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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인뉴스는 2023년 9월 한국-인 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인도네시아 어판으로 발간한 책 “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 은”(“Merajut Persahabatan dan Memupuk Kepercayaan”)의 한글 원본을 12회에 걸쳐 연 재합니다. 제1장 한국-인도네시아 외교 50년 2. 초창기(1973~1988년): 외교관계 수립부터 전 두환 정부까지 1) 협력과 신뢰의 토대 마련 1973년 9월 18일 1959년 6월 인도네시아북한 친선협회 구성 1960년 6월 인도네시아 언 론인 북한 방문 1960년대 초 경제적 차원에서 한국 기업의 주도로 양국 고위인사 간 접촉이 이 루어지게 된다. 당시 산림개발을 위해 인도네시아 진출했던 ㈜한국남방개발(현 KODECO) 최계월 회장은 한국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1962년 1월 수 카르노 대통령을 예방하였으며 1961년 6월 주인도네시아 북한 총영사관 개설 1961년 미국에 서 특수전 교육을 받은 후 줄곧 특전사 장교로 최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수카르노 정권 당시 인 1958년 수마트라와 술라웨시에서 일어난 ‘ 인도네시아공화국 혁명정부(PRRI)’ 반란 사건 1961년 이리 안자야(현 서부파푸아) 머라우께 지역 군사작전 지휘 1962년 2월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과 수카르노 대 통령 간 만남을 주선했다. 한편 1964년 한국 정부 인사로는 최초로 산림조 사단(단장 심종섭)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최 계월 회장과 함께 수카르노 대통령을 예방하였다. 1964년 인도네시아 여당 수비안또 간사장과 수 카르노 대통령 양녀 사디킨 여사가 산림협회 협의 차 방한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 정변(9.30사태/G30S)으로 인도네시아공산당(PKI: Partai Komunis Indonesia)이 붕괴되고 친미·반공 노선의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 북한 간의 친선관 계가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개선의 환경이 조성됐다. 인도네시아 국가승인 이후 17년만인 1966년 12 월 한국 정부는 당시 주태국 이창희 공사(후에 인 도네시아 초대 총영사로 발령)를 자카르타에 파 견하여 한-인니 양국 간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하 고 자카르타에 총영사관을 개설하였다.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62 I 한인뉴스 2024년 1월호 1966년 당시 한국 정부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북 한이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있는 국가와는 외교관 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고 있 는 만큼 북한 공관이 이미 상주하고 있던 자카르 타에 한국 총영사관을 개설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 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의 대동남아 외교 공세 강화로 북한이 위축되어 있고 1962년 3월에도 한국 경제사절단 입 국을 거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1961년 북한-인도네시아 영사관계수립과 1964년 대사 급 외교관계 수립 등 북한과의 관계가 빠르게 진 전됨에 따라 인도네시아 측이 남한과의 관계 구축 에 부담을 느낀 조치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문화·스포츠 차원에서는 일부 교류가 이루어졌다. 1962년 4월 이상백과 월터 정이 아 시아올림픽 상임위원회 참석을 위해 인도네시아 를 방문하였는데 1964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정상 간 교류에서는 1964년 수카르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데 이어 1965년 4월 김일성 주석 의 인도네시아 답방이 이루어졌다(김정일 동행). 북한과 비교해 남한은 1981년 6월 전두환 대통령 의 인도네시아 방문과 1982년 수하르토 대통령 의 방한이 정상 간 첫 교류였다 1964년 수카르노 대통령 방북 시 김일성 주석은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맞서 압박을 받은 민족 들의 공동전선을 형성할 필요성에 관한 공동성명 을 발표하였다. 1965년 김일성 주석의 인도네시 아 방문은 그의 첫 번째 비공산국가 방문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북한이 인도네시아와의 외교관계 개 선에 두었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가 비동맹운동 창설의 기초가 되었던 1955년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 또는 Asian-African Conference 1964년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 1965년 공산당 쿠데타 9.30정변 등. 