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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만톤을 돌파했다. 2022년 7월 서울에서 인 도네시아 국영 철강회사 크라카타우스틸과 철강 생산능력 확대 및 인도네시아 신수도 건설 사업 참여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조코 위도도 대 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체결했다. 포스코와 크라카 타우스틸은 향후 5년간 공동으로 35억 달러를 투 자해 크라카타우포스코(PT Krakatau-POSCO) 의 제 2고로와 냉연공장 신설을 추진한다. 크라 카타우포스코는 포스코와 크라카타우스틸이 합작 한 일관제철소로 수도인 자카르타 북서쪽으로 약 100Km 거리의 찔레곤(Cilegon)에 위치해 있다. 현재 연산 300만 톤 규모의 고로 1기와 후판공 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크라카타우스틸의 현물출 자를 통해 열연공장도 갖출 예정이다. 포스코와 크라카타우스틸은 크라카타우포스코에 고로 1기 를 추가로 건설해 연간 조강량을 6백만 톤 이상으 로 대폭 확대하고 025 명보다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인 현지 체 류자들은 1998년 5월 폭동 이전에 12만여 명이나 체류했지만 이후 2만 명 규모로 줄면서 091명에서 2019년에 22 1) 노동집약산업에 이어 기술집약산업 등 제조업 투자 진출 1988~1992년 기간에 한국 기업의 대인도네시 아 투자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섬유 153명(2021년 대비 45% 이상 증가)으로 늘 었다. 인도네시아 재외동포가 전세계 재외동포에 서 차지하는 비중은 4.83%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한국계 사람들은 재외동포라 부르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한인 또는 한국인이라 부른다. 한 사람이 아버지도 되고 아들도 되는 것처럼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은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데 1968년 한국외환은행( 현 KEB하나은행) 자카르타사무소가 문을 열었다. 1980년대 후반은 제2차 한국기업이 인도네시아 에 진출하는 시기다. 1988년부터 한국 신발과 봉 제 기업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인도네시아에 쏟 아져 들어오자 1980 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성화(Sung Hwa Dunia) 1980년대는 한국 1981년 코데코와 뻐르따 미나와의 서마두라유전 공동개발은 ‘한국 최초 해외유전개발 사업’이다. 인도네시아는 1992년에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제1호 해외사무소를 개소한 국가로 1990년대 이후에는 인 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 중국이 전 세계 생산기지 역할을 맡고 있다. 1980년대 후 반기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따른 노동쟁의 증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인도네시아 정치·경 제와 사회적 혼란 상황에서 과거 경영관행에 익숙 했던 대부분 한국계 신발기업은 경영 악화에 직면 한다. 이에 인도네시아 신발 투자기업 1세대로 분 류될 수 있는 성화 2000년대 후반기부터 시작된 인도네 시아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 다. 1980년대 초반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한인 슈 퍼마켓은 무궁화를 시작으로 도라지 2005년 이후 제3차 한국기업의 인도네시아 투자 러시가 이어진다. 시의적절하게 KEB하나은행은 2007년 현지 은행을 인수해 현지법인을 설립한 다. 신한은행은 2016년에 신한인도네시아은행 200개였으나 200만 켤레 200만명 에 달하는 실업자들의 고용 문제를 해결해야 했으 며 2017년에 각각 15 2020년 두 차례의 유상증자를 통해 KB부코핀은행의 지분율을 67%까지 확대하며 경 영권을 확보했다. 최근 수년간 동안 한국계 은행이 앞다퉈 인도네 시아에 진출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대출 금리에서 예금금리를 뺀 예대마진률이 한국보다 3배 정도 높기 때문이다. 한국의 시중은행의 예대 마진률은 약 1.17%p에 불과한 반면 2021년 기준 49개 점포를 운영하고 있다. 2013년 9월 한국타이어 는 서부자바주 브까시 지역에 있는 공단에 총 3억 5300만달러(약 3800억원)를 투자해 1단계 완공 한 인도네시아 공장은 승용차용 타이어 297명까지 줄었다가 2만5천명을 고용하고 있다. 이들 회사의 현지 총자산은 163억 달러(약 21조 5천억원)에 이른다. 2010년 전후에 한국의 글로벌 대기업들의 인도 네시아 투자가 이어진다. 롯데마트가 2008년 10 월에 인도네시아 마크로(Makro) 19개점을 인수 3. 자본·기술집약산업 진출 시기: 제1차 성숙기(2003~2017년) 한인뉴스 2024년 12월호 I 51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하며 우리나라 유통업체로서는 최초로 인도네시 아 시장에 진출했다. 이후 2010년 8월 직접 투 자 방식을 통해 수도 자카르타에 간다리아 시티점 (Gandaria City)을 오픈했고 2차 30%씩 투자해 설립한 크라카타우포스코가 연간 생산능력 300만톤 규모의 동남아 최초 일관 제철소를 완공해 가동한지 4년만에 누적 판매량 1 335개 와 13 3차 및 4차 산업을 동시에 발전시키기 위해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제4차 산업혁명(4th Industrial Revolution) 실현을 위한 로드맵 ‘메이킹 인도네시아 4.0’(Making Indonesia 4.0) 진행하면서 400개로 2.5배 이상 증가했다. 롯데마트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대표적인 한 국기업이 투자한 유통기업이다. 롯데마트는 지난 2008년 말 대형마트 ‘마크로’ 19개 점을 인수 하며 국내 유통업계에서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시 장에 진출했다. 2019년 12월 롯데마트는 중부자 바주 뜨갈 지역에 인도네시아 50호점을 열었다. 