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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굴덴이란 거금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 전쟁 초창기부터 거느렸던 삐닐리(Pinilih) 부 족으로 이루어진 1 000명 규모의 직속부대를 계 속 지휘하고 소총 500정을 추가해 그들의 무장을 강화해 줄 것을 요청했죠. 삐닐리 부족은 북부 술 라웨시 미나하사(Minahasa)의 부족으로 1826 년 슬라롱을 네덜란드와 뺏고 뺏길 당시 탈환전 선봉에서 용맹을 과시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그 들의 용맹은 더 이상 디포네고로의 편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항복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스람을 배교한다는 것은 아니오. 우린 더욱 철저히 알라의 가르침을 따를 것이오.” 센똣은 이렇게 말하며 소르반(Sorban)이라 불 리는 아랍식 두건용 천을 계속 사용하고 네덜란드 군과의 회식 때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건 투항하는 마당에 마지막 자존심 을 지키는 모양새였지만 그런 모습에 어떤 이들은 안쓰러움을 270억 루 피아)으로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천문학 적 금액이었습니다. 더욱이 나중에 스텔셀 요새 작전을 수행하면서 더욱 촘촘한 요새건설과 부대 의 기민한 기동력을 담보하는 데에도 과중한 비용 이 소모되었으므로 네덜란드 본국에서는 디포네 고로 전쟁을 식민정부의 그루트 온헤일렌(groote onheilen - 대재앙)이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재 정적자는 1 500만 굴덴(약 1 800만 굴덴(약 920억 루피아)에 달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1827년 한 해 동안 유럽인 병사 3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디포네 고로군의 사상자 수에 못지 않은 수치였습니다. 1828년 초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총독과 군사령 관이 모두 교체된 것은 이 대재앙에 대한 문책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동인도 군 총사령관에 복귀한 드콕 장군은 1828년부터 1829년 두 해 동안 이 대재앙을 하루 속히 끝내라 는 본국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었죠. 그래서 드콕 장군은 급기야 회합을 미끼로 디포 네고로 왕자를 방어선 밖으로 끌어내 사로잡으려 했습니다. 그를 잡으면 전쟁은 자동적으로 끝날 터였습니다. 자바의 귀족들이 일단 뱉은 말을 지 키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 던 드콕 장군은 클레이런스 대령(Kolonel Cleerens) 를 독려해 디포네고로 왕자가 스스로 협상 을 약속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러한 네덜란드 측 꼼수의 일환으로 이미 투항한 센똣 알리바사 같은 이들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회유하기 위해 동원되 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1830년 디포네 고로 왕자는 그와 자신의 군대가 입은 심각한 내 상을 숨긴 채 네덜란드의 협상에 응하기 시작했습 니다. (제6장 끝) ‘사 “경신을 통해 친밀하게 믿어라”라 고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함부로 다루지 말고 “디포네고로를 잡지 못한다면 최소한 망꾸부미 왕자와 끼아이 모조라도 잡아오란 말이오! 수뇌부 를 쳐부수지 않고는 저들을 와해시킬 수 없소!” 양측의 회합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드콕 장군은 모든 정보망을 동원해 디포네고로군 수뇌부의 위 치를 파악하려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 부미 왕자 “에루쪼끄로에겐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것은 제왕 “평온함으로 지혜를 기른다”라고 했습니다. 지혜가 생겨나더라도 그것을 의지하 여 행동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고 했습니다. 지혜와 평온함이 서로를 성장시키며 가족이나 지인들과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걱정과 결핍이 없으며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모든 순간에 걷는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경)으로 인해 내면이 혼탁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형편이나 상황이 녹록치 않더라도 온전히 받아들이고 경제적 선 무작업을 통해 네덜란드군이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 했습니다. “하지만 비협조자들에 대한 무거운 처벌은 필수 적이오. 단지 네덜란드군이 직접 나서지 말고 현 지 영주들 손에 피를 묻히도록 하란 말이오!” 네덜란드는 그 일환으로 전쟁지역에 영지를 가 진 귀족들을 압박해 해당지역 민중들의 ‘불법행 위’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네덜란드에게 협조하 지 않는 사람이 적발될 경우 주민들 전체에게 집 단적 책임을 물어 마을을 통째로 불사르기도 했습 니다. 그러면서도 네덜란드군이 피아를 냉정히 구 분해 일반 자바인들을 보호하며 오직 디포네고로 군과 그 지지자들만을 대적한다는 인상을 주려 했 습니다. 이 작전은 적잖은 효과를 보여 디포네고 로군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지원이 현저히 줄어들 기 시작했습니다. 19세기 자바복식 (https://kumparan.com) 이러한 벤뗑 스텔셀 작전이 주효해 움직임이 제 한된 디포네고로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기동력을 최우선으로 하는 디포네고로군의 게릴 라 전술에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이제 드콕 장군 의 부대는 디포네고로군을 추격할 필요가 없게 되 었습니다. 시간이 경과하며 자바 전역에 약 200개 의 요새가 건설되어 통신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 자 그 통신로를 넘으려는 디포네고로군 부대들의 시도가 쉽게 발각되고 또 좌절되기도 하면서 그간 유기적이었던 디포네고로군 각 부대간 통신과 연 계가 깨졌고 정보력도 극히 제한되기 시작했습니 다. 그 결과 그동안의 강점을 잃게 된 디포네고로 군은 웅아란(Ungaran)을 시작으로 스마랑의 지 방총독청 전투에서도 패전을 겪으며 많은 병력과 지휘관들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스텔셀 요새작전이 곧바로 네덜란드의 승리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도 네덜 란드는 꺼두 지역의 여러 전투에서 고전했고 특히 반유마스에서는 디엘 중령 공의의 설파자 과 식하면 비 위장을 해칩니다. 수면은 과도하게 하지 말고 과도하게 하면 정기가 흩어집니다. 저는 200년을 살았지만 과로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백세 이상까지 평온하게 살며 귀족 들과 의견충돌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디포네고로 의 군사 및 종교 지도자이자 정신적 지주였기 때 문입니다. 디포네고로와 끼야이 모조의 불화는 1826년 10 월 가웍 전투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디 포네고로를 비롯한 지휘관 대부분이 망꾸느가라 안 봉국을 침공해 들어감에 있어 전면전 방식을 주장했는데 끼야이 모조 만이 그동안 네덜란드군 을 상대해 왔던 게릴라전 방식을 고집스럽게 요구 해 기어이 관철시켰던 것입니다. 한편 디포네고로 왕자는 가웍에 집결한 네덜란드 연합군에 가담해 있던 수라카르타 군대와의 충돌을 원치 않았습니 다. 수난 빠꾸부워노 6세가 어쩔 수 없는 입장임 을 잘 알고 있었고 수난의 특별한 부탁도 비밀리 에 받았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한때 빠꾸부워노 6 세의 신임을 받았던 끼아이 모조는 수라카르타 군 대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결국 가 웍 전투는 누구라 할 것 없는 피바다를 이루었고 디포네고로 왕자는 지나친 원칙론에 입각해 자기 주장만을 강요하는 끼야이 모조가 부담스러웠졌 습니다. 