수하르토 정권에서 1974년 다나카 일본 수상의 인도네시아 방문 시 발생한 반일 폭력시위인 말 라리(Malari)사태 1965년 인도 네시아 정변 사태로 북한의 활동이 극히 위축된 상태에 있어 한국 총영사관 개설이 적절할 것으 로 판단했다. 인도네시아는 2년 뒤인 1968년 서울에 총영사관 을 개설하고 수깜또 사이디만(Soekamto Sayidiman)을 초대 총영사로 파견하였다. 제2대 총 영사는 베니 무르다니(Leonardus Benny Moerdani)로 현지 한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 며 1973년 8월에는 바사라 (Basarah) 인도네시아 공군참모총장이 답방했 다. 양국 군 고위급 인사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 라 1974년에는 무관이 주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파견되었다. 1977년 11월 30일에는 최각규 농수산부 장관과 사르워 에디 위보워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가 양국 정부를 대표하여 쌀 대여 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는 같은 해 10월 인도네시아 정부가 쌀을 지원하 여 줄 것을 한국 정부에 긴급히 요청하였기 때문이 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심각한 자연재해로 식량이 부족하여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한국 정부는 인도네시아의 식량부족 해소를 위해 쌀 7만 톤을 대여하기로 신속히 결정하였고 1973년 양국 관계가 대사급을 격상하면서 대 리대사로 근무했다. ★ 지한파 베니 무르다니 장군… 인도네시아 현대 사의 주역 인도네시아가 독립 이후 격변기를 겪을 때마다 주 역으로 등장하는 베니 무르다니(1932~2004년) 장군은 한국과 매우 인연이 깊은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1932년 중부자바 지역에서 태어난 베니 무르다 니는 1956년 육군 소위로 임관 1975년 동티모르 사태 1981 년 가루다항공 납치 사건 1984년 딴중쁘리옥 이 슬람사원 사태 등의 진압을 지휘한 주인공이다. 베니 무르다니는 1971년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 2대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한국 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3년여 동안 한국에 머물 면서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한국인과 친근하 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양국 관계가 대사급을 격상하면서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리대 사로 근무했다. 1974년 1월에 본국으로 귀임해서는 국방부 정보 국장 1985년 6월 에는 인도네시아 민속예술단의 서울공연이 있었 고 2021년부터 총 6기를 운영한 비파는 매 회 참여자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주한인도네 시아대사관의 아말리아 교육관은 ‘비파 코리아’에 대한 한국인들의 호응 덕분에 인도네 시아기록박물관(MURI)이 수여하는 상도 받았다고 전했다. ‘비파 코리아’는 온라인 수업을 통해 거주지역에 상관없이 참여할 수 있어서 한국과 인 도네시아에 있는 한국인들이 동시에 수강한다. 또 일정이 맞으면 주한인도네시아대사관 에서 열리는 오프라인수업에도 참여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어 말하기 대회인 비파 롬바 (BIPA Lomba)는 인도네시아 시 낭송 2024년 상반기에 진행된 제6기 비파 참여자는 932명이 며 Pembela Tanah Air)에 자원하면서 군인으로 성장한다. 1965년 공산당이 주도한 쿠데타인 9·30사태 (G30S)를 당시 수하르토와 함께 진압하면서 수 하르토 정권의 1등 공신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르 기도 했으나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시립무용단이 자카르 타를 방문하여 부채춤과 살풀이 공연을 선보였다. 최근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지방자치단체와의 결연 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서울-자카르타 이외에도 발리주-제주특별자치도 같은 해 12월에 첫 선적이 이루어졌다. 쌀을 수입하던 한국이 외국으로 쌀을 대여한 것은 건국 이래 처 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새마을운동으로 한국의 영 농기술이 획기적으로 혁신되었고 거버넌스 경남기업 등 한국 기업의 진출이 활발하였다. 동 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한 자카르타 한국학교도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1973년 9월 18일 관 광 관광지 홍보 교육 교육 등의 수단을 통해 국가의 매력을 증 대시키고 타국의 마음을 얻는 능력을 말한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 문화 와 정체성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인도네시아는 다양한 공공외교 프로그램을 통 해 인도네시아어의 국제화를 도모하고 있으며 국방부 장관 등 핵심 요직을 맡았다. 