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 아디네고로 왕자(pangeran Adinego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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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명의 지지자 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네덜란드군이 디포 네고로 왕자를 체포하기 위해 곧 들이닥칠 것이란 소문에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디포네고로 왕자가 그들 앞에 나섰고 망꾸부미 왕자가 그 곁 에 섰습니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몰랐던 것 아니지 않은가? 하 지만 이곳은 네덜란드 기병대와 전투를 하기엔 매 우 불리한 곳이니 시종들이 저들을 막는 동안 주 력은 뜨갈레조가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여기 망꾸 부미 왕자님을 따라 빠져나가 추격을 뿌리친 후 후방에서 집결해야 한다.” 스미사르트 주지사는 1825년 7월 20일 디포네 고로 왕자가 망꾸부미 왕자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간주하고 부지사 쉐팔리에(Chevallier)를 시켜 부르데부르크 요새의 기병대를 지휘해 왕자 의 저택을 포위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뜨갈 레조의 초입에서부터 그들은 디포네고로 지지자 들의 강력한 저항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남쪽과 동 쪽으로부터 밀고 들어가는 네덜란드군은 저항군 이 마치 잘 조련된 군대처럼 전술적으로 방어선을 만들고 조직적으로 조금씩 물러서는 모습에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저한 화력 의 차이를 보인 전투에서 디포네고로 시종들의 전 열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적잖은 인명피해를 교환하는 사투를 벌인 끝에 네덜란드 군은 방어선을 뛰어넘었고 sanyari bumi ditohi tekan pati!”(사두묵 바뚝 걱정 마시오. 내가 우리 군대를 보내 손을 좀 봐 주겠소.” 혀를 쯧쯧 차던 망꾸느가라 2세가 그렇게 장 담했습니다. 그는 자기 사위인 라덴 마스 수웡소 (Raden Mas Suwongso)에게 여단 규모의 보병 과 기마대를 주어 족자 술탄국으로 들어가 네덜란 드군을 돕게 했습니다. 그러나 족자 시내로 접어 들기 직전 끄라톤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깔 라산(Kalasan) 지역 란두군띵(Randugunting) 이라는 곳에서 그들도 디포네고로군의 기습공격 을 받았습니다. 허를 찔린 망꾸느가란의 대군이 거의 전멸당하다시피 했고 지휘관 라덴 마스 수웡 소는 사로잡혀 슬라롱의 디포네고로군 본진에 끌 려갔습니다. http://www.tugassekolah.com 26 I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당신 장인어른께 전하시오. 계속 알라의 뜻을 거스려 네덜란드를 돕는다면 망꾸느가란 봉국 역 시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말이오.” 디포네고로 왕자는 벌벌 떨던 수웡소에게 잔뜩 겁을 준 후 풀어주었습니다. 망꾸느가란 봉국 왕 실의 인사를 처형해 굳이 철천지 원수를 지고 싶 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로그록과 란두군띵을 비롯해 여러 전투에서 디 포네고로군이 모두 이겼다는 소식에 족자 끄라톤 의 왕족들은 끄라톤 침공이 임박했다고 여겨 두려 움에 떨었고 급기야 브레더부르크 요새로 들어가 보호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크게 고무되어 디포네고로군의 군세는 더욱 증강 되었고 저항전쟁은 자바 전역으로 번져나갔습니 다. 끄라톤 왕궁 안에 머물던 높은 울라마들도 궁 을 나와 디포네고로군에 속속 합류했습니다. 족자 끄라톤 왕족들의 우려와 같이 디포네고로 군은 이윽고 끄라톤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뜨갈레 조 전투로부터 3주만의 일입니다. 이 작전에 동원 된 디포네고로군 병력은 6천 명에 달했습니다. 그 들 중 아부 바까르 왕자(Pangeran Abu Bakar) 가 이끄는 제1대는 빠꾸알라만 봉국을 동쪽으로 부터 치고 들어갔습니다. 