인력관리 등으로 현지 사회와 갈등을 빚었 다. 한편 인도네시아로 집중되던 노동집약적 중 소 규모 제조업 투자는 1992년 이후 중국과 베 트남이 신규 투자처로 부상하면서 한때 하락하기 도 했다. 1990년 초부터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점차 기술집약산업의 투자가 이루어진다. 도자기 생산 공장인 한국세라믹(한국도자기)과 피아노와 악기 제조회사인 삼익인도네시아(삼익악기)가 각각 설 립됐다. 이어 LG전자 민주투사 메가와티 봉제 불 교와 유교 브레베스 등지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조성하고 있 다. 2016년 이후 한국계 신발업체의 인도네시아 내 이전(반뜬주에서 중부 자바주 또는 수도권에 서 수방과 가룻 등 서부 자바주 외곽지역)이 가속 화돼 화승 산림 등 부문의 개발 계획 (중앙 최계월 회장) 60 I 한인뉴스 2024년 9월호 이 입안되기 시작했다. 당시 수하르토는 정권 수 립에 기여한 측근들에게 삼림사업권(HPH) 분배 했다. 자금과 기술력이 없던 그들은 외국의 자본 과 기술을 도입하여 산림을 개발하고자 각종 법규 정을 제정한다. 한국 기업들도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인도네시 아의 산림개발 산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궁 핍한 국가경제 상황에서 코데코가 1968년 2월 최 초로 한국 정부로부터 미화 300만 달러에 달하는 1차 해외투자 허가를 받아 남부칼리만탄주 바뚜 리찐 지역에 27만 헥타르의 임지를 단독투자 형 태로 확보해 개발에 착수하면서 인도네시아 삼림 개발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이어 1969년 인니 동화가 동부칼리만탄주 발릭파판에 12만 헥타르 산림개발 산림개발권 에 관한 법령(1970)을 순차적으로 제정했다. 이 무렵 한국은 제조업 육성에 필요한 원자재가 필 요했다. 1960년 후반부터 한국기업은 인도네시 아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국내 경제 개발에 필요 한 목재·원유·석탄·사탕수수 등 원자재 확보 에 나섰다. 1968년 코데코가 남부칼리만탄 지역 의 원목개발을 위해 진출했고 산림기 본법(1967) 산림바이오에너지 생 산 산림보호 산림을 이용한 생태관광과 환 경교육 산림조합중앙회는 서부자바주와 칼 리만탄에 속성수와 고무나무 조림사업을 진행하 고 있다. 무림P&P는 파푸아에서 펄프 생산용 조 림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산림협력에는 한국 정부 와 기관의 지원과 노력도 적지 않다. 1979년 한인니 임업위원회 개최를 계기로 조림투자 산불관리 산업정책을 총괄하는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새로운 해외 원목 수급지를 필요 로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삼 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전자 삼탄 선진국과의 통상마찰 등 국내외적 경영 여건의 나빠졌기 때문 이다. 당시 동남아 국가 가운데 인도네시아는 노 동력이 풍부하고 비교적 임금이 낮았을 뿐 아니 라 수출 촉진 등의 부문에서 제한적이지만 해 외투자가 시작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1965년 9월 30일 발발한 공산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 대통 령 대통령은 정치·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산업화 정책에 박 차를 가했다. 산업화의 발판으로 인도네시아 최 1962년 8월 수자르보 산림부장관 방문 대 자원인 광물과 원유 스타윈 스타윈 (Starwin Indonesia) 신 발회사 직원들의 소비는 땅그랑 지역경제에 활력 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중 국과 베트남이 새로운 생산기지로 부상하였고 신발 신흥목재 아디다스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의 빅바 이어들이자 브랜드 마케팅 기업들이 개발도상국 인 동남아와 중국 등지로 글로벌 밸류체인을 재편 했다. 인도네시아는 1990년 전후 한국의 중소자 본이 가장 선호한 투자대상국으로 아식스 등 글 로벌 브랜드 제품을 연간 1억3 암본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주민 간 유혈충돌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너무 달라서라지만 이슬람끼리도 온건과 강성으로 나뉘어 충돌 한다고?’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 언론 기사와 책을 찾아보고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니 선주민과 이주민 집단과의 충돌이라는 것. 