수하르토 정부의 군부 실세였던 베니 장 군은 인도네시아 한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한국 기업을 후원했으며 국제 관계 등 55개 지 표를 통해 193개 국가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평가한다. 맺는 말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탄생한 신생독립국 인도네시아는 독립 100주년이 되는 2045년에 세계 5위 경제대국을 꿈꾸고 이를 향해 달리고 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2045년까지 “황금 인도네시아”(Indonesia Mas)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글로벌 무 대에서 인도네시아의 리더십과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것. 그리고 인도네시아어를 통한 소프트 파워 전략은 인도네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비파 코리아’와 같은 교육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인도네시아어와 인도네시아 문화를 확산시키고 그리고 양국 간 교류 촉진이라고 설명했다. 주한인도네시아대사관에 따르면 남북한 유엔 가입의 조속한 실현을 위한 지원을 약속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태평양지역 내 개발도상국 간 협 력 증진의 표시로 한국 정부가 인도네시아 내에 직업훈련센터를 설립하는데 협력할 의향이 있음 을 표명했으며 노래 노래 부르기 당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체육 장관 말라디(Maladi)와의 면담에서 수카르노 대 통령에게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건의하겠다 는 약속을 받아낸다. 1962년 5월에는 한국축구 단이 방문하여 친선경기가 열렸다. 북한-인도네시아 관계가 진전되는 상황 하에서 남한 정부 고위인사의 인도네시아 방문이 이루어 지지는 못했으나 대림산업 독일(3위) 동 부자바주-경상남도 등 2022년 현재 28개 지자체 가 자매(우호) 결연을 맺고 있으며 말레 이시아 매년 지방자치단 체 간의 경제. 문화 교류가 확대되는 추세이다. ★ 사르워 에디 초대 주한 대사… 사위 유도요노 대통령과 아니 여사 1974년 4월 18일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 Wobowo) 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가 임 명돼 4년간 근무한다. 중부자바주 뿌르워레조에 서 태어난 사르워 에디 대사(1925~1989)는 네 덜란드 강점기에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인도네시아를 침략한 일본군이 설립한 조국의용 대(PETA 문화 문화 및 미디어 홍보를 포함하여 올해 인도네시아 공공외교 프로그램을 구체적으 로 소개했다. 또한 올해 상반기에는 외국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비파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인도네시아 소프트 파워 순위 글로벌 컨설팅업체 브랜드파이낸스(Brand Finance)의 2023년 소프트파워 평가에서 인 도네시아는 45위를 했다. 인도네시아 소프트 파워 지수는 2022년에 34.8에서 2023년에 40.9로 상승했다. 2023년 소프트파워 순위에서 미국(1위) 바틱 등을 배우는 문 화강좌도 운영한다. 인도네시아 소프트 파워와 ‘비파 코리아’ 한인뉴스 2024년 6월호 I 47 공공외교와 문화 외교 인도네시아의 공공외교 전략은 예술 박정희 대통령이 오피스빌딩과 아파트 등 개발 초기 단계에 있었던 여의도에 공관용 부지를 분양해주어 지금은 엄청난 자산가치를 지니고 있 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르워 에디 대사를 청와대 로 불러 친분을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르워 에디 대사의 7남매 가운데 셋째 딸인 크 리스티 아니(Kristiani Herawati) 여사는 한국에 사는 동안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익힌 지한 파로 알려져 있다. 사르워 에디 대사가 한국에 근 무하던 시기에 아니 여사는 당시 군인이었던 수 실로 밤방 유도요노와 결혼했다. 인도네시아 최 초 직선제로 유도요노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한국 과 인도네시아 관계는 정치와 경제는 물론 방위산 업에 이르기까지 양국 협력이 더할 나위 없이 가 까웠다. 2019년 별세한 아니 여사는 1973년 자카르타 소 재 인도네시아기독교대학교(UKI) 의과대학에 입 학했으나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아버지가 근 무한 한국에서 생활했다. 이후 1998년 인도네시 아 개방대학교(Universitas Terbuka) 정치학과 를 졸업했다. 아니 여사가 부모와 함께 서울 생활 을 할 당시 유도요노 전 대통령이 아니 여사를 만 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등 결혼 전 연애 이야 기도 큰 화제가 됐다. 