아부 바까르 왕자는 술 탄 하멍꾸부워노 3세의 아들로 디포네고로 왕자 와 형제관계였죠. 그는 쪼데 강(Kali Code)의 다 리를 파괴해 빠꾸알라만 봉국의 군대가 족자 술 탄국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봉쇄하고 그곳의 중국 인들 경제적 역량을 완전 히 바닥낼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된 이 전쟁이 고 작 디포네고로 왕자의 조상 묘역을 파헤치려는 네 덜란드와의 말뚝 분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관점일 것입니다. 그 배경 은 분명 훨씬 더 깊고 입체적일 터이죠. 다음 호에 계속 서쪽지역에 묵었습니다. 다른 부인들은 먼저 일찍 죽거나 전장에 따라나서지 않은 상태에서 라덴 아 유 렛나닝시만이 자바 전쟁 초기부터 전쟁 마지막 날까지 디포네고로의 곁을 충실히 지켰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곳에 군대의 본진을 설치하 고 조요멍골로(Joyomenggolo) 군사 적으로 지지했으므로 실제로 족자 술탄국의 왕가 와 귀족 절반이 디포네고로 왕자의 지휘를 받으며 네덜란드군과 맞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왕자 전하! 문안 드리옵니다.” 이슬람 학자와 쁘산트렌 학생 복장을 한 수백 명 의 병사들을 이끌고 깔리사카에 나타난 한 남자가 한인뉴스 2024년 9월호 I 35 천 명의 디포네고로군 장병들이 사망했고 네덜란 드군도 8천 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디포네고로 군은 게릴라 전술에 능했고 매복공격으로 네덜란 드군 병참로를 속속 차단했는데 정작 네덜란드군 은 일관성 있는 전략이나 제대로 된 응전의 결기 도 없었으므로 전쟁 초반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피해가 컸습니다. 자바전쟁은 자바의 구시대와 근대 그리고 자바 북부해안지 역 대부분을 포함한 자바섬 거의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항전에 식민정부는 크 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치열하고도 연 속적인 전투로 양쪽 모두 엄청난 인적 그보다 앞서 그 형제 인 망꾸디닝랏 왕자 꺼두(Kedu) 지역의 끔방아룸 마을(desa Kembangarum) 등 여러 지역에 화약공장들을 비밀리에 세우고 본격적인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 되었습니다. 이렇게 발생한 자바 전쟁은1825년부터 1830 년까지 5년간 자바땅 대부분을 휩쓸게 됩니다. 사 람들은 이를 디포네고로 전쟁이라고도 부르죠. 이 전쟁은 네덜란드가 동인도에서 예전엔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던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중부 자바 전부와 동부 자바 일부 끼아이 모조 등은 실소를 터뜨리며 조요꾸수모 왕자(Pangeran Joyokusumo)와 수르옝로고 왕자(Pangeran Suryenglogo)에게 강경한 거절답신을 쓰도록 했습니다. ‘네덜란드군이 무장해제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 면 그 길을 막지 않겠지만 계속 알라를 모욕하고 왕국을 침탈한다면 알라의 뜻에 따라 그대들에게 불지옥을 선사할 것이오. 불행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 정녕 화친을 원한다면 당신의 고아슬라롱 방 문을 환영하며 신께 맹세코 당신과 일행들의 안전 을 보장하겠소.’ 그 회신을 받은 드콕 장군의 얼굴이 붉그락푸르 락 했습니다. 그는 슬라롱의 적진 한가운데로 걸 어들어갈 용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인도 네덜란드군 총사령관인 내가 저들 진영 에 들어간다면 과연 저들이 날 가만히 둘 것 같은 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한 적진에 내발로 걸어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오!” 그는 참모들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몇 년 후 그 스스로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자기 본진에 들어와 협상하자 말하게 되리라곤 그때 아직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디포네고로군의 기세가 점점 커지자 드콕 장군 은 자바 바깥에서 근무하던 장교들과 부대들을 불 러들여 자바 전선에 서게 했습니다. 