롯데마트는 인도네시아 유통업계 역시 온라인 중 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만큼 10대 도시 대형 점 포와 중소 도시 거점 점포를 연결해 전국적인 물 류 네트워크로 활용할 방침이다. 앞서 롯데그룹은 2013년 6월 자카르타 메가꾸닝안 지역의 복합단 지인 ‘찌뿌뜨라 월드 자카르타‘에 복합쇼핑몰 인 ‘롯데쇼핑 에비뉴점‘을 오픈했다. 유통산업에서 현지 한인이 운영하는 유통기업과 슈퍼마켓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유통기업들은 먼 타국에서 한인들의 식생활을 책임져 주었을 뿐 만 아니라 7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금융사들이 난립해 있다. 더욱이 인 도네시아 현지 은행들의 독점 체제와 인도네시아 금융감독청(OJK)의 엄격한 감독은 외국계 은행 에게는 어려운 여건이다. 한국계 은행들은 현지 진출 초기에 현지에 진출 한 한국계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금융 영업에 초 점을 맞췄다. 2007년 KEB하나은행이 현지 소매 은행인 빈땅마눙갈은행(PT Bank Bintang Manunggal)을 인수를 시작으로 이후에 진출한 한국 계 은행들도 인수·합병을 통해 현지화 전략으로 리테일(소매) 영업을 확대하는 등 변신하고 있다. 한인뉴스 2024년 12월호 I 53 최근 인도네시아 금융산업에서 디지털 뱅킹을 확 대되면서 한국계 은행들이 현지에서 비대면·디 지털 기반의 금융서비스 등 첨단 금융서비스를 선 보이고 있다. 기타 리스업으로 755 개와 5 774명으로 줄었고 9개 증권사 등 28개 한국 금융사가 진출했 다. 이들은 그동안 약 27억 달러(약 3조5천700 억원)를 투자했으며 BATANG 등 6개 공장에서 성 형숯을 생산하면서 매월 한국으로 45콘테이너를 수출했는데 이 때 얻은 수입과 특허비를 받아서 병원 사업을 구상했다. 원래 꿈이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공 업고등학교를 택한 것이 의사가 되는 길을 막았기에 이곳에서 결혼한 집사람과 동료의사들 을 위해 같이 사회사업을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종합병원을 설립했다. 하지만 개원한 지 3년 즈음 되던 해에 족자 대지진으로 병원 내부 설비가 훼손되어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다. 지금 은 종합병원 C등급으로 의료서비스를 하고 있다. Q 아내이신 Ova Emilia 현재 UGM 총장님과 자녀들은 어떤 문화 속에 교육하고 가정생활을 하 셨는지 궁금합니다. w저의 가족은 딸 2 CJ 등과 같은 전 자와 바이오 산업이 진출해 수출뿐만 아니라 내수 시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1993년 이후 인도네시아의 최저임금 인상률이 급등하자 CJ 등과 같은 투자성공 사례를 낳는 기반 을 마련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 봉제와 신발 등 노동집약적 한국 기업이 동남아 국가를 투자 대상으로 주목한 이유 는 원화의 절상 IBK인도네시아은행 IBK인도네시아은행 등은 각각 현지 은행 두 곳을 인수·합병(M&A) 하면서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국민은행은 2018 년 7월 부코핀은행의 지분 22%를 취득해 2대 주 주가 됐고 IT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도 존재감 을 보여주고 있다. 한인 진출 초기부터 자카르타에는 한국학교 ITC K-마트 등이 있으며 KARTASURA (KOPASUS 2) KB 부코핀은행 등 순차적으로 한국계 은행들이 현지 시장에 진출해 소매금융 시장으로 영역을 확대하 고 있다. 생명보험회사로서는 처음으로 한화생명 (Hanwha Life Insurance)이 2013년 현지법인 을 설립해 영업하고 있다. 한국 증권사도 속속 현지 시장에 진출했다. NH 투자증권이 지난 2009년 현지 증권사와의 합작 사 형태로 처음 진출한 이후 키움증권과 미래에 셋대우 KF-21 전투기 공동개발을 위해 협력하고 있는 최초 의 국가가 인도네시아이다. 한인뉴스 2024년 5월호 I 7 냉전시대인 1973년에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국가 중 남북한이 대사관을 동시에 상주시킨 첫번째 국가이다. 2023년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인도네시아인 의 한국 인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KMK OK뱅크인도네시아 OK저축은행은 2019년에 OK뱅크인도네시아 그 리고 IBK은행은 2019년에 Q 한국계 인도네시아인 사업가 장근원 선생님은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나요? w본인은 현재 서부자바 TANGERANG (1988) 및 중부자바 Pati (2018) 지역에서 압축 성형숯 제조업과 YOGYAKARTA 시에서 병원 의료 사업(1999)을 하고 있습니다. Q 인도네시아행을 결정했던 계기와 한인최초 국비유학생으로서의 이곳 생활을 떠올린다면? w용산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식품공학과에 4기생으로 입학했다. 1974 년 에 군입대하여 34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1977년에 다시 3학년에 복학하여 3학년 과정을 수료했다. 1978년 겨울방학을 맞아서 4학년 등록금 준비를 궁리하던 차에 우연히 문학써 클 동우회 이대 친구로부터 인니 장학금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4학년 등록금 마련을 위해 영문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라서 주무 부서인 외무부에 찾아가 관련 사실을 확인하고 유학신청서를 제출했다. 인도네시아 유학을 결정했던 계기는 평소에 통속적으로 내가 자라오면서 익숙한 고정 관념적인 삶을 벗어나 새롭게 생활방식을 바꿔보 고자 하는 의욕이 나의 모든 마음을 흔들었다. w대학교 입학 시험에서 계셨던 학과장님 SENTOLO-WATES SERANG (KOPASUS 1) YOGYAKARTA [특집] 한국-인도네시아 우정의 50년 여정 12 1) 중화학공업 ‘유연탄을 무연탄처럼 사 용할 수 있는 2중연소 화로와 연탄 디자인’ 에 관한 특허를 1989 년에 신청하고 1992년에 특 허인증을 받았다. w그 특허 인정을 받아서 인니 국책프로젝트를 시작하였고 1997년 9월 동부자바 GRESIK에 월 1만톤 제 1 생산 공장을 세웠지만 1998년 5월 SOEHARTO 대통령의 하야로 그 사업은 중단되었다. w외환위기로 인니사정이 한참 어려울 때가 있 었다. 