두 사람은 1976년 결혼해 두 자녀를 뒀다. 장남 아구스 하리무르띠 유도요 노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해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북한은 불참)를 주 도하면서부터 북한은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중요 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인도네시아 우정의 50년 여정 1964년 인니여당 간사장 수비안또와 수카르노대통령양녀 사디킨여사 박정희대통령 예방 한인뉴스 2024년 1월호 I 61 1956년 김일성 주석은 반둥회의에서 채택된 원 칙들을 언급하면서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관 계 유지의 중요성과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 관계의 시작… 총영사관 개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북한과 인도네 시아 관계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적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발전은 속도를 내 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 양국 간 고위급 인사 교류가 처음으로 이루어 지는 등 양국 간 관계개선이 시작되었다. 1962년 7월 6일 한국 외무부 문서에는 1960년 6월 인도네시아 측은 한국 친선사절단 방문을 거 부하였으며 비즈니스 수라바야-부산광역시 수하르토의 사위인 쁘라보워 수비안또와의 경 쟁과 수하르토 정권과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신한기공 싱가포르 악기 양국 대통령은 민간 부문 합작사 업의 증진을 장려하기로 했다. 4) 한국과 인도네시아 지방자치단체 자매결연 1984년 7월 25일 염보현 서울시장이 자카르타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54 I 한인뉴스 2024년 2월호 를 방문 수쁘랍또(Suprapto) 자카르타 주지사와 자매결연 조인식을 개최했다. 이는 양국 지방정부 간 최초의 자매결연이다. 이에 따라 양국 정부는 각 각 김좌겸 총영사와 베니 무르다니 총영사를 대 사대리로 임명하고 이를 통보하였다. 1973년 10 월 23일 한국 정부는 김좌겸 주자카르타 총영사 를 초대 인도네시아 대사로 발령했다. 인도네시아 는 1974년 4월 18일 초대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 에 사르워 에디 위보워(Sarwo Edhie Wibowo) 를 임명했다. 2) 초창기 군사 관계 및 인도네시아에 쌀 대여 한국과 인도네시아 군사 관계는 1970년대 초 군 고위급 인사의 상호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 10월 인도네시아 안보·질서회복사령관 빵가베안 한국-인도네시아 우정의 50년 여정 (2) 1974년5월14일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사르워 에디 위보워 주한대사로부터 신임장을 제정 받았다. [한-인도네시아외교40년사] 한인뉴스 2024년 2월호 I 53 (Panggabean) 장군 일행이 심흥선 합참의장의 초청으로 방한하여 군사회담을 가졌다. 1972년 1월에는 인도네시아군의 초청으로 서종철 육군참 모총장 일행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였다. 1973년 5월에는 옥만호 공군참모총장이 인도 네시아를 방문하였고 양국의 협력과 신뢰 관계를 재확인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동안 한국 기업의 진출도 활발히 이루어 졌다. 초창기 산림개발 업체들의 뒤를 이어 미원 연이은 풍작으 로 주곡인 쌀이 자급선을 넘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3) 한국 대통령의 최초 인니 방문과 인니 대통령의 최초 방한 1980년대 한국 정부는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교 다변화를 적극 추진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1981년 6월 25일부 터 7월 9일까지 아세안 5개국(인도네시아 영국(2위)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른 국가 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국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인도네시아 외교부 는 올해 초 외국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외교 모임을 개최해 인도네시아의 창조 경제 요리 유도요노 전 대통령은 사 르워노 장군이 주한 대사로 재직할 당시 예비 사 위였던 자신에게 “한국 국민의 역동성과 자립 의 지에 감동을 받았다. ‘한국을 닮아라.’”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다음 호에 계속) 음악 이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는 최초의 한 국 방문으로 이는 한국 국가원수로는 최초의 방문이었다. 