당시 아직 20대 중반에 불과했던 끼아이 모조는 이슬람에 대한 깊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치 기어린 마음에 거듭된 승전으로 자신감이 쌓이면 서 초심이 변질되어 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 충돌은 1827년 8월에 있었습니다. 그들 은 에루쪼끄로(Sultan Erucokro)의 역할에 대해 협의하던 중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쁘라렘방 자야바야 예언서에 등장하는 공의의 여신 라투 아 딜(Ratu Adil)은 남성의 경우 ‘에루쪼끄로’란 특별한 명칭으로 불린다고 되어 있었죠. 기왕에 자바 백성들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라투 아딜의 현 신으로 여겼으므로 쁠레레드의 대관식에서 받은 술탄의 칭호에도 헤루짜끄라(Herucaktra - 에 루쪼끄로와 같은 의미)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 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귀족들과 네덜란드 지주들을 위해 아무 보상도 없 귀족들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 을 통제하려 했고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네덜란드 뻥아시 한인뉴스 2025년 2월호 I 29 군은 든든하기보다는 위협적으로 느껴질 뿐이었 습니다. 자기 편이 아무도 없는 궁전에서 어린 술 탄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만 했습니다. 한편 네덜란드군은 1828년에 보다 전략적 요충 지라 판단한 마글랑으로 그 본진을 옮겼습니다. 이 곳은 농민군의 저항을 보다 손쉽게 격퇴할 수 있 는 전략적 지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군 은 보다 현대화된 무기로 전력을 보강했고 귀족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스캔들 이 터지고 부패와 독직이 만연했을 뿐 아니라 왕 가의 비옥한 토지가 대단위로 유럽인들이나 중국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12 인들에게 임대되면서 가중된 백성들의 고통에 대 해 끄라톤이 외면으로 일관하자 민초들의 감정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각종 세금이 천정부 지로 치솟아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피폐해 갔는 데 도시와 성읍 관문들의 운명권마저 중국인들에 게 넘어가자 자바의 백성들은 길을 다니는 것만으 로도 통행세를 뜯겨야 했습니다. 민란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만한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 었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술탄의 측근들로 이루어진 자문기구에 참여해 어린 술탄을 보위하고 왕정을 바로 세우려 했으나 끄라톤의 실권은 이미 다누레 조와 네덜란드 총독부에 완전히 넘어간 상태였습 니다. 네덜란드는 자바의 왕가를 쥐락펴락 하면서 게걸스러운 탐욕으로 왕국의 이권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있었죠. 나폴레옹 전쟁으로 국가 역 량의 대부분을 소모한 후였으므로 네덜란드는 당 면한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세계 식민지 전체 에서 강력한 조세정책을 시행했고 사업과 판매의 독점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했습니다. 당연히 자바와 수마트라 전역도 예외가 아니었고 세 살짜 리 술탄이 다스리는 족자 왕국이야말로 가장 만만 지난 호에 이어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I 21 한 밥그릇이었겠죠. 더욱이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왕실의 왕자들과 왕후들을 압도하며 막강한 실권 을 휘두르던 다누레조 재상은 노골적으로 네덜란 드의 편을 들었습니다. 가혹한 조세정책과 네덜란 드의 독점행위가 왕실의 무력감 그 녀석은 내가 끄라톤에 돌아왔다 해도 금방 약해져서 전쟁을 그르칠 놈이 아니다.” 늙고 병든 몸으로 고향땅에 돌아온 하멍꾸부워 노 2세는 결과적으로 네덜란드의 회유공작에 빌 미가 된 셈이지만 애당초 디포네고로의 동기를 누 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 만 삐낭섬으로 유배를 간 1813년 이후 사랑하던 장손자 디포네고로와 그 진영에 속한 후손들을 다 시는 만나지 못한 채 그렇게 유명을 달리 하고 이 모기리의 묘역에 묻혔습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1월 17일 하멍꾸부워노 5 세가 다시 술탄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처음 왕위 에 올랐던 1823년엔 천진난만한 세 살박이 영아 였지만 이제 두 번째 다시 왕위에 오른 그는 야박 한 세상인정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소극적이고 조 심성 많은 여덟 살 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왕국 의 최고봉에 섰지만 세상은 그에게 무섭기만 한 곳이었습니다. 증조할아버지인 하멍꾸부워노 2세 는 자신을 폐위시켰고 삼촌인 디포네고로 왕자는 끄라톤을 호시탐탐 노리는 무서운 적이었으니까 요. 게다가 다누레조 2세 재상으로 대변되는 끄라 톤 궁전의 신료들 그 누구도 대신 느껴 줄 수 없습니다. 노화 그 리고 가득찬 신뢰입니다. 술탄께서는 이중 하나 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무엇을 선택하시겠 습니까?” “그렇다면…… 그 와중에도 인상되어 버린 세금을 내야 했으므로 그나마의 소득도 국가에 모두 빼앗 겼습니다. 기아선상에 내몰린 그들의 원성은 당연 히 드높았습니다. 한편 귀족들은 귀족들대로 총독 부가 토지임대권을 독점해 자신들이 직접 토지임 대를 하지 못하게 되자 이로 인한 기회이익의 상 실로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귀족들은 민중의 고통 보다는 자신의 빼앗긴 이권 때문에 네덜란드에 이 를 갈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각도는 매우 달랐지 만 결과적으로 귀족들과 백성들 모두 네덜란드의 게걸스러움에 반감을 품게 된 것이죠. 자바의 중국인들 https://nusantara.news 족자에서 멀지 않은 머라삐 화산 http://www.mixanitouxronou.gr 22 I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디포네고로 왕자님이 어쩌면 자야바야 예언서가 말한 라투 아딜(Ratu Adil)의 현신인지도 몰라!” 의 시조 라덴 위자야(Raden Wijaya) 등이 그들의 수명은 길고 움직임도 약해 보이 지 않았다고 기록에 전해집니다. 허나 현대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50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늙어 보 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하늘과 땅 사이의 기운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그 이유는 그러나 뭔가 능력을 보 여주기도 전인 6월 7일 그러니 제가 나서야죠. 그 많은 형제 들과 조카들의 빈 자리를 나와 내 아들들이 채워 야죠. 몸을 좀 더 추스리란 말을 그럴수록 힘을 내셔야죠.” “내 가족들을 세랑 왕자가 잘 돌봐 주고 있다고 하는구나.” 망꾸부미 왕자는 서한 한 통을 디포네고로 왕자 앞에 내놓았습니다. 거기엔 족자 끄라톤의 봉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군과 끄라톤은 모 든 가용한 경로를 통해 디포네고로군 지휘관들에 게 서한을 보내 회유하고 있었으니 적과의 내통이 라며 굳이 문제삼을 일은 아니었습니다. 디포네고 로 왕자 자신도 부대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상인들 을 통해 드콕 장군의 서한을 받은 적도 있었으니 까요. 세랑 왕자가 네덜란드에 항복한 후 끄라톤 의 자리를 하나 얻어 등청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간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세랑 왕자께서 숙부님 가족들을 신경써 주신다 면 더더욱 마음 놓으셔도 되지 않으십니까?” “디포네고로 왕자 그렇지 않아도 고통받고 있던 인 도네시아 민중들의 목을 더욱 졸랐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822년 머라삐 화산(Gunung Merapi)이 폭발하고 1824년 콜레라가 창궐하면 서 자바섬엔 더욱 큰 혼란의 시대가 찾아왔고 민 중들은 물밑에서 네덜란드에 대한 저항을 준비하 고 있던 디포네고로에게 은연 중 큰 기대와 희망 을 품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관료들과 현지 영주들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아무 댓가 없이 노동력을 차출당해야 했던 농부들은 자신의 논을 경작하지 못해 소득이 급격 히 감소했고 그리고 이슬람 사회의 지지 등을 보고 들으 며 그리고 자신 이 오갈 때 네덜란드군 기병대의 호위까지 자연스 럽게 요구했던 것입니다. 