표면에 드러난 것은 종교지만 실제로 교리 싸 움은 아니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거나 이주시킨 이슬람 또는 온건 이슬람 성 향 주민들과 원주민인 기독교 또는 강성 이슬람 성향 주민들이 정치와 경제적 이익을 두고 경쟁 하다가 충돌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모든 나라가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정당은 한국 기준으로 하면 보수 성향에 가깝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집권한 후 정당을 직능 대표자들로 구성한 집권당 골카르당 야자수 연구 협력 완구 등 노동집약산업을 중 심으로 인도네시아의 저임금 우리의 마음과 사고를 깨우고 원자재 확보 유림사리 등 총 7개 업체 가 있었지만 이 말은 책이 단순히 정보를 전 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는 한국기업의 해외투자와 인 도네시아 진출에 큰 교훈이 됐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신발산업 이 2005년 파크랜드(PT Parkland World Indonesia)의 풍원제화 인수를 계기로 현지 한국 신발제조업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 어 창신(Chang Shin Indonesia)과 태광(Taekwang Industrial Indonesia) 등 대규모 한국 신 발기업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신발업계가 제2의 도약기를 맞는다. 2004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집권 후 인도네시아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대외 여건이 변화하면서 제조업이 회복하기 시작했고 이들 종교 축일을 국가공휴일로 기념한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 은 “”Assalamu’alaikum warahmatullahi wabarakatuh” (이슬람인사) 이듬해 코린도(당 시 인니동화)도 동부칼리만탄 지역에 같은 업종 에 진출했다. 코데코와 코린도 진출 이후 원목개발이 러시를 이룰 때 이로써 본격적인 유전개발이 시작되 었다. 코데코에너지의 유전개발사업은 한국 최초 자원을 찾아 인도네시아로… 초창기(1968~1985년) 대한민국 최초 해외직접투자 ‘코데코’… 최초 해외공장 ‘미원’ 한인뉴스 2024년 9월호 I 59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의 해외석유개발 사업으로 이불도 이슬람 이슬람세력을 모은 연합개발당(PPP) 이제 오지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엑스가 운용하는 미국의 저궤도 우주인터넷 통신사업인 스타링크 도입 을 언급한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통신발달사에는 시티폰과 삐삐 시대가 없다. 철도와 도로가 전 국에 건설되지 못한 상태에서 항공편으로 군도의 섬들을 연결하고 있다. 한국은 농업과 광업 등 1차 산업 인 도네시아 신발업계가 어려움에 직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3년 이후 인도네시아 최저임금 인상율이 연간 10%를 상회함에 따라 인도네시아 에서 생산비 절감 효과가 낮아진 동시에 한국에서 더 가까운 중국과 베트남이 대안 생산기지로 부상 했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을 계기 로 중국의 생산원가가 급속도로 인상되면서 중국 54 I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에 진출했던 한국계 기업 중 일부는 한국으로 U턴하거나 인도네시아로 재이전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계 신발제조 투자기업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반뜬주 땅그랑을 중심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인 도네시아 전체 합판 생산량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코린도그룹 이외에도 한국 대기업들이 2000년대 이후 해외산림자원개발에 활발하게 투자하면서 팜오일 분야에 대상홀딩스 인도네 시아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9~1974 년)을 막 시작했다. 천연자원 부국인 인도네시아 는 자원 개발을 통한 국가 경제의 자립 기반 마련 이 시급한 시기였다. 이를 위해 인도네시아는 외 국인투자법(1967/Law No.1 of 1967) 인도네시아는 내가 한국에서 쌓은 생각의 경계를 부수는 도끼였다. 인도네시아에서 보고 듣고 경 험하면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고 그것에 대해 다시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새로운 생각의 촉수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는 도끼다”라는 문장은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처음 말한 것으로 알려진 “책은 도끼다”라는 말을 패러디했음을 먼저 밝힌다.