그 당시 성형숯 공장을 TANGERANG 가구 등 노동집약적 산업에 강점이 있지 만 생산 방식은 사람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제조업 강 국의 꿈을 이루려면 자동화를 통한 대량생산을 뛰어넘어 4차산업 기술로 직행을 추진하는 가운데 가루다인다와 가파른 원화 절상 및 임금 상승에 따른 제 조비용 상승으로 채산성이 급격하게 악화하면서 국내 노동집약적 중소기업들이 해외진출을 모색 하게 됐고 감가상각 가속 건설 등 한국 기업들이 이미 현지에 진출해 있었던 터라 인도네시아에 직접투자는 진출에 따른 초기 비용 을 줄일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경제와 비즈니스 및 사회문화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끝) 경제와 사회 분위기에 따라 경트럭용 타이어 등을 연간 600만개를 생 산할 수 있는 최신 제조 설비를 갖췄다. 2013년 12월 포스코와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업 체 크라카타우스틸(PT Krakatau Steel)이 각각 70% 고무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인도네시아를 점 령한 후 조선인들을 보냈다. 이들은 일본군 포로 감시원과 군위안부 과실송금 보장 등 투자 안정 성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신투자법은 선언적인 내용에 그치지 않고 관세 면제 국내총생산(GDP)에 서 민간소비가 55%가량 차지할 만큼 탄탄한 내수 시장은 유통 서비스업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 소득이 증가하고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 라 군만두 그 당시 재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성형숯을 먼저 제조 하자고 결론을 내렸고 1988년에 회사를 설립했다. 그 당시 나의 국적이 한국인이어서 토지 의 주인은 지금의 아내 이름으로 하고 주주는 양어머니와 지금의 아내이름으로 등록을 하 고 은행거래는 땅을 담보로 그 당시 2억 루피아 융자를 받아서 공장을 설립했다. 하지만 종 류마다 다른 톱밥의 성질을 모르고 겪었던 여러가지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경험해 온 기록 물을 토대로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특허 신청을 했다. 왜 인도네시아는 천연자원 석탄이 많 은데 국가 보조비를 내면서 석유를 연료로 사용할까? 문제는 유연탄이 대부분인 인도네시 아 석탄 생산량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기 때 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 열정이 힘든 상황 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한인 유학생 1호 장근원 선생과 한인뉴스와의 특별한 만남 [특별 인터뷰]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세계화 추세로 해외유학에 대한 문호가 개방되기 전 한국정부가 1970년대 말 국 비 유학생제도를 만들어 해외유학제도를 막 시행했을 때부터의 이야기이다. 더욱이 인도네시아로 목적 지를 정한 한인학생이 매우 드물었기에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자 한 그 뜻과 도전에 대해 들어보자. 한인뉴스 2024년 4월호 I 33 Q 대학졸업후 지금까지의 족자에 정착한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w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끝내고 마침내 박사학위과정에 자동 편입했다. 그 이유 는 대학교 창립이래 처음으로 최단 시간안에 학부 졸업 을 해서 종교성 장관의 특별 지시하에 졸업과 동시 대학 원에 편입했고 또 대학원과정을 이수하면서 규정에 의 해 (대학원 정원 22명 중 종합성적 상위 5위 안의 대학 원생은 주제 논문 발표없이 직접 박사학위 논문 제출로 대신한다) 박사과정을 밟은 것이다. w하지만 잠시나마 순탄했던 박사 학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에 들어갈 즈음에 인상적이었던 인니 유학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 벌어졌다. 유학시절 초기에 한국기 업 ‘미원’에서 판매를 관리하는 아르바이트(1978- 1981) 를 학교강의가 끝난 시간에 틈을 내서 일을 하 고 있었는데 그렇게 인니국적을 가지고 살아온 지가 지금까지 34 년이라는시간이 흘렀지만 나 자신 스스로가 인도네시아 사람이라고 느낀 적은 내가 투표권을 가지고 투표행사를 할 때였고 그리고 제 2 그리고 특히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교육이 많 아지면서 이와 관련된 플랫폼을 활용한 교육이 많이 요구되고 있다. Q 앞으로 계획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w단순한 본인의 꿈이지만 한방과 양방이 같이 공존하면서 상응하는 ORIENTALWESTERN MEDICAL HOSPITAL을설립하고 금융 노사분규 농수산식품유통공사 농업 전문가 뉴발란스 뉴서울 당시 인니동화) 등 한국 기업의 제1차 인도네시아 투자가 본격적으 로 이루어짐에 따라 한국과 인도네시아 간 교역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금융 지원과 시장 조사의 필요성이 커지자 당시 한국 남방개발)와 코린도(Korindo 대규모 무 역수지 적자를 겪으면서 경상수지 적자를 면치못 했다. 인도네시아는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가 증가 했지만 정확한 외채 규모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 로 금융과 자본시장에 대한 관리감독이 소홀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자국의 통화가 고평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정책 당국은 조정을 주저했다. 결국 인도네시아는 외환위기를 맞으며 1997년 10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 구조조정계획 절차를 밟게 됐다.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동시에 발생한 외환위기 로 현지 한국계 기업들은 위기를 맞는다. 1997년 경제 위기와 1998년 이후 민주화 과정의 정치사 2. 제조업 중심의 한국기업 투자 급증: 발전기(1986~2002년)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I 53 글: 신성철(<우정을 엮어 신뢰를 쌓은> 저자) 회적 불안정은 한인 사회 존속을 일시적으로 위협 했다. 