그들 중 술라 웨시에서 불려온 노련한 반 게엔 장군(Jenderal Van Geen)은 스마랑에서 세랑 왕자(Pangeran Serang)의 부대를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세랑 왕 자는 수꼬와티(Sukowati)로 진군해 까르토디르 자(Kartodirja)의 부대와 함께 렘방(Rembang) 단 한 치의 땅을 뺏으려는 누군가의 똔다노(Tondano) 유배 시절의 끼아이 모조 http://jembatan-pengetahuan.blogspot.com 34 I 한인뉴스 2024년 9월호 디포네고로 왕자에게 허리를 굽혔습니다. “무슬림 아니냐? 정말 반갑구나!” 오래 전 뜨갈레조에서 만났던 천재소년 무슬림 모하마드 칼리파는 수라카르타에서 저명한 이슬 람 선생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울라마 끼아이 모조(Kyai Mojo)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얻어 수 라카르타 수수후난 빠꾸부워노 6세의 측근이 되 었고 일무 까누라간(Ilmu Kanuragan)이라는 신 비로운 능력을 익혀 전장에서 목소리 하나로 적들 을 격파하는 드망(Demang) 등 높고 낮은 지위의 영주들이 협조하여 인력과 물자를 신속하게 움직 이면서 디포네고로군의 조직력을 과시했으나 정 작 가장 의미가 컸을 끄라톤 점령을 달성하지 못 한 것이 디포네고로 왕자에게는 못내 아쉬운 일이 었습니다. 그러나 디포네고로군은 이제 한껏 겁먹은 네덜 란드군을 줄기차게 밀어붙이며 승승장구하기 시 작했습니다. 꺼두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에서 불 키요(Bulkio)라고 이름붙인 농민군은 하지 우사 만 알리바사(Haji Usaman Alibasah)와 하지 압 둘까비르(Haji Abdulkabir)의 지휘 아래 롱고 왕자(Pangeran Ronggo) 마글랑 (Magelang) 군수인 뚜멍궁 하디닝랏(Tumenggung Hadiningrat)과 손잡은 네덜란드군을 격파 하고 마글랑 군수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머노레 (Menoreh)에서도 네덜란드군을 쳐부수고 머노 레 군수 아리오 수모딜로고(Ario Sumodilogo) 를 죽였고요. 전세는 디포네고로군쪽으로 크게 기 울고 있었습니다. 이쯤 되자 1825년 8월 7일 드콕 장군은 양자 협 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서둘러 디포네고로군에 보 냈습니다. 네덜란드로서는 당장 전쟁을 멈추게 하 진 못하더라도 시간이라도 벌어야 할 상황이었죠. 그런데 그 서한엔 대담하게도 이런 문구가 포함되 어 있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자들은 신 분의 귀천과 지은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사면 해 줄 것이다’ 이 편지를 함께 열람한 고아슬라롱의 디포네고 로 왕자 망꾸부미 왕자 머르타사나 왕자가 그들의 아버지 하멍꾸부워노 2세와 함께 말레이 반도 삐 낭섬으로 유배된 후 뒤에 남은 형제들의 맏형이 된 망꾸부미 왕자는 자기 수하 백수십 명을 총동 원해 뜨갈레조로 향하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지난 호에 이어 한인뉴스 2024년 9월호 I 33 ‘나도 너희 말 들을 놈 아니다.’ 그도 하멍꾸부워노 2세의 반골기질을 그대로 물 려받은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조카를 만나러 온 망꾸부미 왕자는 디포네고로 왕자를 끄라톤으로 데려가긴커녕 그와 의기투합하여 함께 네덜란드 와 맞서 싸우기로 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삼촌 망꾸부미 왕자를 얼싸안던 그때에 망구부미 의 전향을 알게 된 다누레조와 네덜란드 측은 망 꾸부미에게 속은 것에 분개하며 마침내 본격적으 로 군대를 풀었습니다. 1825년 7월 21일의 일입 니다. 