위로네고로는 끼아이 모 조가 정말 전쟁을 종식시킬 의지가 있다면 그 모 든 요구들을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네덜란드로 서는 디포네고로군의 신비주의적 이슬람 열정의 핵을 이루어온 끼아이 모조 같은 이를 전향시키 기 위해 아낌없이 예외를 만들어 줄 용의가 있었 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디포네고로 왕자는 당연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슬림!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이슬람 지도 자가 죽음이 두려워 네덜란드와 거래를 하려 한 건 가? 우리들의 신념을 믿고 명령에 따라 전장에서 목 숨을 바친 우리 병사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소? 난 당 신에게 그런 협상을 하라고 지시한 기억이 없소!” 그러나 끼아이 모조는 전쟁을 끝내려는 것이었 지 디포네고로를 배신해 네덜란드측에 전향하려 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디포네고로의 서한을 받고 마음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란 말 이오!” 끼아이 모조는 디포네고로에게 서한을 보내 자 신을 만나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끝내 회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도처에서 벌어지던 전 투 중 수하들과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있는 와중 에 몰래 종전협정을 진행한 끼아이 모조를 디포네 고로 왕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만 건가?’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행동이 반역으로 비칠 수 도 있었음을 마침내 깨닫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은 의지를 가진 인물이엇습니다. 곧바로 네덜란드에 투항할 것이란 디포네고로군 대다수 의 예상과 달리 끼아이 모조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정말 빠장의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문제 는 그를 네덜란드군이 가만 두지 않았다는 점입니 다. 르 바론 드 벡셀라(Letnan Kolonel Le Baron de Vexela) 중령이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베독 강 (Sungai Bedog) 서안에서 그 뒤를 따라잡았습니 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이미 사기가 바닥 북부 술라웨시 마나도 지역(중앙 호수가 똔다노 호수) 24 I 한인뉴스 2025년 4월호 에 떨어진 그의 부대는 평소의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끼아이 모조와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네덜 란드군의 포로가 되어 살라띠가(Salatiga)의 네 덜란드군 진영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끼아이 모조 는 이후 스마랑과 바타비아의 지하감옥을 전전하 다가 결국 동인도 북단인 북부 술라웨시 마나도의 똔다노(Tondano)라는 곳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게 됩니다. 끼아이 모조가 사로잡힌 지 얼마되지 않아 디 포네고로군의 총사령관 센똣 알리바샤(Sentot Alibasya)도 1829년 10월 17일 네덜란드에게 항복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막 스물 두 살의 아직 어린 나이였던 센똣은 전장에서 사자와 같이 용맹을 떨쳤지만 군대를 유지할 비용에 쪼들 리자 네덜란드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버리고 말았 던 것입니다. 센똣을 회유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센똣의 형인 마디운 군수 쁘라위로디닝랏(Prawirodiningrat) 을 이용했습니다. 그는 항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10 그리고 회춘의 비법은 모두 이 속에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좌선은 신체 자세를 단정하게 하고 두 눈을 감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형식적인 좌선일 뿐 그전에 술탄 전하 도 뿌리치고 전선으로 나서지 않았습니까?” 디포네고로가 가웍 전투에서 총상을 입었던 디 포네고로 왕자를 대신해 임시로 디포네고로군 전 체를 지휘했던 것도 베이 왕자였습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디포네고로가 전선에 나서는 것을 극 구 말렸던 것도 베이 왕자였고요. 하지만 디포네 고로도 그때 그 만류를 듣지 않았습니다. 디포네고로군 군사훈련장 https://sunardian.blogspot.com “걱정 마십시오. 신의 가호가 나와 함께 함을 술 탄 전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지옥 같은 모 든 전투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이번에도 가장 험한 곳으로 가 잘 싸우고 반드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장담하며 떠난 곳은 보고원토 강과 쁘로 고 강 사이의 지역이었습니다. 스텔셀 요새 작전 에서 네덜란드군이 섬멸지역으로 설정했던 바로 그곳이죠. 거기서도 베이 왕자는 요새들의 통신 로를 유린하며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 러나 영웅의 주변엔 늘 배신자가 있기 마련이죠. 꼬깝(Kokap) 지역에서 네덜란드군 대군에게 포 위된 베이 왕자는 또 다른 기발한 작전으로 적진 을 돌파하려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휘하의 끼 렉소 디위르요(Ki Rekso Diwiryo)라는 참모의 배신으로 그의 작전이 네덜란드군에게 사전에 노 출되어 탈출로 길목을 지키던 적들에게 집중사격 을 받았습니다. 베이 왕자는 두 아들과 함께 그 자 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베이 왕자란 별명 으로 불렸던 그는 술탄 하멍꾸부워노 2세의 30 번 째 아들로 깐젱 빵에란 조요꾸수모 (Kanjeng Pangeran Joyokusumo)란 정식 칭호를 가졌고 디포네고로 전쟁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별들 중 하나였습니다. 24 I 한인뉴스 2025년 3월호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 족자 외곽에서 여러 뚜먼 궁들이 네덜란드군에 백기를 들었고 망꾸부미 왕 자의 부인도 네덜란드군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극도로 목마를 때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기쁨 금으로 표시된 지역은 수라카르타 수난 국과 족자 술탄국에서 이미 요새화된 지역들. 한인뉴스 2025년 2월호 I 27 나 내통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래서 주택과 창고 급할수록 심호흡 한번하고 긍정적인 마인드 와 온전한 휴식(수면 끼아이 모조 등은 모두 쉴 새없이 움직 이며 위치를 바꾸고 있었지만 네덜란드군은 그들 가족들의 소재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 디 포네고로의 아내들을 포함해 수뇌부의 여인들은 꿀루르(Kulur)라는 곳에서 디포네고로군의 엄중 한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망꾸부미 왕자가 언젠가부터 전선보다는 후방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꿀루르에 디포네고로군 수뇌부 가족들과 망꾸 부미 왕자가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하지만 디포네고로군 대부대들 여럿이 가까이에 포진하고 있어 접근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드콕 장군으로서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 었습니다. 지금 당장 들이닥치지 않으면 저들은 또 다른 곳으로 옮겨갈 터였으니까요.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19 “가용한 병력을 모두 끌어모아 총공격을 가하시오!” 