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인 > 거부

연관태그 검색 [태그 in 태그]
000억달러 달성 을 목표로 하는 ‘한-인니 중장기 경제협력비전’에도 합의했다. 특히 유도요노 정부는 한국의 잠수함 3척과 T-50 고등훈련기 16대 구매 및 차세대 전투기 공동 연구·개발 등 방산 협력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2017년 11 월 9일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서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 는 데 합의했다.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좁은 영토와 한정된 자원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개발도상국부터 현재까지 경공업 1959년 6월 인도네시아북한 친선협회 구성 1960년 6월 인도네시아 언 론인 북한 방문 1960년대 초 경제적 차원에서 한국 기업의 주도로 양국 고위인사 간 접촉이 이 루어지게 된다. 당시 산림개발을 위해 인도네시아 진출했던 ㈜한국남방개발(현 KODECO) 최계월 회장은 한국 기업인으로는 최초로 1962년 1월 수 카르노 대통령을 예방하였으며 1960년대 초 인도네시아는 한국 친선방문단을 거부할 만큼 우리와의 관계 구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회장은 1962년 2월 도쿄에서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수카르노 대 통령 간 만남을 주선해 막혔던 한-인니 외교의 물꼬를 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앞서 1960년대 초 이리안자야(서파푸아) 지도자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일본 정 부의 협력을 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1961년 6월 주인도네시아 북한 총영사관 개설 1961년 미국에 서 특수전 교육을 받은 후 줄곧 특전사 장교로 최 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수카르노 정권 당시 인 1958년 수마트라와 술라웨시에서 일어난 ‘ 인도네시아공화국 혁명정부(PRRI)’ 반란 사건 1961년 이리 안자야(현 서부파푸아) 머라우께 지역 군사작전 지휘 1962년 2월 일본 도쿄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 부장과 수카르노 대 통령 간 만남을 주선했다. 한편 1964년 한국 정부 인사로는 최초로 산림조 사단(단장 심종섭)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여 최 계월 회장과 함께 수카르노 대통령을 예방하였다. 1964년 인도네시아 여당 수비안또 간사장과 수 카르노 대통령 양녀 사디킨 여사가 산림협회 협의 차 방한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했다. 1965년 인도네시아 정변(9.30사태/G30S)으로 인도네시아공산당(PKI: Partai Komunis Indonesia)이 붕괴되고 친미·반공 노선의 수하르토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 북한 간의 친선관 계가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개선의 환경이 조성됐다. 인도네시아 국가승인 이후 17년만인 1966년 12 월 한국 정부는 당시 주태국 이창희 공사(후에 인 도네시아 초대 총영사로 발령)를 자카르타에 파 견하여 한-인니 양국 간 영사관계 수립에 합의하 고 자카르타에 총영사관을 개설하였다.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62 I 한인뉴스 2024년 1월호 1966년 당시 한국 정부는 대외관계에 있어서 북 한이 외교관계를 체결하고 있는 국가와는 외교관 계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하고 있 는 만큼 북한 공관이 이미 상주하고 있던 자카르 타에 한국 총영사관을 개설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 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의 대동남아 외교 공세 강화로 북한이 위축되어 있고 1962년 3월에도 한국 경제사절단 입 국을 거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1961년 북한-인도네시아 영사관계수립과 1964년 대사 급 외교관계 수립 등 북한과의 관계가 빠르게 진 전됨에 따라 인도네시아 측이 남한과의 관계 구축 에 부담을 느낀 조치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문화·스포츠 차원에서는 일부 교류가 이루어졌다. 1962년 4월 이상백과 월터 정이 아 시아올림픽 상임위원회 참석을 위해 인도네시아 를 방문하였는데 1964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정상 간 교류에서는 1964년 수카르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데 이어 1965년 4월 김일성 주석 의 인도네시아 답방이 이루어졌다(김정일 동행). 북한과 비교해 남한은 1981년 6월 전두환 대통령 의 인도네시아 방문과 1982년 수하르토 대통령 의 방한이 정상 간 첫 교류였다 1964년 수카르노 대통령 방북 시 김일성 주석은 제국주의와 신식민주의에 맞서 압박을 받은 민족 들의 공동전선을 형성할 필요성에 관한 공동성명 을 발표하였다. 1965년 김일성 주석의 인도네시 아 방문은 그의 첫 번째 비공산국가 방문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북한이 인도네시아와의 외교관계 개 선에 두었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가 비동맹운동 창설의 기초가 되었던 1955년 반둥회의(Bandung Conference 또는 Asian-African Conference 1964년 말레이시아와의 대결정책 1965년 공산당 쿠데타 9.30정변 등. 수하르토 정권에서 1974년 다나카 일본 수상의 인도네시아 방문 시 발생한 반일 폭력시위인 말 라리(Malari)사태 1965년 인도 네시아 정변 사태로 북한의 활동이 극히 위축된 상태에 있어 한국 총영사관 개설이 적절할 것으 로 판단했다. 인도네시아는 2년 뒤인 1968년 서울에 총영사관 을 개설하고 수깜또 사이디만(Soekamto Sayidiman)을 초대 총영사로 파견하였다. 제2대 총 영사는 베니 무르다니(Leonardus Benny Moerdani)로 현지 한인들에게는 잘 알려진 인물이 며 1973년 양국 관계가 대사급을 격상하면서 대 리대사로 근무했다. ★ 지한파 베니 무르다니 장군… 인도네시아 현대 사의 주역 인도네시아가 독립 이후 격변기를 겪을 때마다 주 역으로 등장하는 베니 무르다니(1932~2004년) 장군은 한국과 매우 인연이 깊은 대표적인 지한파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1932년 중부자바 지역에서 태어난 베니 무르다 니는 1956년 육군 소위로 임관 1975년 동티모르 사태 1981 년 가루다항공 납치 사건 1981년 한국인 최초로 해외 유전개발사업에 뛰어든 서부 마두라 해상유전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수익이 나지 않아 경 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고 1984년 딴중쁘리옥 이 슬람사원 사태 등의 진압을 지휘한 주인공이다. 베니 무르다니는 1971년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 2대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한국 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3년여 동안 한국에 머물 면서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한국인과 친근하 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양국 관계가 대사급을 격상하면서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리대 사로 근무했다. 1974년 1월에 본국으로 귀임해서는 국방부 정보 국장 1시간 정도 만에 두 가지 서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후 경찰서에 돌 아와 운전면허 신청서를 작성했다. 신청서를 작성 한 후 접수 창구에 제출하면서 2000년대 후반 기부터 시작된 인도네시아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초 반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한인 슈퍼마켓은 무궁화를 시작으로 도라지 200개였으나 2017년에 각각 15 2020년까지 양국 간 교역액 1 335개와 13 400개로 2.5배 이상 증가했다. 이들 편의점에는 라면과 떡볶이 등 한 국 식품을 쉽게 볼 수 있다. 롯데몰 내부의 상설행사장 KOREA 360 8 I 한인뉴스 2024년 7월호 롯데마트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대표적인 한국기업이 투자한 유통기업이다. 롯데마트 는 2008년 한국 유통 기업 최초로 인도네시아에 진출했다. 인도네시아 대형마트 마크 로(Makro) 19개점을 인수하며 현지 사업을 확대했다. 현재 인도네시아에 매장 50곳 을 운영 중이다. 롯데마트는 인도네시아 유통업계 역시 온라인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 는 만큼 10대 도시 대형 점포와 중소 도시 거점 점포를 연결해 전국적인 물류 네트워크 로 활용할 방침이다. 앞서 롯데그룹은 2013년 6월 자카르타 메가꾸닝안 지역의 복합단 지인 ‘찌뿌뜨라 월드 자카르타’에 복합쇼핑몰인‘롯데쇼핑 에비뉴점’을 오픈했다. 유통산업에서 현지 한인이 운영하는 유통기업과 슈퍼마켓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유통 기업들은 먼 타국에서 한인들의 식생활을 책임져 주었을 뿐만 아니라 72점으로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1주일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덕분인지 합 격 점수를 보고 기분이 무척 좋았다. 경찰서 직원 들도 외국인이 시험장에 온 것도 신기한데 755개와 5 Bandung 지방법원을 통하 여 압류를 집행한 사례이다. 인도네시아 법원은 JIKS)을 위해 당시로써는 거 금인 13만 달러를 쾌척했다. 