네덜란드군이 뜨갈레조로 들어가는 길을 폐 쇄했을 때 디포네고로의 저택에는 망꾸부미 왕자 가 데려온 사람들까지 포함해 1 물적피해 를 감수해야 했는데 네덜란드측 문헌에 따르면 이 전쟁 중 약 20만 명 정도의 자바인 민간인들과 7 고아 슬라롱 https://gudeg.net | https://rentalmobilyogyakarta.net 자바 전쟁 www.youtube.com 바후유다 (Bahuyuda) 보조느가라(Bojonegara) 등의 농민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스마랑에서 벌어진 반 게엔 부대와의 전투에서 까르토디르자가 다리에 총을 맞고 적에게 사로잡히자 수세로 몰려 마디운 으로 후퇴했다가 그 후 슬라롱에서 디포네고로 왕 자와 합류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블로라(Blora) 빠눌라르 왕자(Pangeran Panular) 빠라깐 마을(Desa Parakan) 산야리 부미 디토히 뜨깐 빠 띠!) 뜨갈레조를 빠져나가기 직전 디포네고로 왕자가 지지자들에게 외친 이 자바어 문장은 그후 디포네 고로군의 모토가 되었는데 ‘머리를 한번 건드리 는 손가락에도 수렝로고 왕자(Pangeran Surenglogo) 등 내로 라하는 왕족들과 귀족들도 디포네고로 왕자 편에 섰습니다. 자바 전쟁에서 디포네고로가 승기를 잡 던 시기에 궁성의 왕자 29명 중 15명 아디위노토 수리요디뿌로(Adiwinoto Suryodipuro) 역에 도착할 때마다 날아 드는 현지 전황보고서는 사뭇 심상치 않았습니다. “족자 왕실의 귀족들이 대거 저쪽에 붙은 건 이 해할만한 일이지만 왜 자바 민중들마저 대부분 반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15 란군을 지지하는 거요? 민중들이 술탄에게 등을 돌렸단 말이오? 이곳 동인도에서?” 술탄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술탄의 반대편에 선 반란군의 수괴를 족자 술탄국 백성 대다수가 따른 다는 동향보고를 드콕장군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동인도에서 지냈던 지난 18년 동안 이런 현상을 그는 처음 보았던 것입니다. 동인도인들은 최소한 술탄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했으니까요. 그가 스마랑까지 도착한 것은 1825년 7월 29일 이었고 그는 다음날 수라카르타를 먼저 방문했습 지난 호에 이어 반 더 채펄런 총독 (채펄런 남작 고더 알렉산더 제라르 필립-좌)과 헨드리끄 마르쿠스 드콕 장군(우)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25 니다. 그의 강권에 수난 빠꾸부워노 6세는 내키지 않았지만 디포네고로 반란 평정을 위해 네덜란드 를 돕겠다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드콕 장군은 같은 요청을 하기 위해 망꾸느가란 봉국으 로 가기 앞서 부관에게 먼저 명령을 내렸습니다. “지원군들이 다 모이기도 전에 끄라톤을 뺏긴다 면 큰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저 느릿느릿한 인간들 을 믿을 수 없으니 스마랑 주둔군 일부를 빼서 신 속히 족자로 먼저 보내도록 하게.” 이 명령에 따라 께엠시우스 대위(Kapten Keemsius)의 부대가 즉시 스마랑을 출발해 최고 속도로 끄라톤을 향해 행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런데 그들이 족자로 가던 길목인 로그록(Logrok) 강가에 도착하자 무시요센티카(Musyosentika) 가 지휘하는 디포네고로군이 벼락같이 기습을 가 해 왔습니다. 습격을 예상치 못했던 네덜란드군은 지리멸렬하며 200여 명이 몰살당했고 족자 주지 사에게 전달하려고 운반해온 굴덴의 군자금도 탈 취당하고 맙니다. 뜨갈레조 사건 불과 며칠 후인 1825년 7월 말에 벌어진 이 전투는 디포네고로군 이 거둔 첫 승리였고 이 소식이 퍼져 나가자 입대 지원자들이 몰려들면서 디포네고로군 병력은 크 게 증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칼을 들고 덤비는 반란군들 에게 총든 군대가 어떻게 패배한단 말인가?” 망꾸느가란 봉국에서 망꾸느가라 2세를 만나고 있던 드콕 장군은 네덜란드군이 로그록에서 대패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기 귀를 믿지 못했습니다. “장군 유럽인들의 거주지역을 불살랐습니다. 한편 아디네고로 왕자(Pangeran Adinegoro)가 이끄 는 제2대는 족자-마글랑-수라카르타를 잇는 도 로와 통행세 수금을 위해 설치된 관문들을 모두 점거해 지원군들 길목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블리 타르 왕자(Pangeran Blitar)가 이끄는 제3대가 족자 끄라톤을 빼앗기 위해 남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디포네고로군에 항거하는 군수들 의 도성내 주택들은 모두 파괴되거나 불태워졌고 곡물창고들을 공격해 탈취한 곡물을 도성 밖으로 빼냈습니다. 