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 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인도네시아에 투자한 한국기업은 경남교 역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계 신발제조업체로서 첫 투 자회사인 코린도그룹의 신발사업부 가루다인다와 (PT. Garuda Indawa 인력개발 분야까지 확 대 발전해왔으며 인재교류 사업 등 양국 협력 사 업을 확대하고 있다. 일명 이글)가 1980년 중 반기에 가동을 시작해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던 만 큼 해외투자에 경험이 없었던 한국 신발업체들은 가루다인다와의 선례를 공유할 수 있었다. 한국계 신발제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1985 년 가루다인다와가 첫 테이프를 끊은 이후 일반특혜관세제도(GSP) 수혜를 받고 있었던 만큼 한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의 투자가 몰렸다. 하지만 영세한 자본의 중소기업이 다수 진출하면 서 현지 언어와 문화의 이해 부족과 장시간 노동 일본 대만 등지로 수출되었고 임금 상승 자동차 등 기간산업 분야와 플랜트 건설 및 사회간 접자본시설 확충 부문에도 대거 참여했다. 다양한 산업의 진출과 더불어 현지 한국계 기업을 주로 겨 냥한 손해보험 서비스를 목적으로 1996년 삼성화 재(현지법인명 PT Asuransi Samsung Tugu)가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어 1997년 KB손해보험 (KB Insurance)과 1998년 메리츠화재(Meritz Korindo Insurance) 등이 각각 진출한다. 1990년대 들어 수출 호조로 인도네시아 경제는 내수도 증가하고 주식시장과 부동산 부문 모두 활 황을 보였다. 하지만 경기 과열에 따른 물가 상승 과 부동산 시장 등의 거품이 발생했고 자원개발 재인니 한국상공회의소(Kocham)와 재인니한인신발산 업협의회(KOFA)를 중심으로 다시 반등의 기회 를 마련했다. 최근 자바섬 내 최저임금 차별화의 이점과 조코 위도도 정부(2014~현재)의 국토 균 형 발전 정책에 부응하여 한국 신발기업은 중부자 바 주도 스마랑 주변의 즈빠라 지역과 살라띠가 저소득국가’ 등이었다. 하지만 1999년 7월 수카르노하타국제공항에서 자 카르타 시내로 이동하면서 본 도로를 호위하던 초고층빌딩들은 저소득국가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 말에는 한국에서도 초고층빌딩이 드물었다. 자카르타 시내 중심가에 는 최신형 벤츠부터 낡은 바자이와 목초를 실은 소달구지까지 함께 다녔고 조립금속 등 ‘중간기술 제조업’과 철강 종족과 인종이 다를 수 있다. 1990년대 말 한국은 한민족이 한국어를 하며 한반도에 사는 나라였다. 서울에서 외모가 다른 외국인을 보면 쳐다보던 시절이었 다. 인도네시아에 오니 인도네시아인이라고 하지만 종족이 다르면 외모도 언어도 달랐다. 심지어 자카르타에는 전세계에 모든 사람들이 오가고 종합상사 지하드 전사 짧은 기간 동 안 노동집약산업을 중심으로 ‘처음이자 집중적 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 후반 당시에 한국은 중국과 베트남과 수교 이전 시기였던 만큼 부산에 밀집되었던 신발 제조업체들이 이전을 고려한 국가는 태국과 인도 네시아였다. 앞서 인도네시아에는 1960년대 후 반부터 원목개발과 합판제조 창신 총 35 억 달러 매출액을 기록해 인도네시아 수출실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코리네시아 코리네시아(Korinesia) 금강제화 등이 대규모 생 산설비를 갖추고 주문자상표 생산방식(OEM)의 체제를 구축했다. 초창기 진출한 신발기업들은 동 양을 제외하고 모두 자카르타 외곽 땅그랑 지역에 공장을 세웠다. 1992년 한국이 중국과 베트남과 수교하면서 두 나라는 한국의 주요 투자지로 부상했다. 이를 계 기로 글로벌 신발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태광 등 대기업들이 이러한 대이동을 주도하고 있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내 한국계 신발업체는 노동집 약적인 산업에서 생산시스템을 자동화하는 장치 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2020년 현재 KOFA는 신발제조회사 20여개 회원사와 자재 및 임가공 회원사 180여개 등 총 200여개 회원사가 참여하고 있다. 회원사는 한국 인 근로자 2천여명과 현지인 근로자 25만여명을 고용해 나이키 태화 등이 2005년을 전후하여 폐업 절차를 밟는다. 인도네시아 진출 초창기 한국 신발기업들은 반 뜬주 땅그랑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식 대량생산 제 조라인 설비를 갖추고 OEM 방식의 유명 브랜드 주문을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직접 경영방식을 채택한 우리 신발기업은 해외투자 경 험이 없었고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노 동자와 갈등과 마찰을 빚어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고 태화(Tae Hwa Indonesia) 테러리스트... 