특히 1998년 5월 폭동 때는 5천여 명의 한 인들이 비상 탈출해야 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을 귀국시킨 뒤에도 많은 한국계 기업 의 임직원들이 현지에서 근무하면서 인도네시아 직원들과 함께 회사를 정상적으로 가동했다. 이때 부터 인도네시아 관리들이나 현지인들은 한국에 대해 어려울 때 도와준 진정한 친구라고 여긴다. 2) 25만명 고용을 창출한 한국 신발업체 신발산업 가운데 스포츠화의 경우 1970년대는 일본 대상지로 동남아와 중국이 부상했다. 당시 한국과 대만의 신발제조업체들이 대거 동남 아와 중국 등지로 생산기지를 이전시킨 배경에는 나이키 대한민국 국민이 이주를 시작한 지는 50 여 년이 됐다. 외교부 재외동포현황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재외 동포 수는 2017년에 31 대한민국과 인도네시아가 수 교하고 도손(Doson Indonesia) 동 양(Dongyang Indonesia) 동조 동조(Dong Joe Indonesia) 땅그랑은 수도 권의 대표적인 한인 집중 거주지로 부상했고 또 한편으 로 나 스스로가 한국사람이라고 느낄 때는 나 스스로가 부인과 아들 딸들 모두에게 한국의 위대함과 우수성을 알려줄 때이다. Q (한국인 인도네시아 진출에 대해) 인도네시아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서 한국인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의 본인의 위치에서 한국인의 장점과 단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지 모르겠 지만 굳이 말하자면 w장점이라면 근면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매사에 성실하게 임하며 예의를 지킨다. w단점은 너무 성급하고 리복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목재 문화·예술단체 미니마켓은 급증하는 추세다. 인 도네시아 1위와 2위를 달리는 미니마켓인 인도마 렛과 알파마트는 2011년에 매장수가 각각 5 미숙한 인력관리 등으로 현지 사회와 갈등을 빚었 다. 한편 인도네시아로 집중되던 노동집약적 중 소 규모 제조업 투자는 1992년 이후 중국과 베 트남이 신규 투자처로 부상하면서 한때 하락하기 도 했다. 1990년 초부터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 점차 기술집약산업의 투자가 이루어진다. 도자기 생산 공장인 한국세라믹(한국도자기)과 피아노와 악기 제조회사인 삼익인도네시아(삼익악기)가 각각 설 립됐다. 이어 LG전자 민간인 신분의 보도요원 발전해왔는지를 소개한다. 1920년에 인도네시아에 온 조선인 장윤원부터 최 근 건너오는 한국인까지 한인의 삶은 한국과 인도 네시아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의존하며 방산 등 기술· 자본집약산업 투자 증가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극복한 인도네시아 에 투자한 한국 기업은 더욱 안정적이고 다양한 산 업으로 확장한다. 2000년 이후 봉제업체가 양적 으로 다시 증가하고 금융 봉제 부가가치세 면제 브레베스 등지에 대규모 생산기지를 조성하고 있 다. 2016년 이후 한국계 신발업체의 인도네시아 내 이전(반뜬주에서 중부 자바주 또는 수도권에 서 수방과 가룻 등 서부 자바주 외곽지역)이 가속 화돼 화승 사대 주의 관념을 가지 고 있는 것이다. Q (한국인 인도네시아 진출에 대해) 한국교육과 의료(병원) 부문에서 인도네시아에 진출하고 싶어합 니다. 이들 부분에서 한국계 기업이나 한국인이 움직일 공간이 있나요?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w최근 들어 가상공간 플랫폼인 메타버스(Metaverse)가 다양한 곳에 쓰이면서 비대면 시 대의 미래교육과의 연결을 생각해보는 기회 삼 성전자 삼성전자 상대방에게 너무 쉽게 화를 내는 것이고 석유와 목 재 석유화학 선교사 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한인들이 주로 종사하는 업종은 봉 제 선진국과의 통상마찰 등 국내외적 경영 여건의 나빠졌기 때문 이다. 당시 동남아 국가 가운데 인도네시아는 노 동력이 풍부하고 비교적 임금이 낮았을 뿐 아니 라 셋째는 장남으로 UGM 의대 일반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막내는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다. 모든 가족이 아직 한집에서 모여 살고 있는데 소득세 감면 소비자들은 전통시장보다는 쇼핑의 편리함을 제공하는 현대적인 유통 채널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19년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현대 적인 유통 채널 가운데 하이퍼마켓과 미니마켓( 편의점)은 확산 추세인 반면 손녀해서 총 9식구가 한집에서 살고 있다. 그냥 일상적인 자바 사람들의 문 화생활 속에서 평범하게 살아오며 자랐다. 아이들은 인도네시아 일반 초등학교를 나왔고 슈퍼마켓은 축소되 고 있다. 2018년에만 헤로 슈퍼마켓이 26개 점포 가 문을 닫았고 스타윈 스타윈 (Starwin Indonesia) 신 발회사 직원들의 소비는 땅그랑 지역경제에 활력 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중 국과 베트남이 새로운 생산기지로 부상하였고 신발 신한금융투자 신한인도네시아은 행 아들 2을 두었으며 아디다스 아디다스 등 글로벌 브랜드의 빅바 이어들이자 브랜드 마케팅 기업들이 개발도상국 인 동남아와 중국 등지로 글로벌 밸류체인을 재편 했다. 인도네시아는 1990년 전후 한국의 중소자 본이 가장 선호한 투자대상국으로 아식스 등 글 로벌 브랜드 제품을 연간 1억3 아직까 지 가족이 흩어져서 살아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족자의 지금 집에서 자랐다. w한국 문화를 접하는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가 같이 거의 20년을 생활하셨기에 기본적인 한국 예의나 문화풍습을 접할 수 있었다. 그 리고 휴가 때마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 집에서 같이 한국 음식이나 문화풍습을 배우는 기회 를 가졌다. Q 본인이 스스로 인도네시아사람이라고 느낄 때와 한편으론 한국사람이라고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w인도네시아에 도착한지 12 년째 되던 1990년도에 인도네시아 국적을 취득했다 압두라흐만 와히드 대통령 등 6년 동안 대통령이 3차례 교체되는 과도기적 혼란을 겪는다. 2004년 최초로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수실로 밤방 유도 요노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정국과 치안이 안정되 고 대(對) 중국 자원수출이 크게 증가하면서 연 평 균 6%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다. 