최 회장의 유전사업을 이어받은 아들인 정필립 코데코에너지 대 표는 2020년 1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큰 금액의 장학금을 JIKS에 기부하고 K-마트 등이 있으며 K-콘텐츠의 해외 진출을 확산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 이번 조사에서 한류 경험자의 절반 이상(50.7%)은 ‘향후 한국산 제품·서비스를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는 전년 대비 3.4%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제품·서비스별로는 식품(64.7%) 이 가장 높았으며 S자 코스 U.N. 협약 때문에 pocha)가 현지에서는 떡볶이 “Terima kasih”는 “terima”는 “받다”를 의미하고 “kasih”는 “사랑 “인샬라” 논설위원칼럼 논설위원 신성철 인도네시아 관광지에 가면 상인들의 호객 행위가 성가시다. 섣불리 대응하면 계속 따라 붙기 일쑤다. 이때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낮은 음성으로 “뜨리마 까시~”라고 말한다면 “한국 기업은 어떻게 인도네시아에 왔나?” 논설위원칼럼 논설위원 신성철 대한민국은 1960년대 외환보유고가 1억 달러 남짓할 정도로 국가재정이 형편없었던 시 기에 인도네시아에 최초로 해외직접투자(FDI)를 과감하게 실행했다. 해외직접투자를 결 정하는 데는 많은 요인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대한민국은 왜 인도네시아를 선택했을까? 해외직접투자를 하려면 기업이 갖고 있는 인력 각 지역 경 찰서에 위치한 운전면허 시험장에 방문해 시험을 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거주하던 지역에 있는 운전면허 취득이 가능한 지역 경찰서 위치 를 알려줬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감사합니다)이다. 이 말은 누군가가 해준 도움 거 대 중국자본이 한식당 사업에 뛰어들면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소규모 한식당이 타격을 받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어 해법으로 일본이나 태국처럼 자국 식당 인증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그 렇다면 인도네시아 상황은 어떨까? 인도네시아에서도 자카르타 결과는 예상대로 불합격이었다. 시험에 떨어 진 후 경비가 얼마가 들더라도 상대방의 버릇을 고쳐 놓겠다는 표현을 쉽게 하며 돈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잘 믿어지지 않 는 말도 쉽게 하는 경향이 있으며 경영 등 유무형의 자산뿐 만 아니라 투자국의 자원과 노동력 경영 등 유무형의 자산뿐 만 아니라 투자국의 자원과 노동력 경제개발 5개 년 계획을 세워 잘살아 보겠다는 용기를 낼 무렵인 1963년 최 회장은 한국남방개발을 설립해 우여곡절 끝에 1968년에 대한민국 최초 해외투자 기업을 만들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전체 외화보유액이 5천 달러를 밑돌았을 때 경찰 혹은 군인 등을 보내 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근년에는 변호사와 인상이 험한 사람이 한 조가 되어 채무자의 회사나 숙소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외국인이 이 방법을 쓸 때 는 자기도 똑 같이 당할 수 있다는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인도네시아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 은 더욱 그렇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일반법원에 민사소송으로 해결하는 경우 대기업이나 성실한 기업인등이 취하고 있는 적법 한 방법이다. 문제를 실정법으로 해결하겠다는 바 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공정한 판결 한인뉴스 2025년 4월호 I 65 이 승 민 변호사 . 관재사 yisngmin@gmail.com YSM & PARTNERS 원의 판결문을 인도네시아의 법원을 통하여 강제 집행할 수 있어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 (1) 인도네시아한인회(*인도네시아 재단법인)가 독자적으로 혹은 인도네시아한인상공회의소(*인 도네시아 재단법인)가 독자적으로 혹은 한인회와 상공회의소가 공동으로 새로운 재단법인을 설립 하여 법인자격을 취득하고 이 재단법인이 인도네 시아 한인중재원 (Badan Arbitrase Hanin Indonesia)/BAHI)을 설립하여 법인 자격을 취득하고 경찰서에 다시 가지 말라 고 하셨다. 나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다만 경찰서에 오기 전 미리 가져온 여권 경찰서에서 무슨 일이 있었 냐고 물었다. 경찰서에서 무슨 이유로 회사로 전 화했는지 경찰서에서 실제로 자동차 운전면허 실기시험을 봐서 합격자를 본 적 있냐고 물었다. 본 적이 있다 고 했다. 어떻게 합격했냐고 물었다. 젊은 경찰관 이 답하기를 고객들에게 단순한 외식 이상의 감동을 준다. 인도네시 아에서 한식에 대한 관심을 촉발한 요인 중 하나는 K-드라마와 K-팝으로 대표되는 한류 콘텐 츠의 인기였다. 한인뉴스 2024년 12월호 I 39 한편 자카르타에서 이동하다가 보면 한국음식을 파는 한식당인데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름의 상 호와 한국어 철자법이 틀린 광고판 그리고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사용하지 않는 인테리어 등 뭔 가 낯선 느낌의 한식당을 종종 마주친다. 이들 식당의 차림표에는 서울의 명동 거리에서 본듯한 메뉴가 적혀 있지만 실제로 식탁에 차려진 음식 중에는 한식이라 부르기 어려운 음식들도 있다. 현지인이 운영하는 한식당: 기회와 도전 인도네시아에는 과거부터 현지인이 투자해서 만든 한식당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외식업을 하는 현지 사업가들이 한식당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자카르타를 포함한 인도네시아 외식업계에서 화 교 자본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이들이 자본력과 현지화 능력을 바탕으로 한식당 사업에 뛰어들 며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첫번째는 화교는 대규모 자본과 현지 식당 운영 노하우를 더 해 한식당을 대형화와 기업화 하고 있고 공격적인 소셜미디어(SNS) 마케팅으로 인해 정통 한식당보다 상위에서 검색되는 점 공정한 판결 이 기대되어 장기적으로 봐서 한인 간의 분쟁이 감 소할 것으로 보며 관계공무원 에게 뒷돈을 주고 상대를 강제출국 시키려 한다. 더러는 강제출국의 목적을 이루는 경우도 있지만 대게는 상대도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피하거나 일 단 출국했다가 재입국한다. 입국금지자 명단에 올 리게 하더라도 푸는 것이 크게 힘이 드는 사항이 아니므로. 일시적으로 화풀이는 될 수 있을지 몰라 도 교내 나래홀 강당 앞에 최계월 회장 흉상을 설치했다. 최 회장은 국내에서는 사업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라. 안 에 없는 것이 그곳에 있다. 나가면 산다”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이 후 해외자원개발에 매진해온 고인 삶의 궤적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한-인니 관계가 지금 과 같이 뿌리 깊게 발전할 수 있는 데에는 최 회장의 기여가 적지 않다. 교통 유도용 꼬깔콘 을 한 번이라도 건드리면 탈락이라고 했다. 시험 감독관이 세운 교통 유도용 꼬깔콘이 차량 한 대 가 겨우 지나갈 만큼 촘촘했기 때문에 직진으로 코스를 통과하고 후진으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 오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시험감독관에게 시험 규칙에 대해 재차 물었다. 시험감독관은 맞다고 답변했다. 나는 시험감독관 에게 시범을 한번 보여 주면 군말 없이 시험을 보 겠다고 했다. 시험감독관이 시험용 차량에 탑승했 다. 시험용 차량은 한국으로 치면 봉고차와 비슷 한 종류였다. 시험감독관은 직진 기어로 시험 코 스를 모두 통과하고 국경을 자기 보호선으로 생각하고 불응했다가 국내총생산(GDP)에서 민간소비가 55%가량 차지할 만큼 탄탄한 내수시장은 유통 서비스업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을 통해 한국 음식문화를 접한 인도 네시아 10~20대의 한식에 대한 반응이 가장 뜨겁다. 팬데믹 기간에 떡볶이로 대표되 는 K-분식의 소비가 크게 늘었다.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 음식으로 는 떡볶이와 김밥을 꼽을 수 있다. 떡볶이의 맵고 짜고 단맛은 인도네시아 현지인 입맛에 잘 맞으며 국방부 장관 등 핵심 요직을 맡았던 베니 장군은 수하르토 정부의 군부 실세로 한국기업을 후원했으며 국방부 장관 등 핵심 요직을 맡았다. 수하르토 정부의 군부 실세였던 베니 장 군은 인도네시아 한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한국 기업을 후원했으며 국제 간이니까 괜찮겠지 권유에 대한 정중한 거절로 “띠닥 뜨리마 까시”(Tidak terima kasih) 또는 “뜨 리마 까시”를 쓸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가장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뜨리마 까시”(Terima Kasih 궐 석중재판결을 맞아 규모가 큰 식당은 간단하게 식사할 수 있는 홀과 다양한 크기의 프라이빗 룸을 구비하고 있다. SCBD에 인접한 세노빠띠 지역에는 일식당과 이태리 식당 등 외국계 식당이 많았는데 그 강의를 여러 번 들으면 합 격할 수 있을 거라고 알려줬다. 집으로 돌아와 운 전면허 시험에 전념했다. 1주일 후 다시 면허 시험장에 갔다. 70점이 합 격선이었는데 그 문제점으로 정체불명의 한식과 한식의 이미지 왜곡 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문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신자가 85% 이상인 인도네시아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인샬라”(Insya Allah)라는 말이 있다. “신이 허락한다면”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인샬라”는 이행 여부가 불투명한 약속이나 기대하는 바를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당장 결정하기 어렵거나 본인이 결정 권한 밖에 있다는 의미를 에둘러 표현할 때 많이 사용 할 뿐만 아니라 일상 대화에서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인샬라”라고 말할 때 그 중 인구의 45%인 약 1억2천만 명의 자바족 이 자바섬 중부와 동부에 살고 있고 그냥 놔두지 말고 그동안 봐왔던 한국인에게서 볼 수 없었던 반응에 놀란 건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자카르타에서 생겨났다가 없어진 많 은 한식당을 보면 시장(소비자)의 변별 능력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은 맛없고 서비스 40 I 한인뉴스 2024년 12월호 가 나쁜 한식당은 스스로 거른다. 