네덜란드군은 족자의 병력은 물론 망꾸느가라안 봉국의 군대들과 인근 요새 수비대까지 모두 불러 내 꿀루르를 포위해 들어갔습니다. 디포네고로의 아내와 아이들을 잡는다면 네덜란드는 협상의 유 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될 터였습니다. 노련한 망 꾸부미 왕자가 기민하게 병력을 운영하며 수비전 을 펼쳤지만 압도적인 숫자와 화력을 견뎌내기 어 려웠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이 맹공격을 펼치 며 은신처에 접근하고 있을 때 디포네고로군 사령 관 센똣 쁘라위라디르조(Sentot Prawiradirjo)의 부대가 홀연히 나타나 그 배후를 격파함으로써 간 신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센똣 알리바사가 직 접 움직일 만큼 수뇌부 가족들은 네덜란드군 못지 않게 디포네고로군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한편 그해 7월 족자 남쪽 방면 게게르 마을(Desa Geger)에서는 베이 왕자의 부대가 네덜란드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언제나처럼 맨 앞에서 응전하 던 그는 예기치 않은 적의 집중공격에 중상을 입 고 쓰러집니다. 그의 지휘권을 넘겨 받은 그 지역 영주 라덴 조요네고로(Raden Joyonegoro)는 베 이 왕자를 긴급히 후송시킨 후 기를 쓰며 그 뒤를 지난 호에 이어 한인뉴스 2025년 3월호 I 23 막아서서 네덜란드 대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 사하고 말았습니다. 베이 왕자는 디포네고로 본진 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얼마 후 아직 성치 않은 몸 으로 다시 전선에 나가게 됩니다. “숙부님 난 이제 더 이상 뭘 위해 싸워 야 할지 모르겠구나.” 뻥아시의 야전막사에서 디포네고로 왕자와 마주 앉은 망꾸부미 왕자는 술탄과 신하가 아닌 삼촌 과 조카로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버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이모기리의 묘 역에도 방문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질렀는데 이젠 가족들마저 족자 끄라톤에 잡혀갔으니 난 이제 반 쯤 죽은 시체나 다름없구나.” “숙부님 난 제왕의 권위를 선택하겠네.” “잘 선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슬람 포교자의 권위는 제가 감당하기로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건 곤란한 일일세.” 별 것 아닐 수 있었던 이 대화는 결과적으로 라 투아딜의 권위를 끼아이 모조가 디포네고로 왕자 와 나누어 공유하자는 것이었으므로 권력을 나누 자는 말과 다름 아니었습니다. “난 자바땅의 칼리파라네. 필요하다면 그 네 가 지 권위를 모두 갖고 싶지만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다 해서 누군가와 그 나머지 권위를 나눌 생각 은 없네.” “하지만 그건 한 사람이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것 들이 아닙니다.” “무슬림 날 보게 내가 이제 얼마나 더 살 것 같은가?” 백발이 성성한 망꾸부미 왕자는 지난 1825년 뜨 갈레죠에서 처음 합류할 때에 비해 훨씬 늙고 초 췌해져 있었습니다. “난 아버님이 왜 그 수모를 견디면서 네덜란드인 들의 손을 빌어 삐낭섬에서 족자까지 돌아오셨는 지 그 마음을 잘 알 것 같네.” “네 숙부님 내면에서부터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육근(눈 내면의 세계는 가벼이 여기고 내외 구별 없이 어떠한 욕망도 생기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잡념이 들어 마음이 어지러우면 이를 억지로 누르려 하지 말고 자연스 러운 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평정심을 유지해 나갑니다. 이는 건강한 생체 리듬을 유지하 는데 중요한 요소로서 냄새 맡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 가 나지 않습니다. 현의 긴장도가 적절할 때에 소리가 조화롭게 울립니다. 또한 너의 생각이 계속해서 혼란스럽지 않게 하라. 생각을 줄여 신을 기르고 너의 정기를 낭비시키지 않 게 하며 네덜란드는 족자에 서 문띨란(Muntilan)을 거쳐 마글랑까지 이어지 는 도로계획의 원래 경로를 조금 틀어 굳이 뜨갈 레조(Tegalrejo)를 통과하도록 수정하면서 자바 전쟁의 직접적 단초를 제공합니다. 그렇게 수정 된 도로공사가 하멍꾸부워노 외가의 조상 묘소들 을 지나게 된 것입니다. 비록 매일 등청하진 않았 지만 당시 술탄 하멍꾸부워노 5세의 숙부이자 가 장 중요한 후견인 중 한 명인 디포네고로 왕자에 게 사전 언질은 물론 양해와 허락을 받아야 마땅 했으나 그런 절차가 깡그리 무시된 것은 다누레 조 4세 재상의 은밀한 입김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 이었죠. 다누레조 재상이 공사강행을 위해 그 땅 에 경계표시 말뚝을 박으려 하자 그제서야 조상들 의 묘역이 파헤쳐지게 된 것을 알게 된 디포네고 로 왕자가 크게 격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었습니다. “저 놈들이 우리 묘역 에 박은 말뚝들을 모조 리 뽑아버려라!” 디포네고로 왕자는 수 하들을 시켜 그 말뚝들 을 모두 뽑아 불태워 버렸습니다. 포네고로 왕자도 남쪽 바다 마물들의 여왕 니롤로 키둘과 만났다는 소문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야기 들이 당시 세간에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니롤로키 둘은 세노빠티와 만난 후 역대 마타람 제왕들의 영적 아내였다고 믿어졌으므로 니롤로키둘이 디 포네고로 왕자를 찾아왔다는 항간의 소문은 그가 진정한 마타람의 후예이자 족자 술탄국의 적통이 라는 증거처럼 여겨졌습니다. 한편 이슬람 울라마 집단은 이슬람의 가르침에 반하는 서구의 관습이 날로 퍼져나가며 자바의 민 속과 이슬람의 가르침을 타락시키는 것에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들은 민중들에게 이슬람에 입각한 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도덕적 타락의 근원인 네 덜란드를 속히 퇴치해야 할 것이라 주장했고 디포 네고로 왕자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마타 람 까르타수라 왕국 초창기인 1647년 폭군 아망 꾸랏 1세가 울라마들과 이슬람 학자들을 무더기 로 학살하면서 왕가와 이슬람 울라마들 사이엔 오 랜 불신과 증오의 앙금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 만 스스로 왕족이면서도 울라마이기도 한 디포네 고로 왕자가 200년만에 그 간극을 극복하며 왕가 와 이슬람 사회 양쪽을 모두 아우른 것입니다. 그 리하여 그는 이슬람 학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 어 모았고 더 나아가 이슬람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상과 분명한 저항의 결기가 모든 울라마들 눈을 반쯤 감고 다누레조 재상의 부패와 맞물려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지 않아 이자의 부담이 없으며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습니다. 자애로운 기운 은 천지의 조화를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는 검소함을 보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검소함은 단지 재물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식 생활의 검소함은 비 위장을 튼튼히 하고 다시 해가 뜨면 일터로 나가는 단조롭고 소박하지만 지혜로운 생활을 하고 담배 더위가 오기 전에 옷을 벗었습니다. 극도로 배고플 때 음식을 먹지 않았고 도가 완성되고 덕행이 완비됩니다. 이 방법 들을 이해하고 실천하면 장생의 비법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며 도가에서 단전의 단련 과 호흡법을 연구개발한 사례 도와 덕이 본성으로부터 저절로 흘러나오게 됩니다. 평온함과 지혜가 결합된 상태가 정경과 지혜입니다. 지혜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평온함에 안주할 수 있다면 동시에 디포네고로군의 지휘관들에게 끄라톤 궁전의 자 리를 보장하며 적극적인 회유작전에 나섰습니다. 1828년 4월 18일에는 망꾸부미 왕자의 아들 인 나타디닝랏 왕자(Pangeran Natadiningrat) 가 네덜란드의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망꾸부미 왕자에게 큰 부 담이 되었습니다. 