유도요노 정부는 국내외 투자자에 대한 규제 완화 정책을 폈 고 양국 간 외교와 경제 교류의 틀 안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장기 적으로 체류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60년 대 말 이후 양국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경제 협력이 한국-인도네시아 우정의 50년 여정 (6) 한인뉴스 2024년 6월호 I 55 긴밀하게 진행되고 있고 양은 풀을 먹고 자라는데 어묵 등을 선보였다. 이 행사를 주관한 김창범 대사는 “지방 사람들은 상대적으 로 한식을 비롯해 한국문화를 접할 기회가 잘 없 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이 지방까 지 신경 써주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다음 호에 계속 여기에 지방은행까지 포함하면 1 연장 59km)로 현대건설이 1973년 수주해 1978년에 완공했으며 지금도 현지에서 훌륭한 토목공사로 꼽힌다. 우리나라가 산유국의 꿈을 실현하게 한 나라도 인도네시아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이 1970년대 두차례 석유파동으로 국가경제가 흔들릴 때 영 화감독 완구 등 노동집약산업을 중 심으로 인도네시아의 저임금 우리 인간은 생선이나 짐승들이 만들어 낸 단백질을 섭취하 면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상관 관계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 다” 라고 대답했었다. w변화를 찾아서 새롭게 도전한다” 가 그 당시 내 가슴을 뛰게 했고 위안소 운영자 등이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 소속이든 아니든 가릴 것 없이 낯 선 땅에서 굶주림과 고된 노역과 차별 대우를 견 뎌야 했다. 조선인이지만 국적은 식민통치국인 일본으로 되 어있었고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이들은 조선인 이면서 일본인이기도 하고 인도네시아인이기도 한 다중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조국의 독립과 개인 의 생존을 위해 각기 다른 선택을 한다. 일부는 스 스로 조선독립을 위한 비밀결사조직을 만들고 유통 이것이 학생 VISA를 가지고 있으면서 불 법으로 일을 했다는 제보가 중앙정부와 이민국에 신고 되면서 그동안 나를 도와 주셨던 양부모님께도 잘못 불 이익이 될까 봐 두려워 그만 학위취득을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그 당시 나를 도와 주셨던 총 장님이 인도네시아 종교성 관리 대학 국장을 하고 계셨 기 때문이다) w그렇게 하면서 학위 취득을 포기한 후 자카르타로 넘 어가 그동안 알고 지내던 중국 상인들과의 접촉을 가 졌다. 나는 열심히 한국제품을 취급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알고 지내던 전자통신기 상회이 며 NATIONAL-PANASONIC 과 INTECOM AIPHONE을 취급하는 대리점 Mr. Yaw (PULAU MAS INDAH) HARCO 에게 한국상품을 알게 되면 당신도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한국의 인터폰을 소개해 주었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상품은 전혀 진출을 못하고 있었을 때였다. 인터폰을 소개한 것은 그 당시 내가 알고 있는 분야로 성능이나 모 델이 뒤지지 않고 가격 경쟁력에서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샘플 900불로 시작한 시장이 2개월만에 9만불이 되고 4개월이 되던 때에는 30만불로 주문량이 뛰어올랐다. 이 렇게 되다 보니 NANTIONAL-PANASONIC 과 AIPHONE 총판 대리점에 문제가 생겼 다. 그 당시 이는 한국기업의 해외투자와 인 도네시아 진출에 큰 교훈이 됐다.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신발산업 이 2005년 파크랜드(PT Parkland World Indonesia)의 풍원제화 인수를 계기로 현지 한국 신발제조업계가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 어 창신(Chang Shin Indonesia)과 태광(Taekwang Industrial Indonesia) 등 대규모 한국 신 발기업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신발업계가 제2의 도약기를 맞는다. 2004년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집권 후 인도네시아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고 대외 여건이 변화하면서 제조업이 회복하기 시작했고 이들 유통회사들은 인도네시아 대도시 식품 유통 점포에 납품하거나 한국인이 근무하는 지방에 있는 회사에 한국식품 을 공급하고 있다. 2019년 8월 주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이 푸드 트럭과 홍보 버스를 몰고 ‘자바섬 횡단’이라는 색다른 공공외교 이벤트를 진행했다. ‘한국 친 구 인 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이나 현지 화교들과 협력 해 인도네시아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다. 일제 패 망 후에는 일본인에 대한 인도네시아인의 보복공 격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일본인과 분리하면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더 강조했다. 한편으론 일제 패망 후 네덜란드가 다시 인도네시 아를 점령하려 하자 인도네시아 민병대와 일본군 잔류자들과 협력해 네덜란드에 저항하는 인도네 시아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1940년대에 온 조선인 가운데 대다수는 일본이 패망한 후 2~3년 사이에 조선으로 귀국했지만 소 수는 남아서 인도네시아에서 큰 족적을 남긴다. 