다만 한식당이라는 장르가 결정된 만큼 한식의 정체성과 품질 을 일정 수준 유지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과 한국식품이 한식당 사업에서 배제되지 않고 협력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한국인 조리사와 매니저가 참여해 정통성을 강화하고 그들의 말씨 나 표정을 순간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면 그들의 문화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속내를 알 수 없는 “인샬라”를 듣는 순간 그리고 어떻게 내 신상을 알고 회사로 연락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같이 운전면허 시 험장에 갔던 운전기사가 경찰에게 내가 어느 회사 에 다니는지 이야기한 것 같았다. 무슨 문제가 있 느냐고 총괄 부장님께 되물었다. 총괄 부장님께서 설명하시길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법은 아니다. (3).상대의 근무 장소 혹은 숙소에 해결사를 보내 공포심을 조성하여 목적은 이뤄보려는 사람들도 있다. 옛날에는 폭력배 근심 글로벌 기업가정신 금전거래 분쟁 혹은 투자 분쟁 등 채권채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도네시아 한인들 이나 한국기업들이 통상 기울이는 노력 채권을 회수하려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며 기계 값 지급 피청구를 받아 기술 긴장감 등을 감추려 할 때이다. 후자의 경우 인도 네시아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무시당한다거나 뻔뻔하다고 느 끼고 화가 날 수도 있다. 인도네시아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조차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워하며 친근하게 다가 온다. 이들의 환대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신뢰를 쌓기 위해 기다림이 필요하다. 인도네시아 격언에 “비아르 람밧 아살 슬라맛”(Biar lambat asal selamat)이라는 말이 있다. “늦 더라도 확실한 게 낫다”라는 이 격언은 한국인의 습성인 “빨리빨리”와 대비되는 인도네 시아 사람들의 생활철학이다. 느림의 미학인 시간을 두고 관찰하며 신뢰를 쌓아가는 이들 을 태도에 익숙해져야 인도네시아인들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 (끝) 꾸랑따우 (kurang tahu 나는 그 렇다고 답했다. 운전면허 비용을 회사에서 지원 해 주겠다고 하시면서 나는 당시 거주하고 있던 지역 경찰서를 찾아갔다. 인도네시아 현지인 들은 외국인이 면허 시험장 접수 창구에서 어슬렁 거리는 것을 신기해하는 분위기였다. 경찰서 직원 이 내게 다가와 무슨 일로 왔느냐고 친절하게 물어 봤다. 나는 운전면허를 신청하러 왔다고 했다. 담 당 직원이 운전면허 접수 서류를 안내하면서 나는 원하는 자리에 앉아 시험을 보면 된다고 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 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과 인도네시아 두 국가에서 진짜 운전 면허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진짜 운전 면허증이란 나를 경찰서 본관 건물 2층에 있는 한 사무실로 안 내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상 대화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인샬라”는 모든 결정에 신중한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습성을 나타낸다. 동남아시아 해양부에 유치한 인도네시아는 전통적으로 바다를 통한 해상무 역을 통한 경제 활동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이러한 환경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은 만 큼 신에 의존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7 인도네시아는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인근 왕국 간 또는 멀리 인도 내 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도 돈을 주고 가짜 운전면 허증을 구매했다. 그리고 모두가 가짜 운전면허를 진짜 운전면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가짜 운전면허증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 이 들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싶었다. 평소 업무적으로 알고 지내던 관공서 업무를 담당하는 에이전트에게 진짜 운전 면허를 취득하는 방법에 관해 물어봤다. 내가 저 렴하게 면허를 취득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오해 했는지 내 가 시험 보는 걸 지켜보던 젊은 경찰관 친구가 내 게 말을 걸었다. 그 친구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내가 경 찰서에서 큰소리로 200만 루피아를 줘야 면허증 을 발급해 주는 거냐고 되물었던 것이 화근이 된 모양이었다. 내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 에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들을 총괄 부장님께 설 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으신 한국인 총괄 부장님은 내게 또 면허시험을 보러 갈 것이냐고 물었고 내가 잘못된 행동을 하 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 시험 을 치르는 동안 시험장에서 실기시험을 본 사람이 나 혼자였던 걸 생각해 보면 내게 왜 계속 시험을 보러 오냐고 뉴서울 니켈 등 천연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은 주요 자원을 수입 하지 않고서는 성장할 수 없는 구조적인 경제 취약성을 갖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 립경제체제를 구축해야하는 당면과제를 갖고 있다. 1962년부터 시작한 우리나라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산업화의 초석을 다지는 시기이다. 특히 다시 실기 시험을 보는 공터로 갔다. 시험감독관은 나 한 사 람을 위해 여러 번 교통 유도용 꼬깔콘을 세워서 그런지 당사자들이 화해 당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체육 장관 말라디(Maladi)와의 면담에서 수카르노 대 통령에게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건의하겠다 는 약속을 받아낸다. 1962년 5월에는 한국축구 단이 방문하여 친선경기가 열렸다. 북한-인도네시아 관계가 진전되는 상황 하에서 남한 정부 고위인사의 인도네시아 방문이 이루어 지지는 못했으나 당혹스러움 당황한 표정을 보이며 방 금 내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고 지금 당장 본 인 사무실에서 나가라고 했다. 사무실에서 나와 1층에 있는 운전면허 시험 접 수장으로 갔다. 재시험 접수를 하고 싶다고 접수 창구에 물어보니 대승적 기업관 대한민국의 대법원 의 확정판결문처럼 처리해 줘야 하는 의무가 주 어져 있다. 한국 혹은 인도네시아 법원의 판결문 은 상대국가에서 집행할 수 없으나 대한상 사중재원에 대한상 사중재원으로부터 심리에 출두요구를 받았으나 대한상사중재원의 판결을 인 도네시아 대법원의 확정판결문처럼 처리해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다. 마찬가지로 더 공정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 (2) 신속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 단심제이므로 중재 규칙이 정한대로 빠른 판결을 기대 할 수 있다. (3) 경비가 저렴하다. 중재 규칙에 정해진 공식중 재비만 지급하면 된다. (4) 인도네시아 사법기관에서 더 이상 추근거리지 않고 물러난다. 자주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마법의 말 한마디이다. 물론 돈 주고 면허증을 사 는 게 진짜 인도네시아 면허증이 아닌가 하는 생 각도 들었다. 그런 고민을 하며 돌아가던 길에 돈 주고 사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돈 주고 면허를 사는 게 맞냐고 되물었다.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두 번째는 신체검사 증서였다. 경찰서를 여러 번 방문하기가 어려워 떠르스라(terserah 떡과 유사한 인도네시아 음식(론똥)이 있어 식감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 술집인 포장마차(포차 또는 친절한 행동에 대해 고마움을 표 현하는 방식이다. 직역하자면 띠닥따우(tidak tahu 모른다) 롯데몰 지하에 조성된 ‘골목길상회’는 70~80년대 한 국 골목 문화를 재현해 큰 인기를 끌며 몇 가지 다른 의미 없는 이야기를 더 하다 가 200만 루피아를 주면 면허증을 발급해 주겠다 고 말했다. 나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200만 루 피아를 줘야 면허증을 주는 거냐고 되물었다. 그 경찰관은 살짝 흥분한 내 얼굴을 보고 놀란 건지 모두 가짜 운전면허증에 대한 방법만 알 려줬다. 왜 가짜 운전면허만 있냐고 관공서 업무 를 주로 담당하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모쪼록) 무다무다한(mudah-mudahan 뭉낀(mungkin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원유 확보와 새로운 유전 개발에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최 회장은 수하르토 대 통령의 최측근인 베니 무르다니 장군의 인맥을 활용해 서부 마두라 광구 유전개발 사업을 성 사시켰다. 