1828년 말엔 뻐낭구한(Penangguhan) 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져 네덜란드 군과 디포네고로군 사이에 심대한 사상자가 발생 했는데 네덜란드 측에선 반잉겐(Van Ingen)대위 와 쁘랑웨다나 왕자(Pangeran Prangwedana) 가 전사하고 디포네고로군 측에서는 최정에 만티 레조 부대(Pasukan Mantirejo) 사령관이 전사하 고서야 서로 군대를 물렸습니다. 1828년 내내 디 포네고로군은 왕자들이 속속 전사 또는 체포당하 거나 투항하면서도 네덜란드군과 대체로 호각을 유지하며 큰 펀치를 주고 받았습니다. 1829년 초 이번엔 네덜란드 측에 변동상황이 발 생했습니다. 신임총독으로 요하네스 반 덴 보쉬 (Johannes van Den Bosch)가 부임해 그동안 디 포네고로군을 야금야금 약화시켜온 드콕 장군을 해임하고 벤야민 비쑙 소장(Mayor Jendral Benyamin Bisschof)을 네덜란드 동인도군 총사령 관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저런 미개인들을 상대로 몇 년씩이나 전쟁을 끌 다니 우습지도 않은 일입니다. 한 달만 주시면 디 포네고로군의 주력을 완전히 와해시키겠습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하며 1829년 5월 13일 총사령 관에 취임한 비쑙 소장은 두려움)를 초 월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경계를 초월하면 번뇌가 생기지 않고 두려움과 모욕을 받지 않고 두통 등에 시달리 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과 육체는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마음은 곧 에너지이고 기혈순환의 핵 심입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작은 병이 암으로 커지는 과정을 겪으며 후회하고 변화하는 모습들을 관 찰합니다. 큰 병마에 시달리고 나서야 외양간을 고치기보다 드보스트 중령(letkol de Bost) 등 베테랑 지휘관들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족자 남쪽방면에서는 1827년 6월 21일 족자 지방총독 반 로윅(Van Lowick)이 노또쁘로조 왕자(Pangeran Notoprojo) 와 세랑 왕자를 밀어붙여 마침내 항복을 28 I 한인뉴스 2025년 2월호 얻어내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전쟁 초 반 눈부신 활약을 했던 세랑 왕자를 잃 은 것은 디포네고로군에겐 큰 손실이었 습니다. 지리한 접전 끝에 1827년 10월 10일 이 후 휴전이 발효되어 일단 전투가 멈추었지 만 종전협상은 매번 결렬되었습니다. “자바땅에서 네덜란드 민간인들의 상업활동을 인정할 테니 군대는 완전히 철수해야 할 것이오!” “반란군의 무장해제가 선행하지 않는 한 총독부 는 반란군의 그 어떤 요구도 수용할 수 없소.” 이렇게 갑론을박이 계속되었지만 어쨌든 휴전이 유지되던 시기에 디포네고로 왕자는 군세를 추스 르며 본진을 뻥아시 인근 삼비라타(Sambirata) 로 옮기고 그곳에 이슬람 자바 왕국의 끄라톤 궁 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벤뗑 스텔셀 전술에 따라 체계적으로 세운 요새들을 강화한 네덜란드군은 디포네고로군을 충분히 옥죌 수 있다고 판단되자 삼비라타 끄라톤 궁전 완공식을 기해 일방적으로 휴전을 깨고 기습공격을 감행해 왔습니다. 디포 네고로 왕자를 사로잡으려는 목적이었죠. 자신이 유리하다는 판단이 서면 매번 일방적으로 휴전을 깨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네덜란드군의 행태는 비 단 디포네고로 전쟁에서뿐 아니라 훗날 1945년 이후 5년간 벌어지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도 몇 번씩이나 똑같이 반복됩니다. 삼바리타는 불바 다가 되었지만 디포네고로 왕자는 뻥아시로 피신 했고 전쟁은 또다시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양상은 디포네고로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 하던 전쟁 초반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1828년이 밝으면서 노술탄 하멍꾸부워노 2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928년 1월 3일 77세를 일기 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족자 끄라톤에서 마감한 것 입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디포네고로군도 애도 를 표했고 망꾸부미 왕자 역시 적진 한 가운데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부음에 마음 아파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드콕 장군이 설명하는 동안 턱수염을 매만지거 나 콧수염을 비틀며 우려 섞인 표정을 짓던 지휘 관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는 디포네고로 와의 전쟁에 이미 엄청난 전비를 쏟아넣어 총독부 의 금고가 바닥난 상태였고 때로는 병사들 급여조 차 주지 못할 정도로 쪼달렸는데 이제 사람과 물 자를 몇배로 더 동원해 다수의 요새를 자바 전역 에 짓고 그 요새 전부에 충분한 병력을 배치해 운 영해야 하는 스텔셀 요새작전은 더 큰 출혈적 지 출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네덜란드 고위 지휘 관들이 이 작전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당 연한 일이었습니다. “반란지역들이 수복되고 자바의 백성들이 농사 일로 돌아와야만 비로소 세금이 다시 걷히게 될 것이오. 그러니 디포네고로군을 압박하기 위한 이 작전이 비록 당장은 큰 비용을 소모한다 해도 장 기적으로는 분명 더 큰 경제적 보상을 가져오게 될 것이오.” 드콕 장군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촘촘한 요새망이 강력한 포위망 역할을 하여 적의 이동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면 약화된 적을 섬멸할 기회가 분명히 올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18 “이 작전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주민들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오. 그러니 반란군과 일반 주민들을 철저히 구별하여 달리 대하고 병사들의 행패와 약 탈을 일절 금지해야 하오. 주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시오.” 네덜란드로서는 백성들이 디포네고로군을 돕거 지난 호에 이어 스텔셀 요새 작전 – 삼각형은 1827-1830년 사이에 만든 네덜란드군 요새 듣고 들려오는 소문과 전해 내려오는 전설 디포네고로 왕자님에게 니롤로키 둘이 현신했데. 그분이야말로 마타람의 적통이란 뜻이지. 그분이 우리 왕국을 지켜내실 거야!” 마타람 왕국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술탄 아궁 (Sultan Agung)의 무덤에서 사람들이 보았다는 불길한 원귀(寃鬼)의 이야기부터 그 옛날 마타람 왕국의 시조 권능왕 세노빠티가 그랬던 것처럼 디 동인도인들이 맨 가마 위에 올라탄 네덜란드인들 자야바야의 예언 (배경의 문자는 자바어 알파벳) 쁘라렘방 자야바야(Pralembang Jayabaya) 예 언서란 분열되어 있던 12세기의 중부 자바 끄디 리(Kediri) 왕국을 재통일한 자야바야 대왕의 예 언을 담은 것으로 당시 사람들은 자야바야가 힌두 신 비슈누의 환생이라고 했다죠. 그 예언의 골자 는 세상이 혼돈과 불의로 편만 하거나 거대한 위기 가 닥쳤을 때 라투아딜(Ratu Adil - 공의의 여신 또는 정의로운 제왕)이 강림해 세상을 평정한다 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까후리빤(Kahuripan) 의 국왕 아이르랑가(Airlangga) 또는 호르몬 등에 서 찾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진시황의 불로장생초를 찾는 일화나 마사지 등)을 즐기는 습관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덕목이라 생각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한 번씩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마약 등 몸에 이롭지 못한 중독성 있는 기호식품을 과다 섭취하고 자신의 건강은 뒷전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한 시기 마음과 도가 일치되어 몸 과 마음은 자연스레 평온해집니다. 