이로 인해 족자 침공이 끝난 후 도성 주민들은 심각한 식량난을 겪게 됩니다. 어린 술탄 하멍꾸부워노 5세는 궁전의 신료들과 함께 브레더부르크 요새로 피신했고 끄라톤 경비 대장이자 네덜란드군의 소령 계급장을 단 위로네 고로 왕자(Pengeran Wironegoro)는 디포네고 로군을 맞아 힙겹게 끄라톤을 수비해 함락을 면 할 수 있었습니다. 끄라톤 점령에 실패한 디포네 고로군은 도성 밖으로 일단 물러났으나 도심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점거하고 봉쇄작전을 실행했 습니다. 이로 인해 족자는 한동안 마치 죽음의 도 시처럼 스산했고 지나는 사람들마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위력을 보였으니 적 지원군들 을 회피하면서 전역에서 철수하시오.” 디포네고로 왕자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군대는 족 자 봉쇄를 7일만에 풀고 포로들과 노획물자를 가 지고 슬라롱으로 돌아갔습니다. 족자 침공에는 수 바바드 디포네고로(디포네고로의 이야기) 최근 출간본에 등장하는 자바전쟁 삽화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27 많은 뚜먼궁 이후 거의 일방적으로 짓쳐 들어가 저택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부미 왕자는 대부분의 수 하들을 거느리고 이미 그곳을 탈출한 후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격분한 쉐발리에 부지사는 디포 네고로 왕자의 저택을 완전히 불살라 버렸습니다. 뜨갈레조에서 고아슬라롱으로 퇴각 이 사건은 그 후 5년간 지속되는 자바 전쟁의 시 작을 알리는 폭죽이었습니다. 습격을 당해 밀려난 셈인 디포네고로 왕자가 이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 게 지나칠 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Sadumuk bathuk 일견 사자후(獅子吼)와 같은 공력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수라카르타는 물 론 자바 역사와 인도네시아 역사를 나누는 경계선이라고도 합니 다. 네덜란드의 전비와 군사 족자 술탄국 구석구석과 망꾸느가란 봉국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디포네고로 왕자와 망꾸 부미 왕자는 크게 반가워하며 그를 얼싸안았습니 다. 그의 합류는 전력에 큰 보탬이 될 뿐 아니라 빠꾸부워노 6세의 측근인 그의 존재는 네덜란드 의 압박 속에서 모호한 입장을 보이던 수라카르타 도 사실은 디포네고로의 저항을 내심 지지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끼아이 모조는 이후 전장에 서 디포네고로군의 전략사령관이자 이슬람 큰 선 생으로서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족자의 귀족들과 일반 민중들이 끝없이 밀려들 어 디포네고로의 휘하에 들었으므로 깔리사카에 서는 더이상 그들을 수용할 수 없어 뜨갈레조를 나온지 불과 며칠 만에 왕자는 더 넓은 곳을 찾아 옮겨가야 했습니다. 가족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꿀 론쁘로고군 (Kabupaten Kulonprogo) 덱소 마 을(Desa Dekso)에 도달한 디포네고로는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꺾어 반뚤시(Kota Bantul)로부터 서쪽으로 5킬로미터 족자 지역 태수와 군수들 88명 중 41명이 그를 정치적 족자에서 남서쪽 으로 약 9킬로미터쯤 떨어진 고아 슬라롱 (Goa Selarong)이란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아내들 중 그를 따라 나선 라덴 아유 렛나닝시 (Raden Ayu Retnaningsih)와 하녀들은 고아 슬라롱 시도에도 목숨을 다해 저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도발과 공격을 절대 좌 시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철철 흘러 넘치는 외침 이었죠. 네덜란드군의 공격 반대방향인 북쪽으로 빠져나 간 디포네고로 일행은 네덜란드의 포위망을 벗어 나 일단 깔리사카(Kalisaka)에 도착했습니다. 