전두환 대통령과 수하르토 대통령은 정상회담 후 공동성명에서 동북아와 동남아의 평화와 안전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나아가 전 세계의 평 화 및 안정의 유지를 위해 필요 불가결하다는 점 에 견해를 같이하고 이런 바탕 에서 무역과 투자 등 경제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 가기로 했다. 1982년 10월 16일 수하르토 대통령이 전두환 대 통령의 초청으로 나흘 일정으로 공식 방한했다. 수하르토 대통령의 방한은 인도네시아 대통령으 로서는 최초의 한국 방문이었다. 또한 수하르토 대통령의 방한은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아세 안 5개국 순방 이후 아세안 지도자로서 최초의 답 방이었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 달성 을 위한 한국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남북 간 의 직접회담을 지지한다고 밝혔고 이를 통해 국가의 이미지를 향상시키고 다 른 국가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최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인도네시아어 교육 프로그램인 비파(BIPA: 외 국인을 위한 인도네시아어 교육과정) 운영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탈리아(9위) 등 G7 국가 전체가 톱10에 포진해 G7 의 글로벌 영향력을 드러냈다. 글로벌 소프트 파워 지수는 전 세계 17만 명 이상의 개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인 도네시아 노래를 부르며 인도네시아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인도네시아 노래 인도네시아 맛집을 찾아다니는 한국인들. 한국과 인도네시아 교 류가 증가하고 인도네시아의 글로벌 위상이 상승하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관심과 호감 도 늘고 있다. 한편으로 인도네시아 정부는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소프트 파워 전략의 일환으로 인도네시아어와 인도네시아 문화를 알리는데 적극 나서고 있다. 소프트 파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사용하지 않고 인도네시아 문화 소개 인도네시아 바틱 옷을 입고 인도네시아 시낭송 인도네시아 여행지 소개와 대사관 관계자들의 앙끌롱연주 (5월25일 주한인도네시아대사관) 인도네시아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이 제의한 남북 최고책임자 회담과 한국 정 부의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입장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양국 대통령은 두 나라가 경제적으로 상호보완관 계에 있으며 그러한 보완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이 서로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인도네시아가 세계 무대에서 더 욱 강력한 소프트 파워를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끝] <Bipa Korea lomba> 인도네시아 동화 구연 인도네시아군사관학교(Akademi TNI) 교장과 지역사령관을 역임한 후 전역한다. 사르워 장군은 사관학교장 당시 수실로 밤방 유도 요노 후보생을 수석 졸업으로 배출한 이후 인도네시아대사관과 인도 네시아 교육문화부가 주최하는 바파 코리아(BIPA KOREA)도 그 중 하나이다. 인도네시 아 교육부의 디딕 교육관은 비파의 운영 목적이 인도네시아어의 국제화 증진 인도네시아어를 매개로 한 상호 이해와 협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 고 있다. 또한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 협력을 촉진하면서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고 일본 (4위) 전래동화 구연 등 부문 으로 나뉘어서 언어와 관련된 인도네시아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주한인도네시아 대사관은 인도네시아어 교육과 더불어 인도네시아 음식 정상 간 교류 등 관계 개선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북한-인도네시아 간에는 1958년 8월 주인도네 시아 북한 무역대표부가 개설되었고 인도네시아 예술사절단 북한 방문 제1장 한국-인도네시아 외교 50년 (편집자주) 한인뉴스는 2023년 9월 한국-인 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인도네시아 어판으로 발간한 책 “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 은”(“Merajut Persahabatan dan Memupuk Kepercayaan”)의 한글 원본을 12회에 걸쳐 연 재합니다. 1. 태동기(1949~1972년): 인도네시아 국가 승 인부터 외교 관계 수립 전까지 1) 남한과 북한과의 외교전… 초반의 열세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에 따라 외국의 국 가 승인 및 자유우방과의 우호관계 증진에 1차적 목표를 두고 아시아 신생독립국과의 관계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외교 정책에 따라 한 국 정부는 1949년 12월 30일 신생독립국 인도네 시아의 국가를 승인을 하였다. 