베니 장군은1969~1973년 기간에 주한 총영사로 근무했던 지한파이다. 앞서 최 회장은 1970년대 석유파동 때 수하르토 대통령에게 부탁해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으 로 가던 유조선 뱃머리를 돌려 한국에 공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니마켓은 급증하는 추세다. 인도네시아 1위와 2위를 달리는 미니마켓인 인도마 렛과 알파마트는 2011년에 매장수가 각각 5 미원인도네시아 민망 바꾸면 안 된다고 하던 직진 기어와 후진 기어를 여러 번 변 경하고 교통 유도용 꼬깔콘을 여러 번 건드린 후 에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시험감독관에게 시험 규칙에 대해 다시 물었다. 시험감독관은 씩 50 I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웃으면서 맞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시험을 보겠 다고 했다. 내 예상대로 직진으로 갈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반드시 아무리 늦어도 중재 첫 심 리 일까지 맞 중재청구를 해야 한다. 아. 궐석 중재판결 피청구인이 중개심리에 불참 시 중재부는 궐석 판결을 내릴 수 있다. 궐석판결에 대하여 피청구 인은 판결내용 피통지 일로부터 14일내에 궐석판 결에 대하여 재심청구를 낼 수 있다. 14일 이내에 재심청구를 하지 않으면 궐석판결문의 내용이 법 원의 확정판결과 같은 법적효력을 발생한다. 한국에 있는 피청구인이 BANl로부터 중재심리에 출두요구서를 받고 베트남(82.9%) 등 주 로 동남아시아에서 호감도가 높았다. 한인뉴스 2024년 7월호 I 7 인도네시아 2억8천만 인구 가운데 생산가능인구는 전체 인구의 68% 변호사를 선임해서 대응 할 수 도 있다. (다음 호에 계속) 보증 등에서 발생하는 모든 지급 의무를 뜻한다. 채무지불의무연기 선고 청구는 등 록일로부터 최장 20(이십)일 이내에 판결을 해야 하며 상고나 재심청구를 불허하며. 파산선고 청구 는 등록일로부터 60(육십)일 이내에 판결을 해야 하며 대법원에 상고를 허용하며 대법원의 판결도 60(육십)일 이내에 내려져야 한다. 채무지불의무 연기 선고 제도와 파산선고 제도는 채권자의 입장 에서는 제도적으로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법 적제도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채무자의 입장에서 는 공정하지 못한 제도로 인식되어 있다. 나. 인도네시아 한인중재원 설립이 가능한가? 현지 제도상으로 가능하다. 소송 대체 방법으로 분 쟁해결에 관한 1999년 법률 제30호가 그 법적근 거이다. 이 법률에 근거하여 한인중재원을 설립하 고 부끄러움 북한은 불참)를 주 도하면서부터 북한은 인도네시아의 외교적 중요 성을 더욱 인식하게 되었다. 한국-인도네시아 우정의 50년 여정 1964년 인니여당 간사장 수비안또와 수카르노대통령양녀 사디킨여사 박정희대통령 예방 한인뉴스 2024년 1월호 I 61 1956년 김일성 주석은 반둥회의에서 채택된 원 칙들을 언급하면서 비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관 계 유지의 중요성과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 관계의 시작… 총영사관 개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북한과 인도네 시아 관계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 적으로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발전은 속도를 내 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 양국 간 고위급 인사 교류가 처음으로 이루어 지는 등 양국 간 관계개선이 시작되었다. 1962년 7월 6일 한국 외무부 문서에는 1960년 6월 인도네시아 측은 한국 친선사절단 방문을 거 부하였으며 분식 메뉴를 특화한 곳 분쟁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다. (6) 신용이 불량할 기업인은 인도네시아에서 사 업 활동이 어려워지게 될 것이므로 도태될 것이다. (7) 장기적으로 인도네시아 한인사회 정화 효과 가 있을 것이다. (8) 성실한 기업풍토가 조성되는데 기여할 것으 로 기대된다. 마. 인도네시아에서 살고 있는 한인은 신분이나 소 속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한인공동체에 속한다. 공 동체로서 이익과 객체의 이익을 위해 한인중재원 이 필요하다고 보며 브로커는 그 가격에 일정 마 진을 덧붙여 운전면허를 알선한다고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한국인은 브로커에게 구매한 가짜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었다. 윤리 경영을 최우선 으로 내건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지인들도 비정상이 정 상으로 인정받는 게 아닌 사 적관계와 업무관계를 혼돈하여 감정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사우디아라비아(74.5%) 순이다. 한국 문화콘텐츠를 경험한 인도네시아인 의 대다수는 한류가 한국 제품·서비스 이용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해 K-콘텐츠 소비 가 연관 산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번 조사는 26개국의 한국 문화콘텐츠 경험자 2만5천명을 대상으로 2023년 11월 10~30일 온라인 설문 방식으 로 진행됐다. 문체부는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K-박람회’를 여 는 등 삼성물산 등 종 합상사가 진출했다. 인도네시아 정관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베니 무르다니는 1971년 당시 육군 대령으로 제2대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는다. 그는 3 년여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한국인과 친근하게 지낸 것으로 알 려져 있다. 1973년 양국 관계가 대사급을 격상하면서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리대사로 근 무했다. 1974년 1월에 본국으로 귀임해서는 국방부 정보국장 상거래 분쟁이나 금전거래 분쟁이나 투자 분쟁 을 한인끼리 해결할 수 있다. 물론 한인 상사 중재 66 I 한인뉴스 2025년 4월호 에 상대방을 비방하는 여론은 조성하는 경우도 더러 있으며 석탄 선물 세 번 째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소비자들은 전통시장보다는 쇼핑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현대적인 유통 채널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2019년 현재 인도 네시아에서 현대적인 유통 채널 가운데 하이퍼마켓과 미니마켓(편의점)은 확산 추세인 반면 소비자들이 일정 기준의 한식을 제공하는 식당과 그렇지 않은 식당을 구분하 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가 협력해 해외 한식당 지원과 홍보를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통 한식 레시피와 조리법을 알리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수라바야 등 주요 도시뿐만 아니라 서부자바의 가룻 같은 중소도시에서도 한국인이 아닌 현지인이 하는 한식당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비교적 큰 자본으로 접근하는 현지인은 한식당 사업에서 중요한 행위자가 되고 있다. 자카르타 한식당은 지난 수년 간 양적으로 질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적으로 K푸드 열풍이 거센 지역이고 수수료를 적게 받는 친한 브로커를 소개 해 주겠다는 답변밖에 받을 수 없었다. 한국인 지 인을 통해서는 방법을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 는 수 없이 인도네시아 현지 지인들에게 진짜 운 전면허를 취득하는 방법을 물어봤다. 인도네시아 현지 지인들도 돈을 주고 운전면허증을 구매했고 수하르토 대통령 등 정관계 고위급 인사들과 교분을 쌓았 다. 개발 초기인 1968년 인도네시아에 대한민국 해병대 상륙사단 출신 부사관 120명과 함께 맹수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원시 정글에 들어가 원목개발을 했다. 임상조사와 위급환자 후송 등 목적으로 1969년 한국인 최초로 경비행기를 구매하는 등 수많은 일화를 남길 만큼 생각과 행동이 보통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한인뉴스 2024년 9월호 I 7 최 회장은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했던 애국자이다. 동서냉전기인 1964년 북한은 인도네시아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할 정도로 대한민국을 압도했고 수하르토의 사위인 쁘라보워 수비안또와의 경 쟁과 수하르토 정권과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술집까지 다양한 형태의 한식당이 등장하고 있다. 자카르타의 한식당은 단순히 음식을 제공하는 공간을 넘어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체 험의 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예컨대 슈퍼마켓은 축소되고 있다. 2018년에만 헤로 슈퍼마켓이 26개 점포가 문을 닫았 고 시 간이 지나고서야 적지 않은 경비와 노력과 시간이 소모된 것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1) 민사상의 계약위반을 수사기관에 형사고발하 여 수사관을 통하여 상대에게 심신양면의 압박을 가하여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 방법은 물의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문제가 해결되 기 보다는 양측 다 경제적으로 불이익을 겪고 시간이 될 때마다 실기시험을 보러 갔 다. 다섯 번째 시험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다. 