그 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1960년대에 오는 현대 한국인과 조우한다. 1) 인삼 상인 인삼의 나라 조선답게 인도네시아 체류 한인의 선 봉은 인삼 판매상들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싱가포르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 시아)로 가기 위해 여권 발급을 기다리던 한국인 인삼 판매 행상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930년에 싱가포르에서 인삼 행상을 했던 한인이 동아일보 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바타비아(현 자카르타) 에 한인이 체류했으며 이들의 상당수가 인삼 행상 임을 알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인 도네시아 신발업계가 어려움에 직면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3년 이후 인도네시아 최저임금 인상율이 연간 10%를 상회함에 따라 인도네시아 에서 생산비 절감 효과가 낮아진 동시에 한국에서 더 가까운 중국과 베트남이 대안 생산기지로 부상 했다. 하지만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을 계기 로 중국의 생산원가가 급속도로 인상되면서 중국 54 I 한인뉴스 2024년 11월호 에 진출했던 한국계 기업 중 일부는 한국으로 U턴하거나 인도네시아로 재이전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계 신발제조 투자기업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반뜬주 땅그랑을 중심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했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 는 약 5%p나 된다. 더욱이 2억 8천만명의 세계 4 위 인구대국으로 성인 인구의 계좌보유율이 40% 정도에 불과해 성장 잠재력이 높기 때문이다. 하 지만 어려운 금융환경이 장애물이다. 인도네시아 에는 시중은행 격인 상업은행이 120여 개에 달하 고 인도네시아 한인사회도 이런 흐름을 따르고 있다. 1. 식민지 조선을 떠나 또 다른 식민지 인도네시 아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한 조선인들 1920년부터 1960년대 초까지를 이 책에서는 한 국인의 인도네시아 진출 태동기로 분류한다. 하지 만 이보다 앞서서 적도의 자바섬과 말라카해협 인 근에서 활약했던 인삼 상인에 대한 기록은 1890 년대부터 존재한다. 20세기 초에 인도네시아로 건너온 한인들은 일본 과 관계가 있다. 인도네시아 한인 1호로 불리는 장 윤원은 1919년 3·1 운동 직후 일제의 탄압을 피 해서 중국을 거쳐 인도네시아로 갔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인도네시아에 온 조선인들의 대부분은 자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본제국의 강압으로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전 쟁을 벌이며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했고 인도네시아는 한류 콘텐츠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 가 가운데 하나이고 인도네시아에서 ‘대한민국 최초’ 역사를 쓰는 한국인 논설위원칼럼 논설위원 신성철 일본 자동차기업이 독점하다시피한 인도네시아 시장에 뛰어 든 현대자동차가 2022년 3월 인도네시아 최초 전기차 공장을 세우고 현지 생산 전기차인 아이오닉5를 앞세워 최대 전기 차 판매기록(2023년 1~7월)을 달성했다. 앞서 2019년 산유국이면서도 수입국인 인도네 시아에서 현대엔지니어링이 인도네시아 국영 석유회사인 뻐르따미나(Pertamina)로부터 우리나라가 현지에서 최초로 총사업비 6조원 규모의 정유공장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현대 엔지니어링 단일 플랜트사업 기준으로도 사상 최대 규모이다. 이같이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에는 최초와 1호가 많다. 오늘날 같이 양국이 긴밀한 관계를 이룩한 데는 선배들의 피와 땀의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가 한국 기업의 해외 시장 개척에 발판을 마련해준 의미있는 나라라는 것은 다음 사례를 통해 증명된다. ‘제1호 한국 ‘해외투자사업’은 1968년 코데코(Kodeco 인도네시아에서 한국계 신발제조업체로서 첫 투 자회사인 코린도그룹의 신발사업부 가루다인다와 (PT. Garuda Indawa 인도네시아인이 가장 가고 싶은 나라 1위로 한국을 꼽았다. 그리고 60%가 넘는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국을 자국 발전 모델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답한 것 으로 나타났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가장 신뢰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 미국과 중국 간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국제 환경 변화 속 에서 인도네시아와의 협력의 중요성은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 의 동력은 무엇보다도 경제와 비즈니스이다.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목재산업으로 시작해 경 공업인 섬유·봉제와 전자산업 등 제조업 분야의 협력을 넘어서 일명 이글)가 1980년 중 반기에 가동을 시작해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던 만 큼 해외투자에 경험이 없었던 한국 신발업체들은 가루다인다와의 선례를 공유할 수 있었다. 한국계 신발제조업의 인도네시아 진출은 1985 년 가루다인다와가 첫 테이프를 끊은 이후 일반특혜관세제도(GSP) 수혜를 받고 있었던 만큼 한국의 노동집약적 산업의 투자가 몰렸다. 하지만 영세한 자본의 중소기업이 다수 진출하면 서 현지 언어와 문화의 이해 부족과 장시간 노동 임금 상승 자 동차 자동차 등 기간산업 분야와 플랜트 건설 및 사회간 접자본시설 확충 부문에도 대거 참여했다. 다양한 산업의 진출과 더불어 현지 한국계 기업을 주로 겨 냥한 손해보험 서비스를 목적으로 1996년 삼성화 재(현지법인명 PT Asuransi Samsung Tugu)가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이어 1997년 KB손해보험 (KB Insurance)과 1998년 메리츠화재(Meritz Korindo Insurance) 등이 각각 진출한다. 1990년대 들어 수출 호조로 인도네시아 경제는 내수도 증가하고 주식시장과 부동산 부문 모두 활 황을 보였다. 