동서냉전기인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비공산권 및 제3세계에 대한 외교공세를 펼친다. 특히 비동맹운동 창설의 중심적 역할을 한 인도네시아와의 우호관계 구축에 매우 적극적 으로 나서게 된다. 이에 따라 북한-인도네시아 간 에는 외교관계 수립 주한 인도네시아 대사로 발령을 받는다. 주한 인도네시아대사관은 당초 서울 이태원에 있 었는데 차남 에디 바스꼬로 유도요노 역시 정치 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과의 인연에 대해 캐나다(7위) 태국 통합군사령관 프랑스(6위) 필리핀)을 공식 방문하였 다. 아세안의 첫 방문지는 인도네시아였고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식 수 교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압도하고 한국 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적극적 외교의 구체적인 사례로 평가되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국가 가운데 남·북한이 대사관을 한 곳에 개설한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당시 비동맹 중립국 진영 에서 중심 역할을 하고 있던 인도네시아와의 정식 수교는 한국 정부가 비동맹 중립국과 관계를 개선 하고 이들의 지지를 획득하는데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었다. 1981년 6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전두 환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양국 관계 발 전과 경제협력 방안을 폭넓게 논의하였다. 이듬해 1982년 10월에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답방이 있 었는데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총영사 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됨에 따라 한일시멘트 등 제조업체들이 진출했다. 건설 분야 에서도 삼환기업 현대건설 현지 한인들과 교분관계가 두 터웠다. 한국의 탄약과 전투복 등 방산제품 수입 과 한국의 마두라 유전 개발 참여에 큰 역할을 하 는 등 양국 군사 및 경제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수하르토 정부의 실력자이자 2인자였던 베니 장 군은 1993년 수하르토 대통령의 6선 연임을 앞두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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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및 다이어트 다이어트를 성공적으로 지속하려면 체중 조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안정도 중요합니다. 스트레스는 다이어트의 적으로, 과도한 스트레스는 폭식이나 불균형한 식습관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식이요법과 운동 계획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브랜드 읽어주는 여자스트레스 관리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핵심입니다. 꾸준한 습관 형성으로 건강과 체중을 동시에 관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https://joo-da.tistory.com/임플란트 임플란트는 치아 손실 후 가장 효과적인 대체 수단으로 널리 사용됩니다. 이 시술은 치조골에 인공 치근을 심고, 그 위에 크라운을 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치과에서의 정밀한 검사가 필수적이며, 치아 읽어주는 남자 치아 상태에 따라 맞춤형 계획이 세워집니다. 임플란트의 주요 장점은 내구성과 자연스러운 외관이지만, 시술 후 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정기적인 치과 방문과 구강 위생 관리로 임플란트의 수명을 오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https://dentalnam.com/고객센터 고객센터는 고객과 기업 간의 중요한 소통 창구입니다. 고객이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해 궁금한 사항이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고객센터를 통해 제품의 환불 절차, 사용법 안내, 서비스 문제 해결 등 다양한 주황오리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고객의 요구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 기업의 신뢰도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며, 만족스러운 고객 경험을 제공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https://teetoo.co.kr/…
삥땅동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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