임상에서 환자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여 불면증 마음을 쉽게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수지천은 “태산이 눈 앞에서 무너져도 담담할 수 있고 마음이 동요되고 마음이 동요되면 맑은 정신을 낼 수가 없고 마음이 요동치면 어 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환상에 홀려 그것이 실제라고 착각하며 마자빠힛 왕국(Kerajaan Majapahit)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I 23 는 강제노역에 자주 동원되어야 했던 백성들 많 은 유혹들로 바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술을 일상 음료로 삼고 말루꾸 말을 줄여 기를 기르라.“ 과거에는 장수의 길을 논의할 때 말의 검소함은 기를 보하 고 맛을 느끼고 망상하며 명예와 이익의 속박에서 벗어나 모두들 보는 앞에서 내 목을 배게. 신념을 잃은 배신자로서 말이야. 그 대신 내 시신 을 끄라톤으로 보내 내 가족들이 장사지내도록 해 주게.” “숙부님….” 다음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망꾸부 미 왕자의 숙소 앞에는 그의 말과 소규모 부대가 디포네고로 전쟁 당시 무기 http://koleksitempodoeloe.blogspot.com 한인뉴스 2025년 3월호 I 25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나오는 망꾸부미 왕자를 그 부대의 지휘관이 맞았습니다. “저희가 왕자님을 끄라톤까지 모시겠습니다.” 디포네고로는 망꾸부미 왕자를 그렇게 조용히 족자 끄라톤으로 보내주기로 한 것입니다. 디포 네고로 왕자는 그의 숙소에서 끝내 모습을 비치지 않았습니다. 망꾸부미 왕자는 한참 동안 디포네고 로의 숙소를 응시한 후 말에 올랐습니다. 전쟁 내 내 그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디포네고로 왕 자의 곁을 지켰던 망꾸부미 왕자는 그렇게 네덜란 드에 투항했습니다. 끄로야(Kroya)에서 소년장군 센똣은 홀로 분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수백 명의 네덜 란드군을 생포하고 400정의 소총과 화포들을 노 획하는 승전보를 보내오기도 했던 것입니다. 하 지만 1829년의 전황은 전반적으로 디포네고로군 에게 점점 더 불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무엇보 다도 머라피 산기슭에서 끼아이 모조가 네덜란드 군에게 사로잡힌 사건은 디포네고로군에게 큰 충 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는 1826년 하반기부 터 디포네고로는 물론 목적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고 평 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자신을 컨트롤 하려고 하지 말고 몸도 릴렉스되며 편안하다는 느낌 을 받게 됩니다. 통증이라는 느낌은 기분을 다운시키고 불안하게 만들며 무색계로 나뉩니다. 사욕을 버리면 욕계(욕심)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 경 계를 잊으면 색계(유혹)를 초월할 수 있습니다. 공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무색계(불안 발리에 주둔하고 있던 나머지 군대들도 모두 자바로 불러들였고 유럽 본토에서 도 병력을 충원해야 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백성들은 오직 디포네고로 왕자만이 당면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줄 유일한 인물이라는 기대 를 더욱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1825년 7월 중순 번잡하고 답답한 마음 이 결국에는 노화를 촉진시키고 병을 만들고 건강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목표는 다음에 또 도전하면 됩니다. 하지만 건강을 잃으면 되찾기 힘든 것이 문제입니다. 글: 미르한의원 원장 서상영 28 I 한인뉴스 2025년 3월호 단연은 세속적인 인연을 끊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연결고리에서 얽매이게 되면 보검을 주조하는 것 과도 같습니다. 강철의 비율이 적절해야 검이 날카로워지고 쉽게 부러지지 않는 법입니다. 연성의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하는 운동 부귀영화 의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그리되면 마음은 잠시도 평온하지 않고 부귀와 명예의 생각이 의지를 흔들지 않았습니다. 배고픔과 추 위 부모로부터 받았음에 감사하고 부부간의 화합은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하며 부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찌안주르(Cianjur) 전투에서 디포네고로군 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던 게릴라 전술에 걸려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그의 전사가 몇 주만 늦었다면 전임사령 관 드콕 장군은 이미 본국행 범선을 타고 아프리 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 다. 그러나 짐을 다 싸고 귀국준비를 하던 드콕 장 군은 갑작스러운 신임사령관의 전사로 급히 다시 전선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로서는 이 지긋지 긋한 자바 전쟁을 영원히 잊어버릴 수 있는 기회 였는데 말입니다. 어쩌면 그는 디포네고로 왕자와 운명적 악연으로 엮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디포네고로군은 바글 렌과 반유마스에서 네덜란드군을 압박했고 족자 남쪽 방면에서는 베이 왕자의 농민군이 네덜란드 의 요새와 초소들을 공격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술라웨시 부자간의 화합은 가정을 평안 하게 하며 분노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는 상태를 일컫기도 하는데 불편함과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프지 않고 장수할 수 있는 무병장수의 방법을 연구 하였습니다. 현대과학에서는 무병장수의 열쇠를 DNA에서 찾기도 하고 사교의 검소함은 몸의 정화와 사람관계의 실수를 줄이고 사교활동 사슴 사슴이 오른쪽에서 갑자기 일어나도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정’의 극치입니다. 《도덕경》 오천 글자의 요지가 바로 위 내용입니다. 그래서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 사악한 것들이 멀리 사라지게 됩니다. 물질만능주의 세상에서 온갖 유혹과 집착을 적절히 조절해야 삶이 평탄하며 건강에도 이롭 다는 애기입니다. 경은 도의 기초입니다. 마음을 한결같이 집중하고 사원에 대한 약탈을 금지하고 곡식을 빼앗거나 재산을 파괴하지 않도록 병사들 을 철저히 교육시켰습니다. 약탈과 행패는 주민들 의 증오와 저항만 살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들이 디포네고로군에게 마음을 주는 결과로 이어질 터 였습니다. 그래서 군은 문화적 사전 허가도 없이 네덜란드군의 위로네 고로 중령과 비밀리에 교섭을 시작했습니다. 위 로네고로 왕자는 디포네고로군의 족자 끄라톤 공 지난 호에 이어 한인뉴스 2025년 4월호 I 23 격을 막아냈던 네덜란드군 측 지휘관으로 당시의 공을 인정받아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상태였 습니다. 당시 끼아이 모조는 이미 디포네고로군의 영적지도자였으므로 제자들은 그를 이슬람 큰선 생으로 떠받들었습니다. 나중에 나이가 든 후 땅 을 치고 후회하게 되지만 끼아이 모조는 이때 자 신만이 옳다는 종교적 자만심에 가득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이 빠장에 오갈 수 있는 특권 과 끄라톤 최고의 종교지도자 지위 새)을 모방한 동작으로 구성된 기공을 통해 신체 활동력을 증진시키고 색계 생각 등 모든 적절한 양이 있는 법이기에 너무 넘쳐도 부족해도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세상은 욕계 생각의 검소함은 번뇌를 사라지게 만든다고 하였으니 생로병사의 모든 감정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자신을 살펴 나가다 보면 자연히 번잡함은 끊어질 것입니다. 장수한 선인들은 모두 이렇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수심은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을 뜻합니다. 마음은 신체의 주인이며 생활은 규칙적이며 선인들의 지혜를 배워 나간다면 많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장자가 말하길 세 금 징수를 맡은 화교들의 횡포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디포네고로 왕자의 저항이 획기적 지지 를 모을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 다. 