하지만 경기 과열에 따른 물가 상승 과 부동산 시장 등의 거품이 발생했고 자동차강판 생산 설비도 구축 할 계획이다. 아울러 포스코는 인도네시아의 신수도 건설 사 업에도 참여를 추진하고 있다. 이 사업에는 한국 최고의 스마트시티로 평가받는 송도국제도시 개 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포스코건설 등 그룹사도 참여를 검토 중이다. 롯데케미칼이 인도네시아 반뜬주에 약 47만㎡ 면적의 부지에 납사분해설비(NCC) 등 대규모 석 PT Lotte Chemical Indonesia(LCI)는 Cilegon City 52 I 한인뉴스 2024년 12월호 유화학단지 건설을 진행 중이다. 총사업비만 39 억 달러(약 5조4300억원)로 롯데그룹이 진행하 는 해외 투자 중 규모가 가장 크다. 2025년 완공 예정으로 연간 에틸렌 100만t 자바에 오다!’라는 뜻의 현지어 ‘뜨꼬 낭 자와’(Teman Korea(Teko) Nang Jawa!)라 고 이름을 붙인 이벤트는 한국문화원과 관광공사 잠수함 사업을 통해 방산협 력을 꾸준히 하고 있다. 이어 ‘단군 이래 최대 무 기개발사업’이라 불리는 한국형 전투기 개발 사 업을 인도네시아와 공동개발하고 있다. 2) 기업금융에서 소매금융 이어 디지털금융으로 1960년대 후반에 코데코(KODECO 재외동포와 한인도 한 예 가 되겠다. 인도네시아에는 1970년대에 진출해 지금은 여든 살을 넘긴 한인 1세대부터 그들의 자녀들 재인니 한국상공회의소(Kocham)와 재인니한인신발산 업협의회(KOFA)를 중심으로 다시 반등의 기회 를 마련했다. 최근 자바섬 내 최저임금 차별화의 이점과 조코 위도도 정부(2014~현재)의 국토 균 형 발전 정책에 부응하여 한국 신발기업은 중부자 바 주도 스마랑 주변의 즈빠라 지역과 살라띠가 재인도네시아 외식업협의회 가 공동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푸드트럭이 함 께 달려 머무르는 도시마다 현지인들에게 떡볶이 와 닭강정 전자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과 한인을 대 상으로 하는 자영업이지만 더불어 철강 정 보통신기술(ICT)과 한류 관련 산업 등 다양한 산 업이 진출하면서 인도네시아 한인들의 수는 지속 적으로 증가했다. 외교통상부의 재외동포영사 통 계의 보수적인 추산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동포는 2009년에 3만 700명으로 2005년의 2만 3 제3 지망학과를 기계공학과와 화학공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이에 대 한 나의 답변은 “원래 지원하고 싶었던 학과는 의예과였지만 공업고등학교 출신은 힘들 다고 해서 이공대를 지원했다. 그 중에서 식품공학을 택한 것은 우리 인간의 식생활과 건강 에 상당히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고 이 분야가 확장범위가 나머지는 그냥 형식적으로 적 어낸 것”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학과장님을 비롯한 교수님들의 얼굴이 다소 싸늘 하게 보였다. 두번째 질문은 학과장님이 하셨는데 식품공학을 전공하면 어떤 분야에 관심 을 갖고 있나? 였는데 “왜 바다 생선과 민물공기들은 플랑크톤을 섭취하고 또한 소나 염 소 제3장 한인들 (1) 들어가는 글 인도네시아에 한인(조선인)이 진출해 체류한 지는 100년 이상이 됐고 제조업 분야에 스마트 팩토리 기술을 접목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메이킹 인도네시아 4.0’ 정책에 기반한 제 조업 경쟁력 강화로 현재 세계 16위 경제 규모를 2030년까지 10위로 끌어올리겠다는 목 표를 세웠다. 인도네시아의 제조업은 의류와 섬유 제철과 석유화학은 물론 전기차 생태계 구축 및 신수도 건설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에 우리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 를 이어가면서 양국간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지난해 2023년 한국-인도네시아 수교 50주년을 맞아 ‘한국-인도네시아 포괄적 경제 동 반자협정’(CEPA)이 발효돼 양국의 협력관계는 입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는 풍부한 노동력과 천연자원을 바탕으로 한 제조업 강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경제개혁을 단행하면서 1차 제트 훈 련기 T-50을 가장 먼저 사준 나라이다. 또 우리가 생산한 잠수함을 가장 먼저 구매한 국 가(2011년 3척 구매계약 체결)이며 조립금속 등 ‘중간기술 제조업’과 철강 좀 더 체계화된 한방교육을 통해서 한의 과대학을 설립하고 싶은 것이 꿈이다 종합상사 지금 현재는 저와 아내 외에 두 딸과 두 아들 그리 고 사위와 손자 지도 교수님들과의 면접에서 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질문은“공업고등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교 학과 제 1 지망으로 식품공 학과 지지부진한 5%대의 경제성장률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문 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는 외국자본의 유 치라는 결론에 다다른 인도네시아 정부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더 나은 투자 여건을 제공하는 내 용을 담은 신투자법(Undang-undang tentang Penanaman Modal 2007)을 제정한다. 신투자법은 직접 투자에 있어서 외국인 투자자 와 내국인 투자자가 법 앞에 동등한 대우와 동등 한 기회를 부여하도록 규정하여 직접 투자와 관련 한 내외국민의 차별을 철폐하도록 하였으며 직종 짧은 기간 동 안 노동집약산업을 중심으로 ‘처음이자 집중적 인’ 투자가 이루어졌다. 1980년대 후반 당시에 한국은 중국과 베트남과 수교 이전 시기였던 만큼 부산에 밀집되었던 신발 제조업체들이 이전을 고려한 국가는 태국과 인도 네시아였다. 앞서 인도네시아에는 1960년대 후 반부터 원목개발과 합판제조 창신 철강 초고성능 타이어 초음 속 고등훈련기 T-50 총 35 억 달러 매출액을 기록해 인도네시아 수출실적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최근 취 업 등을 통해 건너오는 20~30대 청년들까지 다양 한 연령대와 성장 배경을 가진 한인들이 공존한다. 2024년 현재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경제활동을 위 해 이주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는 유학생 출신 지역 등에 따라 다양한 모임에 활발하게 참여한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업무와 일상생활에서 인도 네시아인과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로 소통한다. 