돼지고기를 안 먹 는 것은 맞았지만 투자보장협정(1991년 2월) 등 을 통한 체계적인 제도 구축에도 힘입은 바 크다. 1990년대 초반에 기술집약산업인 전자산업과 바 이오산업의 진출이 시작되어 오늘날 LG전자 파크랜드 포스코대우 등이 진출하였다. 한 국임업진흥원은 중부자바주 스마랑에서 바이오매 스 시범조림 풍부한 자원 및 적 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에 힘입어 한국기업 의 현지 투자가 급증했다. 이는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11월) 프라타마 프라타마(Pratama Abadi Industri) 필리핀 등 경쟁국가들을 순차 적으로 따돌리고 합판수출 1위의 자리에 올랐다. 조림산업과 산림 협력 2019년 기준 코린도그룹 합판사업부에서는 지속 가능한 인공림 경영을 통해 생산된 양질의 원목으 로 연간 50만 입방미터의 합판을 생산하고 있다. 이 중 98%를 세계 시장에 수출하는 글로벌 합판 메이 커로 성장하여 한 해 수출실적 3억5천만 달러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와 비교하면 거리가 멀지만 보다 풍부한 산림자원 을 보유한 인도네시아가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 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원목개발업체들은 단순히 수 입선을 돌리는 것을 넘어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정 부나 기업이 직접 산림을 개발하는 직접투자 방식 을 선택했다. 동남아시아의 원목 수출국들을 중심 으로 산림 부문에서 자원민족주의가 태동하던 시 기인 만큼 해외기업이 생산한 원목을 단순 수입 하는 것보다는 우리 기업이 직접 개발하는 것이 원료의 안정적인 공급에 더 효율적이라는 목재산 업계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서 한국 정부는 1968년 외국환 관리규정에 ‘대 외투자’라는 장을 신설했으며 한국과 너무 나 다른 나라인 인도네시아로의 이주는 지리적인 국경을 넘어서 나의 사고의 틀을 깨고 생활 방 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가야 한다고 들었을 때 떠오른 단어는 ‘열대 한국기업이 막대한 자 본과 기술이 요구되는 석유개발 사업을 해외에서 참여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키데코(Kideco)는 1982년 삼탄이 인도네시아에 합작으로 설립한 유연탄 채굴 및 판매 회사다. 동 부칼리만탄주 빠시르 광산 채굴권을 보유하고 이 곳에서 생산하는 유연탄을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 판매했다. 최근 삼탄은 인도네시 아 현지 합작법인 키데코 보유 지분 49% 가운 데 40%를 2대 주주인 인디카에너지(Indika Energy)에 넘겼다. 산림개발에서 지속 가능한 그린 비즈니스로 한국기업 해외진출사 첫 페이지를 장식한 코데 코와 코린도는 한국의 해외 투자 역사 이상의 의 미를 지닌다. 한국기업의 인도네시아 산림 부문 진출은 기존의 원목 수입 방식에서 벗어나 인도 네시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여 직접 개발을 수행 하는 해외직접투자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현지에 서 한국의 목재산업은 1960년대 말 진출해 원목 개발을 시작으로 합판제조 등 1차 가공 방식의 산 업 유형에서 최근에는 조림과 팜오일 등 지속가능 한 친환경 녹색기업으로 변신했다. 산업화가 태동하던 1960년대 한국 합판산업은 대부분이 동남아시아에서 열대 나왕목을 수입해 가공했다. 그런데 당시 가장 최대 원목 생산 국가 인 필리핀과 말레이시아가 1970년 초부터 원목 수출 금지를 단행하자 한국은 안정된 원자재 공급을 발판으 로 1970년대 세계 합판산업의 선두 국가의 지위 에 오를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1980년부터 원목 수출을 단 계적으로 제한하고 가공품을 수출하도록 규제했 다. 1985년 원목 수출을 전면 금지하자 한인흥업 합판공 장을 짓지 못했던 원목개발업체는 도산하거나 다 른 업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원목 수출금 지 조치 이후 해외산림자원확보 해외투자 자본의 성격도 좀더 자본집약 적 산업으로 전환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석유 화학 힌두교를 인정하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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삥땅동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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