지인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진짜 운전면허증 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국인이든 인도네 시아 현지인이든 다들 나를 괴짜처럼 바라본다. 아직 인도네시아에서는 가짜 운전면허증이 진짜 운전면허증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작은 씨앗을 뿌렸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다. 그리고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더 많이 나타 나서 씨앗을 계속 뿌려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 다면 언젠가는 진짜 운전면허증이 인정받는 세상 이 좀 더 빨리 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인도 네시아에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시험 감독관을 통해 어떻게 필기시험을 준 비해야 하는지 물었고 시험감독관은 시험을 치렀 던 공터에 붙어 있는 사무실로 나를 안내했다. 도 착한 사무실 책상 위에는 탈락이라는 붉은색 도장 이 찍혀 있는 내 운전면허 접수증이 있었다. 시험 보기 전에 이미 도장을 찍어 놓은 것 같았다. 시험 감독관은 붉은색 도장이 찍힌 접수증을 돌려주며 시험감독관이 나를 공 터 옆 사무실로 안내했다. 어제와 같이 시험 접수 증에는 붉은색 불합격 도장이 미리 찍혀 있었다. 붉은색 도장을 보자 시험을 본 당일에는 재시험 접 수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다음 주 쉬는 날에 다시 방문하기로 마음먹고 경찰서를 나섰다. 다음 날 회사에 출근했다. 출근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신의 뜻대로) 등이 있다. 사실대로 말해서 상대를 언짢게 하는 걸 원치 않거나 말하기 곤란하다고 생각할 때는 부 모 또는 가족이 아프거나 일이 생겨서 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때때로 실수하거나 무안한 마음이 들 때 실제로 현지인 자본과 한국인 운영자가 협력하는 한식당들도 여럿이다. 한국 정부와 민간 단체가 협력해 정통 한식당과 퓨전 한식당을 구분하고 아마도) 알쏭달쏭 말 한마디 “뜨리마 까시” 알아서 하세요) 양국 간 에너지·자원 분야 협 력을 활성화하고 새로운 투자 사업을 발굴하기 위한 ‘제1차 한-인니 포럼’이 개최됐다. 이명박 대통령(2008~2013년)과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2004~2014년) 간 관 계는 각별했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재임 중인 2011년 ‘인도네시아 경제개발 마스터플랜 (MP3EI)’을 수립해 양국의 우호 양국의 협력과 신뢰 관계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5년 이후 대한민국은 자원개발을 뛰어넘어 신 발·봉제 등 노동집약산업을 필두로 제조업 부문에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11월 8일부터 닷새 동안 인도네시아를 공식방문했다. 노 대통령 과 수하르토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서부수마트라 주도 빠당(Padang) 시 도로 건설 등 인 프라 구축을 한국 정부가 유상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어느 한 쪽이 코 너로 몰리기 전에는 협상이 쉽지 않으며 어떻게 볼 것인가?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변화의 시대 여러 번 방문해서 그런지 인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아침 먹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고 옷을 말끔히 차려입은 남자가 내게 의자에 잠깐 앉으라고 했다. 직급이 높은 경찰관 같았다. 그 경찰관은 내게 간단한 안부를 물은 후 외교 및 경제 유발 효과 등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한국이 한류 문 화를 통해 인도네시아와 다양한 온·오프라인 교류를 하며 선한 영향력을 펼쳐서 더 나 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우리 당대 뿐 만 아니라 후손들 에게도 유익한 제도가 될 것으로 믿는다. (2). 상 기 중재비는 표만 보면 비싸게 생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법원(*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 재심청구)에서 현실적으로 들어가는 경비에 비하 면 청구인이나 피청구인의 부담이 크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3) 중재비 선납원칙 중재비를 완납한 후에 중재가 시작된다. 처음 에 양자에게 상기 금액의 50%씩 납부하도륵 통지 가 가며 운 전면허증 취득 방법에 대해 알아봤다. 먼저 주변 지인들에게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는 방법을 물었 다. 나는 진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는 방법을 물 었지만 운전면허를 이미 취득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필기 시험장에 있던 직원이 내 운전면허 신청서 에 필기시험 합격 도장을 찍어줬다. 처음 필기시 험을 접수했던 접수 창구로 가서 실기시험을 접수 했다. 필기시험과 동일하게 소정의 실기시험 인지 비용을 지불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10분 정도 기 다리니 실기시험 담당 경찰관이 나를 실기시험장 으로 안내했다. 한국에서 운전 경력이 몇 년 있었 기 때문에 실기시험에는 자신이 있었다. 시험 장소는 경찰서 내에 위치한 공터였다. 한국 처럼 별도의 시험 장소가 세팅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도착하자 시험감독관은 공터에 교통 유도용 꼬깔콘을 세우기 시작했다. 꼬깔콘 간의 간격은 시험감독관 마음대로였다. 시험감독관은 눈대중 으로 꼬깔콘을 모두 세운 이후 내게 시험 규칙에 대해 설명했다. 시험 항목은 단순했다. 일자 코스 운전이 하고 싶어졌다. 차량을 구매하기 전 웃거나 미소를 짓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유머 감각 등을 두루 갖췄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부터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 유전 무죄 무전유죄 사고방식이 지배적이며 유튜브 등 을 활용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해서 ‘핫플’ 이미지를 만들어 현지인 고객을 끌어당기는 반면 한 국인 사업자들은 상대적으로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마케팅에 약한 모습이다. 한식당 사업에 현지인 참여를 긍정적으로 이끌려면 현지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유튜브에 운전면허 시험 관련 강의가 있으며 음식점에서 식사(61.4%) 응답자 57.9%가 한류가 한국 제품·서비스 이용 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고 의 류 구매(52.8%) 등이 높은 소비 의향을 보였다. 한국 문화콘텐츠에 대한 호감도 조사 에서 가장 높은 국가는 인도네시아이다. ‘마음에 든다’(호감)라고 답한 비율은 인도 네시아(86.3%) 이 렇게 맺은 관계는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인도네시아에는 300여 종족이 있으며 이 중 수디르만 상업 중심지구(SCBD) 주변에 50여 개가 분포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한식 당은 통계를 잡기 어려울 만큼 많으며 이 착각 때문에 피해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거 꾸로 인도네시아에 있는 사람이 한국에 있는 대한 상사중재원으로부터 중재심리에 출두요구를 받고 불참 시에도 똑같은 결과가 발생된다. 사례를 들면 Bandung에 있는 인도네시아 기업인 이 한국에 있는 기계를 판 한국회사부터 이 한인중재원을 통하 여 한인 간 혹은 한인기업 간 상거래 분쟁이나 금 전거래 분쟁 혹은 투자 분쟁을 인도네시아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직접 해결할 수 있을까? 가. 상거래 분쟁 이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으로는 최초의 한국 방문으로 이들 유통회사들은 인도네시아 대도시 식품 유통 점포에 납품 하거나 한국인이 근무하는 지방에 있는 회사에 한국 식품을 공급하고 있다. 한류에 깊이가 더해지고 인도네시아인이 함께 즐길 수 있을 만큼 확산하면서 그 영향력 도 커졌다. 이제는 지속가능한 쌍방향 문화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을 찾자는 데 초 점이 맞춰지고 있다. 양국 모두에게 자국의 문화는 소중한 자산일 뿐만 아니라 자국민 의 정체성 고양 이로 인해 코데코의 사세가 기울었다. 초대 재인도네시아 한인회장을 맡은 최계월 회장은 교육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인도네시아 에 유치원 이미 결과가 정해진 시험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어 1962년 3월에 우리 경제사절단 입국을 거부한 것으로 1962년 7월 한국 외무부 문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1961년 북한과 인도네시아는 영사관계 수립과 1964년 대사관계를 수립하는 등 외교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인도네시아 는 대한민국과의 관계 구축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1963년 일본과 인도네시아에서 정관계 인맥이 있던 최계월 ㈜한국남 방개발(현 KODECO) 회장의 주선으로 도쿄에서 수카르노 대통령과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한인뉴스 2024년 6월호 I 7 부장과의 만남이 극적으로 성사시키면서 양국 관계는 급물살을 탔다. 1965년 인도네시아 정변(G30S)으로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이 붕괴되고 친미·반공 노선의 수하르토 정권 이 들어서면서 인도네시아 북한 간의 외교관계가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과 인도네시 아 관계개선의 환경이 조성됐다. 1966년 12월 자카르타에 대한민국 총영사관이 설립됐다. 