자 바 전쟁의 첫 전투라 할 만한 뜨갈레조 전투는 결 코 디포네고로 왕자의 승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결 과였지만 이 사건 소식이 자바 전역에 빠르게 전 파되었고 네덜란드에 대한 공개적 저항을 시작한 왕자의 행동은 백성들의 연민과 응원을 불러 일으 켰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추종자들이 깔리사카로 몰려 들었습니다. 한편 왕족들과 귀족들도 디포네고로 왕자에 대 한 지지를 밝히거나 직접 병력을 데리고 모여들 었는데 수라카르타의 빠꾸부워노 6세도 은밀한 지지를 보냈고 가갈딴(Gagartan)군의 영주 라 덴 뚜먼궁 쁘라위로디자야(Raden Tumenggung Prawirodijaya)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다누레조 재상이 노리던 반응이었죠. 당시 뜨갈레조 저택과 그 일대에는 디포네고로 왕자 주변으로 모여드는 이슬람 학자 들과 청년들 숫자가 무섭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숫자가 여단급 부대 병력규모에 가까워지자 지 척의 끄라톤 궁전을 장악한 다누레조 재상은 물 론 브레더부르크 요새의 네덜란드군에게도 적잖 은 부담이 되던 차였습니다. 그들로서는 어떻게 든 빌미를 만들어 디포네고로 왕자를 제거하거나 최소한 그의 힘을 크게 위축시킬 필요가 있었습니 다. 그러던 차에 다누레조 재상이 도로계획의 방 향을 뜨갈레조로 틀어 디포네고로 왕자를 격분시 키는 묘수를 생각해 냈던 것입니다. 조상의 묘소 가 파헤쳐질 것을 알고도 가만 있을 후손이 있을 리 없을 터였고 디포네고로 왕자는 그 미끼를 덥 썩 물고 만 것이죠. “더 이상 디포네고로 왕자가 제멋대로 구는 꼴을 봐줄 수 없소. 이번 도로공사는 왕국을 위해서도 우리 네덜란드를 위해서도 더 없이 중요한 일이 요. 그런데 그가 말뚝 박는 사람들을 때리고 우리 측량사들을 쫒아 냈으니 이건 반역행위와 다름 아 니지 않소? 당신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끌고와 사 과를 시킨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왕족이든 귀 디포네고로 왕자와 자바전쟁 배동선작가의 술술 읽히는 인도네시아 역사 13 족이든 상관치 않고 뜨갈레조로 쳐들어가 그곳을 초토화시키고 말겠소!” 네덜란드 지방청사에서 다누레조 재상을 뒤에 세운 채 목에 핏대를 세우던 스미사르트 주지사 /지방총독(Resident Smissaert)은 디포네고로 왕자의 삼촌 망꾸부미 왕자(Pangeran Mangkubumi)에게 노발대발하며 디포네고로 왕자를 잡아들이라고 악을 써댔습니다. 물론 망꾸부미 왕 자가 이 사태를 잘 무마할 것이란 기대는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총독부와 다누레조 재상은 최소 한 아무런 중재나 절충도 없이 디포네고로 왕자를 무조건 공격했다는 세간의 비난만은 피하고 싶었 던 것입니다. “디포네고로 왕자가 내 말을 들을 녀석은 아니지 만 한번 얘기는 해 보겠소.” 하멍꾸부워노 3세가 죽고 한편 뜨갈레조 사건을 보고받은 바타비아의 네 덜란드 총독 반 더 채펄런(Van der Cepellen)은 디포네고로 왕자를 상대할 야전사령관으로 헨드 리끄 머르쿠스 드콕 장군을 선임합니다. 그는 당 시 40대 중반의 활동적인 군인으로 원래 해군에 입대해 1807년부터 동인도에서 근무하기 시작했 지만 1821년에는 수마트라의 빨렘방(Palembang)에서 육전으로 현지반란 진압을 성공적으 로 수행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동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반란들이 한 두 개가 아니오. 족자에서 벌어진 저 반란을 신속 히 진압하고 돌아와 주시오. 장군이 할 일이 많소.” 채펄런 총독이 이렇게 말할 때까지만 해도 드콕 장군은 미개한 자바 내지에서 한 두 달 안에 반란 을 진압하고 당시 바타비아에 상륙해 있던 유럽문 명으로 속히 돌아와 안락한 생활을 즐기려 했습니 다. 하지만 일단의 부대가 호위하는 마차를 타고 중 부 자바로 향하는 동안 항고위끄로모(Hanggowikromo) 같은 지휘관들을 통해 군대 체계를 편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족자 남쪽 게게르 마을(Desa Geger)과 끼둘(Kidul)산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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삥땅동 202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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