여기에 더해 세금은 일찍 납 부하고 세포나 신경전달물질 소화불량 수명을 늘리는 좋은 방법이다. 이를 실천하면 장생의 길을 열 수 있으며 술과 성욕에 빠지 는 것 모두 신체를 해칩니다.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정도가 심해지면 생명까지 위협하게 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고 걸었고 술과 성의 검소함은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술에 취해 성 관계를 맺고 스트레스와 피로를 벗 삼아 살아가며 슬픔 시야를 멀리 두지 않았으며 식사 식사를 거르고 신은 견고하고 진실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경신 을 지키면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길 심리적 심신의 균형을 맞추는 수련법-를 들어 보셨을 겁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여러 가지 장생방법들을 통하여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는“무병장수” 하 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양 전통의 장생을 위한 지침> 아래의 방법들을 이해하고 실천하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며 심하게 말해 왕실 의 재산이었으므로 싱가가리 왕국 라자사 왕조 (Rajasa Dynasty)의 켄 앙록(Ken Angrok) 양생 방법의 차이 때문입니다. 한인뉴스 2025년 3월호 I 29 상고 시대의 사람들은 음양의 법칙을 따르고 양생의 기술을 조화롭게 활용하여 어떤 이들을 가소롭다는 표정을 애써 감춰야 했습니다. 센똣은 항복한지 일주일 후인 10월 24일 마치 개선 장군처럼 족자에 들어서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는 매월 100굴덴의 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네덜란드 기병대 소령의 계급장을 달았 습니다. 센똣의 항복은 디포네고로군의 사기를 결정적으 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디포네고로 왕 자를 따르는 많은 귀족들 역시 남기고 온 가족들 이 네덜란드로부터 가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사 실로 고민하던 터였습니다. 센똣의 투항 이후 그 들 역시 앞다투어 속속 네덜란드에 투항하고 말았 으므로 디포네고로 왕자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제 전쟁이 더 이상 길어진다면 디포네고로에게 절대 유리하지만은 않을 터였습니다. 그 바로 직전인 1829년 10월 14일 디포네고로 왕자의 아내 라덴 아유 렛나닝시와 자녀들이 네덜 란드군에게 사로잡히는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디 포네고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제 네덜란드군과의 협상은 거의 불가피한 듯 보 엿습니다. 네덜란드 역시 전쟁을 빨리 끝내야만 할 상황 이었습니다. 엄청난 전쟁비용을 치르느라 식민지 운영이 파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군은 디포네고로를 사로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 한인뉴스 2025년 4월호 I 25 고 중상모략과 감언이설도 사용했는데 디포네고 로의 목엔 5만 굴덴의 현상금도 나붙었습니다. 하 지만 자바 민중들은 누구도 디포네고로를 배신하 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군은 그 위세가 크게 축 소된 디포네고로군의 동선을 대체로 파악되고 있 었지만 이제 드콕 장군은 디포네고로 왕자를 함부 로 죽여 순교자를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디포 네고로 왕자가 죽는다면 자바 민중들은 더욱 더 적개심을 불태우며 네덜란드에게 악에 받쳐 달려 들 터였습니다. 그것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 습니다. 자바전쟁 초기인 1825-1827년 기간에 네덜란 드 측이 겪어야 했던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병 력부족의 문제였고 더욱 심각한 것은 비용문제였 습니다. 나중의 일이지만 디포네고로 전쟁을 통 틀어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정부가 지출해야 했 던 전쟁비용은 모두 2 얻고 잃음의 생각 을 떨치지 못하면 탐욕의 마음에 빠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잡음이 끊이지 않게 되어 여유를 찾으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풀어 나간다면 생명을 좀먹는 일은 그 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가끔씩 생각날 때 읽어보시며 머리와 가슴에 양분주시길 바랍니다. 영약을 찾거나 금단 을 만들 필요가 없다.” 그리고 노자는 말했습니다. “너의 몸을 지나치게 피로하게 하지 말고 오염된 상태를 기 꺼이 받아들이고 오직 맑은 차와 간단한 식사로도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양생의 묘책 이며 온갖 유혹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왕족 외부 세계의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여 욕망을 줄여 정을 기르며 욕망의 검소함은 정신을 모으며 원숭이 음식은 절제하고 의식)을 스스로 살피고 이 때 문에 잠을 설치고 이 방법의 진수를 완전히 파악하면 불로장생을 논할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 슬람 학자와 지도자들을 움직여 얼마 후 자바 전 쟁의 선봉에 서게 합니다. 이와 같이 네덜란드가 점령하다시피한 끄라톤 궁전에서 온갖 권모술수와 비도덕적 행위들이 횡 행하고 네덜란드 민간사업자들에 대한 왕국 토지 의 대규모 임대로 인한 네덜란드의 영향력 강화 이건 매우 정치적인 부분이야. 알라의 뜻에 따라 이 전쟁을 수행하는 이 조직엔 망꾸부 미 왕자님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수두룩한 상황이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20 지. 내가 자바땅의 술탄이 된 것은 그분들이 나보 다 못해서가 아닌데 에루쪼끄로의 권위를 그분들 도 아닌 다른 사람과 나누는 모습은 우리들 사이 에 분란을 가져올 걸세.” “저는 종교적 부분을 감당한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온 일이기도 하고요!” 이 논쟁은 필요 이상으로 격해졌고 디포네고로 는 끼아이 모조의 정치적 고집이 점점 더 버거워 졌습니다. 결국 의견충돌이 심해지자 자존심이 상 한 끼아이 모조는 빠장(Pajang)의 고향으로 돌 아가겠다 했고 디포네고로 왕자는 이를 승락합니 다. 그렇게 서로 떨어져 머리를 식히고 나면 언젠 가 초심으로 돌아가 함께 일할 시간이 다시 올 것 이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물론 끼아이 모조가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악의 를 가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이 전쟁을 이기 고 싶었어요. 단지 디포네고로를 비롯한 많은 이 들이 원하는 것 이상의 주도적인 역할을 스스로 원했던 거죠. 그래서 그는 디포네고로에게 사전 연락도 이는 모두 정기를 손상시킵니다. 기쁨 이러한 모든 일을 조금씩 절약하면 이 익이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화합은 길한 기운을 불러옵니다. 군신이 화합하면 국가는 번영하고 이렇게 되 면 이를 장수라 여 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과거보다 복잡하고 이민족이 궁에 들어와 궁안의 여인들과 함부로 잠자리를 한다는 것은 끄라톤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어야 마땅할 술탄이 아무 것도 모르는 세 살짜리 아이가 아니었다면 절대 벌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왕족 이슬람의 포교자 인간은 육신을 타고 남으로써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을 갖게 됩니다. 육신은 오감으로 보고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해 나가는 것은 장수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연성은 마치 가야금을 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자신 의 삶속에서 의미를 찾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식생활이 불규칙 하고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낮추지 마십시오. 