대사급 외교관계가 수립되기 이전인 1968년 대한민국 최초 해외직접투자가 인도네시아에 서 이루어지면서 현지에서 우리 기업이 위대한 첫발을 내딛는다. 1973년 9월 18일 이어 베트남 (78.6%) 이젠 한류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삶의 일부가 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이 2024년 4월 발표한‘2024 해외 한류 실태조사’(2023년 기준)에 따르면 인 도네시아 중재원이 어떻게 한국에 있는 나를 강제 조처 하겠나...라고 생각하면 대단한 착각이며 인 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초석이라는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고 인도 네시아 한인상공회의소장 인도(84.5%) 인도네시 아이슬람지도자협의회(Maielis Ulama Indonesia/ MUl)에서 설립한 이슬람 중재원 (Badan Arbitrase Muamalat Indonesia/BAMUl)과 이 분야 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설립한 독립분쟁해결 센터 (Pusat Penyelesaian Sengketa Independen/ IDRC)가 있다. 이 중재원들은 모두 국가기관 에서 설립하지 않고 민간단체에서 설립했으며 인도네시아 대법원장의 재가와 대통령의 재 가를 받으면 인도네시아 문화와 제품을 소비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 울이기를 희망한다.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한인들의 위상이 바르게 세워 질 것이다. (5) 중재원의 판결내용이 한인사회에 알려짐으로 써 인도네시아 안에서도 이것이 익숙하 지 않은 다른 종족이나 외국인들은 자바사람들을 음흉하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일상 대화에서 거북하게 느껴지는 단어들도 이해가 필요하다. 인도네시아인들이 부정적 인 결과를 우려해 책임을 회피하거나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로 ‘끼라 끼라(Kira-kira 대략) 인도네시아 에서 운전면허는 각 지역 경찰서의 주요 수입원이 라고 한다. 각 지역 경찰서가 브로커에게 정해진 상납금을 제시하고 인도네시아 한인회장 인도네시아에서 잔뼈가 굵은 한국인 총괄 부장님 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어제 경찰서에서 회사 로 연락이 왔다면서 인도네시아에서는 원 래 돈을 주고 면허를 사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 다. 원래 그렇다는 말을 들을수록 가짜 운전면허 증에 대한 내 본능적인 거부감은 강해졌다. 다음 주 시간 되는 날에 시험을 다시 봐야겠다고 결심 하고 경찰서를 나섰다. 그 다음 주에 다시 시험장에 갔다. 시험장 접수 창구를 가니 인도네시아의 제5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89~1993년)에 한국의 자본 기술이 참여하기로 합의하였다. 또 한국 기업의 인도 네시아 진출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로 투자보장협정의 조기 타결 및 자원 공 동 개발을 장려하기로 했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인 2006년 12월에 양국 외교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 상돼 정치·경제·방산·문화·인적교류 등 전면적으로 확대된다. 2007년에는 인도네시 아 새로운 투자법이 제정되고 한-아세안 FTA 상품무역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한국 기업 의 대인도네시아 진출 환경이 더욱 개선되었다. 2007년 7월 유도요노 대통령이 국빈 방문 하여 대인도네시아 투자 관련 16개의 MOU가 서명되었고 인샬라(insya Allah 인스타 인지 비용을 지불하고 접 수 창구 의자에 앉아 있었다. 10분쯤 지났을 때 일단 피청구를 당하면 일본 정·재계와 돈독한 인맥이 있던 최 회장은 외교 수완을 발휘해 네덜란드가 아니라 인도네시아에 귀속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 을 한다. 이를 고맙게 여긴 수카르노 대통령은 1962년 최 회장을 인도네시아에 특별 초청했 고 일상적인 의미로는 “고맙습니다”에 더 가깝다. 또 의견이나 발 표를 마치고 맺음말로 “뜨리마 까시”라고 하면 무난하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어를 교육하는 고등교육기관 가운데 우리에게 잘 알려진 가자마다대 학교(UGM) 한국어학과와 인도네시아대학교(UI) 한국학과가 몇 년 전 학과명을 모두 한 국언어문화학과(Prodi Bahasa dan Kebudayaan Korea)로 바꿨다. 언어와 문화의 밀접 한 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언어는 문화를 반영하고 임 대차 있으면 더 좋고 없어도 되는 기관이 아니라 꼭 있어야 하는 기관이라고 본다. 한인중재원이 정상으로 가동된다면 자 체 중재 규칙을 만들어서 중재 판결을 내리고 자기는 옳으며 상대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 며 자기의 과실을 인정하는 경우가 드물며 자본 자원 자카르타는 그 중심에 있다.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카르타 전역의 한식당 수는 150여 개 잘 모른다) 잡채 와 불고기 등 현지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파는 간이식당 컨셉으로 확산되고 있다. 주류를 판매하는 포차도 있다. 새로운 한류 문화가 현지에 정착될 것으로 보인다. 소득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흩어져 거주하는 만큼 자바문화가 주 류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자바사람들의 신앙이자 생활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끄자웬 (Kejawen)이 이들의 삶의 저변에 깔려 있다. 이들은‘아니다’라는 의미의 띠닥(tidak) 이라는 부정어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방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회피한다. 무엇인가 를 사양할 때조차 인도네시아인은 뜨리마까시(감사합니다)라고 말하거나 미소를 짓는다. 따라서 자바인들과 대화할 때‘야’(ya 또는 iya)가 진정한 의미의 ‘예’인지 ‘아니오’ 인지를 구별하기 위해 상황이나 표정을 살펴야 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젊은 경찰관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 다. 인도네시아 사람도 운전면허증을 돈 주고 사 는데 접수 에 필요한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증명 사진 정상 간 교류 등 관계 개선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북한-인도네시아 간에는 1958년 8월 주인도네 시아 북한 무역대표부가 개설되었고 인도네시아 예술사절단 북한 방문 정상이 정상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정식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필기시험 과 실기시험을 치르고 합격 점수를 받아 취득한 운전면허증이다. 한국에서는 진짜 운전면허를 취 득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두가 진짜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가짜 운전면허를 취득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이 없다. 내가 이야기하는 가짜 운전면허란 진짜 운전면허와 반대로 정식으로 운전면허 시험을 치 르지 않고 취득한 운전면허증을 말한다. 인도네시아에서 직장 생활을 한 지 1년쯤 됐을 때 정체성을 유지하는 곳 에 인증을 부여하는 방안도 고려해볼만 하다. 일본과 태국 그리고 이탈리아는 이미 자국 음식의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인증제를 도입했다. 각국은 자국산 식품을 사용해 자국의 요리법으로 음 식을 만드는 식당을 심사해서 인증 마크를 부여한다. 한식 역시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인 증제를 도입해서 정치적 환경 등 많은 요소들을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한 다. 대인도네시아 직접투자에는 정치·외교적 요인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글은 한국의 대 인도네시아 해외직접투자에서 크게 작용한 정치·외교정책적 요인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석유 제1장 한국-인도네시아 외교 50년 (편집자주) 한인뉴스는 2023년 9월 한국-인 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인도네시아 어판으로 발간한 책 “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 은”(“Merajut Persahabatan dan Memupuk Kepercayaan”)의 한글 원본을 12회에 걸쳐 연 재합니다. 1. 태동기(1949~1972년): 인도네시아 국가 승 인부터 외교 관계 수립 전까지 1) 남한과 북한과의 외교전… 초반의 열세 대한민국은 1948년 정부 수립에 따라 외국의 국 가 승인 및 자유우방과의 우호관계 증진에 1차적 목표를 두고 아시아 신생독립국과의 관계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외교 정책에 따라 한 국 정부는 1949년 12월 30일 신생독립국 인도네 시아의 국가를 승인을 하였다. 동서냉전기인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은 비공산권 및 제3세계에 대한 외교공세를 펼친다. 특히 비동맹운동 창설의 중심적 역할을 한 인도네시아와의 우호관계 구축에 매우 적극적 으로 나서게 된다. 이에 따라 북한-인도네시아 간 에는 외교관계 수립 제도적으로 합법적인 중재원이 될 수 있다. (2) 인도네시아한인회 회원과 인도네시아한인상 공회의소 회원 중에서 법률전문가와 1차 산업 전 문가와 2차 산업 전문가 및 3차 산업 전문가를 중 재위원으로 임명하고 제일 시원해 보이는 자리에 앉아 시 험을 봤다. 시험은 인도네시아어로만 되어 있었 고 조정 혹 은 중재를 통하여 스스로 상거래 분쟁이나 금전거 래 분쟁이나 투자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법적근 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 1999년 법률 제 30호 에 근거하여 설립되어 운용되고 있는 중재원은 인 도네시아 상공회의소(Kamar Dagang Indonesia/ KADIN)에서 설립한 인도네시아중재원(Badan Arbitrase Nasional Indonesia/BANl) 족자카르타 종 국에는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2) 경쟁업체나 분쟁상대방의 출입국관리법이나 노동법에 위배되는 사항을 밀고하고 주변에서 증명사진 촬영 및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었다. 내게 서류를 안내했던 직원은 경찰서 바로 맞은편에서 필요한 서류 두 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진짜 운전면허증 SIM Asli 남기훈 (PT HWA SEUNG INDONESIA) Kudus) <인도네시아 이야기> 공모전 수상작 일반부 최우수상 재인도네시아한인회장상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49 경찰서 건물 바로 맞은편에 증명사진 및 신체검사 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었고 주요 업종 협의회장과 Kotra Jakarta 관장과 재인도네시아 대한민국대 사관 대표 등을 고문으로 위촉하여 인도네시아 한 인중재원 운영에 관하여 자문을 받는다. (3) 준거법은 인도네시아법으로 하며 주차 세 가지 시험 코스를 모두 통과한 이후 주차 총 세 가지 항목에 대해 평가했다. 특이한 점은 직진으로 일자 코스 중 재(Arbitrase) (3) 인도네시아법 해설 (344회) (전호에서 계속) 9. 인도네시아 한인중재원 설립은 가능한가? 소송 대체 방법으로 분쟁해결(Alternative Dispute Resoution/ADR/Penyelesian Sengketa Alternatif)에 관한 법률 1999년 제 30 호는 법원 의 소송을 거치지 않고 중 재에 응해야 한다. 중재 대응은 소송과 달리 당사 자가 직접할 수 있으며 중국 중년쯤 되어 보 이는 중동의 상인들과 거 래하려면 이방인과 신뢰를 쌓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만큼 신뢰를 쌓아나가는 과정은 적 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는 신중한 태도이며 중재 위원들이 임의로 정할 수 있으므로 편리한 한국어 로 중재를 할 수 있다. (4) 인도네시아 한인중재원의 판결문은 인도네시 아 관할 지방법원에 등록하면 인도네시아에서 뿐 만 아니라 한국법원을 통하여 한국에서도 강제 집 행할 수 있다.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뉴욕협약에 가입한 전 세계 모든 회원국에서 강제집행이 가능 하다. 라. 인도네시아 한인중재원의 장점 (1) 당사자들과 중재 위원들이 비슷한 가치기준을 가진 한국인이며 중재규칙을 제정 하고 중재법 제28조에 근거하여 중재에 사 용하는 언어는 중재원의 판 결문은 양국 어디에서나 강제집행을 할 수 있으므 로 중화학공업에 이어 지식산업으로 다각적인 발전의 성과를 냈다. 이는 인 도네시아 등 국가들과 외교정책을 통한 각 시대별 산업시대에 필요한 자원을 수급하고 자 원보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시험을 보는 경찰서는 정 해진 규격 없이 시험감독관이 교통 유도용 꼬깔콘 을 마음대로 두기 때문에 시험을 통과하기가 어렵 다고 했다. 그러면서 합격했던 사람은 10번 정도 시험을 보러 온 사람이었고 채무자 기업 혹 은 채무자 개인에 대한 채무지불의무연기 혹은 파 산이 선고된 케이스도 있고 기각된 케이스도 있다. Pailit이나 PKPU 청구 요건은 i). 채무자에게 채 권자가 최소 2명이 있으며 ii). 두 채무 증 한 채무 가 만기 되어 있어야 하며 채권 존재 입증이 간단 해야 한다. 채무는 현금차용 뿐 아니라 상거래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노련하게 교통 유 도용 꼬깔콘을 세웠다. 꼬깔콘 간의 간격도 제법 일정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시험 결과는 전과 같 이 후진 기어를 놓고 후진하는 도중에 꼬깔콘을 건드려 탈락했다. 시험 보기 전 회사 울타리 내에서 회사 차량으 로 운전 연습을 장시간 해와서 그런지 처음 시험 봤을 때보다는 이동 거리가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합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세 번째 시험에 불합격하고 나니 천연가스 총 괄 부장님께 직급이 높아 보이는 경찰관에게 200 만 루피아를 제시받았던 일에 대해서는 경찰서 내 에서 일절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 다음 주에 경찰서에 다시 방문했다. 이전과 동일하게 접수처에 실기시험을 접수했다. 시험감 독관은 다시 공터에 교통 유도용 꼬깔콘을 세우고 시험을 보게 해줬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후진 기어를 넣고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다 교통 유도용 꼬깔콘을 건드렸다. 불합격이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불합격 통보를 받자 최 회장의 산림개발 사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코데코는 대한민국 1호 해외투자에 이어 1981년 ‘해외 유전개발 제1호’라는 새 역사도 썼 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중동발 오일쇼크로 한국 경제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최계월 “조국의 영광 최근에는 일부 외국계 식당이 대형 고급 한식당으로 대체되고 있다. 부유층이 밀집한 자카르타 북부의 빤 따이 인다 까뿍(PIK) 지역도 한국인만이 아니라 현지인이 운영하는 새로운 컨셉의 한식당이 집 중된 지역 중 하나이다. 고급 전통 한식당부터 퓨전 스타일의 패스트푸드형 한식당 최종적으로 대형 프랜차이즈로 발전시키며 시장을 확 대하고 있다. 두번째는 현지 소비자의 입맛에 맞춘 창의적인 퓨전 메뉴를 통해 고객층을 확장하 고 있다. 세번째는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감각적인 브랜딩으로 현지 소비자들에게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간다. 그렇다면 현지인이 소유하거나 운영하는 한식당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 한식의 지나친 현지화 는 정통 한식의 정체성을 희석시키고 이미지를 왜곡할 수 있다. 또 음식 품질과 서비스 표준을 유 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자본력과 운영 능력을 갖춘 화교 한식당은 한국 인 소규모 사업자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또한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틱톡 출발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 기 위해 기어를 후진으로 바꿨다. 후진으로 운전 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교통 유도용 꼬깔콘을 건 드렸다. 탈락이었다. 머쓱하게 웃으며 취득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현지 지인들은 인터넷에 서 찾은 정보를 내게 알려줬다. 진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싶다면 친근하게 블랙커피 한 잔 마시겠냐고 물 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접 수 창구에 가서 실기시험을 접수하고 친근한 미소를 보이며 인도네시아에서는 운전면허를 취 득하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운전 면허 시험을 접수할 때 필요한 비용은 전부 지불 했다고 대답했다. 그 경찰관은 조용히 고개를 끄 덕이고 친절” 또는 “선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직역하면 “사랑(호의)을 받는다”라는 뜻이지만 코데코는 외환보유고의 10% 규모인 450만 달러를 빌 려 인도네시아에서 산림개발에 투자했다. 사업은 대성공을 거뒀고 남부 칼리만탄주 바뚜리찐 (Batu Licin) 지역에 27만㏊를 개발해 모국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지금도 현 지 간선도로의 이름이 ‘잘란 라야 코데코’(Jalan Raya Kodeco)이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과를 나온 최 회장은 183㎝의 우람한 체구와 선이 굵은 얼굴에 운동 으로 다져진 강인한 신체. 보스 기질과 배짱 키타스(KITAS) 태국·아랍에미리트(83.0%) 통합군사령관 투자 특히 인도네시아가 81.4%로 가장 높았으며 판 결문 내용을 사법부의 법원을 통하여 강제집행하 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 와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계 기업 인들이 중재원을 설립하고 평균 연령은 29 세로 젊은 인구구조를 갖고 있는 역동적인 소비시장이다. 아울러 소득 증가에 따른 중산 층의 증가는 소비시장을 확대하고 있으며 피청구인이 중재비 납부를 거부하는 경우 에는 청구인이 전액 납부가 불가피하게 된다. 그러 나 피청구인이 중재비 반을 중재처리 개시 전에 지 급하는 것을 거부 시에는 중재위원들에게 나쁜 인 상은 주게 되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피청구 인의 입장에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사항이다. 사. 맞 중재 청구 피청구인는 청구인에 대하여 맞 중재청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필기 시험까지 합격한 것에 놀란 눈치였다. 카메라맨 이 와서 내 사진을 찍었다. 비록 필기시험이었지 만 필기시험을 담당하는 직원이 내게 다가와 지금 바 로 시험을 보겠느냐고 물었다. 지금 바로 보겠다 고 답변했다. 내 답변을 들은 직원은 나를 허름한 사무실로 안내했다. 허름한 사무실에는 컴퓨터가 여러 대 있었고 필요하면 브로커를 알아봐 주겠다고 답했다. 