또한 자신을 소중히 여기 라는 말입니다. 현대 사회는 정크푸드 자연 법칙을 거스르고 즐거움만을 추구하고 일시적 쾌락만을 탐합니다. 이리하면 50세를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촌사람들이 도시사람들보다 장수하는 확률이 높습니 다. 촌사람들은 아침이면 일어나서 낮에 일하고 자족자이면 상락(스스로 만족하는 자는 항상 즐겁다)이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마음이 즐 거우면 몸도 즐겁습니다. 몸이 즐거우면 호르몬 대사도 잘 되고 혈액순환도 원활합니다. 생활한의학 6 한방 지난 호에 이어 한인뉴스 2025년 3월호 I 27 그 밖의 인체 활동을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여 병에 잘 걸리지 않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항심의 방법은 내면을 고요하게 유지하고 작은 일로도 사람들은 쉽게 성급해지는데 잠시 도 편안하지 않고 신체는 안정되지 않아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건강한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피해야 할 최대의 적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덕행과 재능을 드러내지 말고 장기간 잠을 잔 적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도 할아버님 마음 잘 압니다.” “그분은 족자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으셨던 거야.”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 는 이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너무나 잘 알고 있 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여기서 대화가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망꾸부미 왕자는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나도 아버님과 같은 마음이야.” “……” “내일 아침 전당포 에 가지 않고 전선에 나가는 건 조금 더 몸을 추스린 후 라도 괜찮지 않습니까? 너무 많은 삼촌들과 형제들 을 잃었습니다. 숙부님까지 잃을까 두렵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직접 나서 그렇게 말하자 말 에 올라타려던 베이 왕자는 조카에게 공손히 고개 를 숙였습니다. “술탄 전하 점진적으로 평점심을 유지해 나가도 록 노력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것입니다. 위 글에서 언급된 내용 외에 식사 후 간단한 산책이나 적당량의 운동과 신체활동 정’ 네 글자로 요약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자애로우면 모든 생물을 해치지 않고 정’ 네 글자를 근본으로 삼습니다. 노자는 또 애기했습니다.“수면과 식사는 양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식사는 과식을 하지 말고 정기 소진이 촉진되어 수명이 단축됩니다. 루칭셴공은 말했습니다. “가정에 충분한 땔감과 쌀이 있고 정신 또한 온전하지 못하 여 정신의 안식처입니다. 마음이 고요하면 지혜가 생기고 정신이 맑지 못하면 육체 또한 탁한 기운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단연이 꼭 사람과의 관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의 명예와 불명예 정신이 혼탁하며 정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매일 자신을 살피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집착을 내려놓는다면 제4장 자바전쟁의 시작 세상의 모든 왕가들이 그렇듯 어린 술탄 뒤에서 실권을 쥐려는 왕족들과 정치가들은 섭정 자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기 마련이죠. 뿐만 아니라 민 심도 흉흉해지면서 하멍꾸부워노 5세의 즉위 직 후인 1822년 왕가를 비난하는 소요가 일어나기 도 했습니다. 술탄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네덜 란드 관리들의 전횡도 도를 넘기 시작했습니다. 궁전을 함부로 드나들던 그들이 궁전 안 여인들을 범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궁 안에서 일하는 여인 들이란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한 당시의 관념으로 는 술탄의 여인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지 몰라 도 최소한 왕실에 속한 여인들 주요 지휘관들 죽음은 나 자신 이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동양전통의 장수비법의 일부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고 저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글로 엮어 보 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장수의 핵심은 “평정심”인 것 같습니다. 인생은 어쩌면 평정심을 향해 나아가는 수련의 과정이며 즐거움이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고 즐거움이 지나치면 신체를 상하게 하며 지나치게 정기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방탕에 빠진 자들은 에너지를 충전할 줄 모르며 지상의 신선이 될 수 있는 비결이라 전해지고 있습니다. 상고 시대의 사람들은 백 살까지 사는 것이 드물지 않았고 지치도록 누워 있지 않았습니다. 추위가 오기 전에 옷을 입었고 진정한 좌선은 언제 어디서나 질병 질병을 피하고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 질투와 남을 해치려하는 마음 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환자분들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왜 지금 계획하신 목표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나요? 이렇게 질문 드리는 이유는 건강보다 지금 의 목표가 더 중요한가를 되묻는 질문입니다. 계획한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애기가 아니라 청각을 너무 예민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래 앉아 있지 않았고 체력과 유연성을 향상시키며 촉감이 있습니다.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어떠한 자극에 대한 인체의 반 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으면 정신도 평온해 지고 취미활동 친구간의 화합 은 서로를 지킵니다. 30 I 한인뉴스 2025년 3월호 韓方 ‘정’은 몸을 지나치게 피로하게 하지 않고 칠정(희 통증은 나 자신만의 느낌이며 한 번도 과식을 하지 않았고 해가 지면 돌아와 휴식하고 잠자고 현대 에 들어서는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의 선봉에 섰던 술탄 하멍꾸부워노 9세와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 같은 이들이 라투 아딜이라 여겨졌죠. 1820년대 의 자바 백성들은 디포네고로 왕자가 라투 아딜 의 현신이라 믿었습니다. 사족이지만 훗날 인도 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맞았을 때 네덜 란드 특수부대 대위 출신인 베스털링이란 영악한 자가 라투 아딜을 자처하며 수까르노의 신생정부 를 상대로 아프라 반란(Pemberontakan APRA: Angkatan Perang Ratu Adil - 공의로운 여신 군대의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습니다. “요즘 매일 밤 술탄 아궁 대왕의 무덤에 꾼띨아 낙이 나타난다는군. 불길한 징조야.” 꾼띨아낙이란 출산과 관련해 목숨을 잃은 여인의 원귀로 대체로 우리 손말명이나 처녀귀신과 통합니 다. “걱정하지 마 형제간의 화합은 서로 돕고 화타가 개발한 ‘오금희’(五禽戏)- 다섯 가지 동물(호랑이 활동을 제한하게 만들고 휴식을 적절히 유지할 때 신체를 온전히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주의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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