나는 진짜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고 싶다고 하청 학교 등을 지어주는 등 현지 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 또 우리 기업 진출 초창기인 1976년 자카르타에 한국학교 설립(현 자카르타한국국제학교 한·인니 민간외교의 선구자 한국 과 인도네시아 문화를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한식당은 하나의 식당으로서 현지인들이 맛있는 한 식을 먹고 즐기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좋은 사람들과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함께 맛있는 한식 을 먹는 쾌적한 공간으로서 사업성을 갖춘 한식당 모델이 한국인과 현지인의 협력 속에서 나오 길 기대해 본다. <끝> 한국 방문(61.8%) 한국과 인도네시아 양국 간 우호 관 계를 통해 회사의 번영을 이루겠다는 최 회장의 소망을 사훈에 담았을 것으로 그를 아는 사람 들은 짐작할 수 있다. 평생 해외자원개발에 매진해온 최계월 회장은 2015년 11월 향년 96세로 일본에서 별세했 다. 최 회장의 삶은 애국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공식 수교하면서 한국의 투자에 활기를 띠기 시 작한다. 1970년대 오일쇼크의 쓰라린 경험을 한 한국은 인도네시아에서 자원 확보를 위한 투자와 건설 및 무역 분야의 진출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기에 코린도(KORINDO)를 비 롯한 원목개발회사와 대림산업 한국법원도 인 도네시아 중재원의 판결문을 한국어로 심리할 수 있기 때문 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인도네시아 현지 법원의 상 황으로 경비와 노력과 시간에 강요당하는 경우기 적지 않다. 지방법원-고등법원-대법원까지 가면 2-3년이 소요될 수 있다. 또 재심청구의 길도 제 도상으로 허용하고 있어서 상대가 확정판결에 불 복하고 재심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현 실적으로 추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민사소송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으로 인내심이 필요하다. (5). 상업법원에 채무지불의무연기 청구 혹은 파 산선고를 청구하는 경우 파산(Pailit) 및 채무의무지불의무연기(Penundaan Kewajiban Pembayaran Utang/PKPU)에 관한 법률 2004년 제37호 발효 이래 채무자인 한 국계 기업 혹은 한인에 대한 파산청구 혹은 채무 지불의무연기 청구가 계속 있으며 한국에서 취 득한 운전면허증을 함께 제출했다. 접수 창구 직 원은 내가 제출한 서류를 모두 복사한 후 다시 돌 려줬다. 그리고 오늘 필기시험을 볼 거냐고 물었 다. 경험 삼아 보겠다고 답변했다. 소정의 인지 비 용을 내야 한다고 해서 한국을 주요 파트너로 선정하고 이를 위해 ‘한-인니 경제협력사 무국’을 설치했다. 또 양국은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CEPA)’ 개시를 위한 국내 절 차를 가속화하기로 의견을 같이 했으며 한류 열풍을 타고 비상하는 한국 제품·서비스 논설위원칼럼 논설위원 신성철 이제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한국 식품을 먹고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보고 K-Pop을 들 으며 한국 화장품을 사용하고 한국 관광도 즐긴다. 2000년대 초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첫 한국 드라마가 지상파를 탄 이래 한류 콘텐츠가 20년 이상 인기를 지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주인공이 사용한 물건들을 구입하거나 K-Pop 댄스를 따 라 하던 일방적인 수용이었으나 한식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현지인 운영자들과 협 력 구조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자카르타 한식당 운영자에 따르면 한식 셰프 양성을 지원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한식당의 가장 든든한 소비자이자 지지자로서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역할 도 중요하다. 자카르타에서 현지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은 한식의 글로벌화를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될 수 있다. 레스토랑 사업을 하는 화교들이 현지 비즈니스 모델에 한식을 얹어서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실제로 자카르타에 현지인에게 인기 있는 일부 프랜차이즈 일식당 은 전통적인 일식당의 모습이 아니고 해외에서 변형된 일식당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한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 보는 베트남 음식점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국으로 이주한 베트남인들이 미국 레스토랑 컨셉을 결합시켜서 만든 사업모델이다. 한식당은 단순히 외식 공간이 아닌 한식당의 과제와 기회 글: 조연숙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최근 한국 언론들은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에서 중국계 현지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의 문제와 그 에 따른 대응 방안을 집중 보도했다. KBS는 11월 23일에 프랑스와 독일 등 해외에서 중국인들 이 운영하는 한식당이 늘고 있다고 보도하고 한인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리와 부조리를 피 할 수 있어 한일마 트 합판산업은 1960~1970년대 대표적 수출산업으로 대한민국 산업화를 견인했고 전 세계 합판 수출량 20% 이상 점유했 던 우리나라 최대 수출 효자산업이었다. 1960년대 한국은 합판생산을 위한 원자재를 공급 하던 필리핀과 말레이시아가 원목 수출을 단계적으로 금지하자 새로운 공급처를 물색해야 했다. 인도네시아가 낙점됐다. 동서냉전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비동맹 창설의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도네시아에 서 우리나라는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1960년 6월 인도네시아측은 우리 친선사절단 방문을 거부했으며 해당 지역 경찰서 에서 회사 HRD 현지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고 현대건설 등 건설 부문 현지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외국인 직장 상사의 화를 돋우기도 한다. 인도네시아인의 미소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정말로 만족하거나 수긍할 때와 어색 현지 한인들과 교분관계가 두 터웠다. 한국의 탄약과 전투복 등 방산제품 수입 과 한국의 마두라 유전 개발 참여에 큰 역할을 하 는 등 양국 군사 및 경제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수하르토 정부의 실력자이자 2인자였던 베니 장 군은 1993년 수하르토 대통령의 6선 연임을 앞두 고 현지 한인들과 교분관계가 두터워 한국의 탄약과 전투복 등 방산제품 수입하는데 기여했 다. 또 한국의 서부 마두라 유전 개발 참여에 큰 역할을 하는 등 양국 군사 및 경제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마침내 1981년 코데코에너지와 인도네시아 국영석유회사 뻐르따미나 간 체결된 서부 마두라 유전 공동개발 사업이 승인됐다. 1981년 6월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전두환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양국 관 계 발전과 경제협력 방안을 폭넓게 논의하였다. 이듬해 1982년 10월에는 수하르토 대통령 1964년 인니여당 간사장 수비안또로수카르노 대통령양녀 사디킨여사 박정희대통령 예방8 I 한인뉴스 2024년 6월호 의 답방이 있었는데 현지법을 따라 해결하려는 의지와 노력보다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현지인이 운영하는 해외 한식당 형태와 규모도 다양하다. 자카르타 SCBD 지역에 산재한 크고작은 한식당들은 음식의 맛과 질이 일정 수준 이상이고 화 를 내며 한국인 관리를 똑바로 하라는 연락을 받 았다고 한다.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화가 났다. 왜 불합격 도장이 미리 찍혀 있냐고 따져 물었다. 시험감독 관은 대답이 없었다.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돌아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51 가려는 순간 화장품(54.0%) 회사 총괄 부장 님이 비용을 대납해 주겠다고 했을 때 그냥 알겠 다고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면허 시험장에 왔을 때는 가짜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 이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회사의 번영’은 한국남방개발㈜(KODECO/코데코)의 사훈이 다. 매우 독특한 사훈에는 코데코 창업자 최계월 회장의 경영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일 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에 폐허가 된 조국이 영광을 되찾고 회사의 번영” 논설위원칼럼 논설위원 신성철 투철한 애국심과 진정한 글로벌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해외자원개발의 선구자 ‘조국의 영광 후진으로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 간에 기어를 바꿀 수 없었고 후진으로 돌아오는 코스 절반 정도 온 후에 교통 유도용 꼬깔콘을 건 드렸지만 시험감독관이 불합격이 아닌 합격 처리 를 해줬다고 했다. 물론 인도네시아 국적이었다. 합격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니 희망이 보였다. 나 는 이후에도 회사 울타리 내에서 장시간 운전 연 습을 했고 후진으로 돌아오던 중 교통 유도용 꼬 깔콘을 건드렸다. 시험감독관은 불합격이라며 차 에서 내리라고 했다. 불합격 통보를 받자
한인회 연락처
서식다운로드
기업 디렉토리
참여마당
일정표
사이트맵
사이드 메뉴
한인기업 디렉토리
한인업체 등록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