동남아지역연구자 엄은희 박사는 인도 네시아 한인이 다른 지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현 지화 수준이 높다고 평가하고 인도네시아어 사용 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인도네시아에서 현지 사회 와 문화를 존중하고 이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 력한다.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인도네시아에 한국 을 소개하고 한국에 인도네시아를 소개하는 양국 인적 교류의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글은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에게 한인 사 회가 어떻게 형성됐고 출신 학교 코 이카와 굿네이버스 등의 봉사자 코로나19 팬데믹 시기를 지나며 17 코리네시아 코리네시아(Korinesia) 금강제화 등이 대규모 생 산설비를 갖추고 주문자상표 생산방식(OEM)의 체제를 구축했다. 초창기 진출한 신발기업들은 동 양을 제외하고 모두 자카르타 외곽 땅그랑 지역에 공장을 세웠다. 1992년 한국이 중국과 베트남과 수교하면서 두 나라는 한국의 주요 투자지로 부상했다. 이를 계 기로 글로벌 신발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큰 딸과 사위는 각각 UGM 의대병원에서 피부비뇨기과와 정형 외과 전문의를 하고 있고 둘째 한인뉴스 2024년 4월호 I 35 딸은 아직 UGM 상경대 경영대학원 학생이고 태광 등 대기업들이 이러한 대이동을 주도하고 있다. 아울러 인도네시아 내 한국계 신발업체는 노동집 약적인 산업에서 생산시스템을 자동화하는 장치 산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2020년 현재 KOFA는 신발제조회사 20여개 회원사와 자재 및 임가공 회원사 180여개 등 총 200여개 회원사가 참여하고 있다. 회원사는 한국 인 근로자 2천여명과 현지인 근로자 25만여명을 고용해 나이키 태화 등이 2005년을 전후하여 폐업 절차를 밟는다. 인도네시아 진출 초창기 한국 신발기업들은 반 뜬주 땅그랑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식 대량생산 제 조라인 설비를 갖추고 OEM 방식의 유명 브랜드 주문을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직접 경영방식을 채택한 우리 신발기업은 해외투자 경 험이 없었고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노 동자와 갈등과 마찰을 빚어 적지 않은 사회문제로 부각되기도 했고 태화(Tae Hwa Indonesia) 토지세 감 면 등 투자자에게 실제적인 투자 혜택을 부여하는 내용 또한 포함하고 있다. 2007년 신투자법을 공포함과 동시에 인도네시 아 정부는 투자 금지 분야와 조건부 투자 분야를 정리한 새로운 네거티브 투자 리스트(Presidential Regulation No. 77 of 2007)를 발효시킴으 로써 직접 투자와 관련된 새로운 투자 관련 법률 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투자법과 네거티브 투자 리스트로 구성되는 직접 투자 관련한 기본 체계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2007년 KEB하나은행이 현지 소매은행 인수 를 시작으로 우리소다라은행 통신장비 수요는 매월 200만 불이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시장점유율 7% 점 유하게 되었기 떄문이다. 그러니까 정식 마케팅을 한 고작 3개월만에 시장 점유율 7%까지 파고든 것이 상당히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w그 후 또 다시 불거진 문제는 본인이 학생VISA를 가지고 불법으로 무역업을 했다는 비 밀 제보가 Mr. Yaw가 관리하는 비밀 정보경찰로부터 알게 되었고 가능하면 빠른 시간내 에 NATIONAL-PANASONIC 총판 회사인 PT. INDO TIGATAMA사장을 만나라고 했 다. 문제는 COMMAX 대리점을 넘겨주든지 아니면 강제 추방을 할 것인지 잘 생각해 보라 34 I 한인뉴스 2024년 4월호 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상인 Mr. Yaw와 상의한 후 신변안전을 위해 이 사업을 포기하자는 제안을 받고 사업을 놓으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정리해야만 했다. w그후 한국에서 제안을 받은 인도네시아 나무톱밥을 이용한 성형숯이나 WOOD PELLET 생산을 부탁 받고 투자 자산의 국유화 금지 투자도 크게 증가하면서 호황을 구가했다. 우호적인 정치 투자보장협정(1991년 2월) 등 을 통한 체계적인 제도 구축에도 힘입은 바 크다. 1990년대 초반에 기술집약산업인 전자산업과 바 이오산업의 진출이 시작되어 오늘날 LG전자 파크랜드 팬데믹이 끝나고 양국간 투자와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2023년에 25 평균 연령은 29 세로 젊은 인구구조를 갖고 있는 역동적인 소비시 장이다. 아울러 소득 증가에 따른 중산층의 증가는 소비시장을 확대하고 있으며 폐업한 한국 봉제업체 출신의 관리자들 이 귀국하지 않고 창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정부는 2006년 1 폴리프로필렌 25만t 등이 생산된다. 인도네시아와 한국은 국산 훈련기 KT-1 풍부한 자원 및 적 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에 힘입어 한국기업 의 현지 투자가 급증했다. 이는 이중과세방지협정 (1988년 11월) 프라타마 프라타마(Pratama Abadi Industri) 프로필렌 52만t 한 일마트 한국 등 제조업 선진국을 통한 기 술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한국 해외원 조의 첫 사례이다. 한국은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된 유일한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이 개발한 프로펠러형 훈련기 KT-1을 최초 수입한 국가이며 한국남방개발)의 원목개발사 업이다. ‘한국 최초의 제조업 해외투자는 1973년 대상(당시 미원)의 인도네시아 현지 공 장 건설이다. 인도네시아 최초의 고속도로는 자카르타~보고르를 잇는 자고라위 고속도로 (Jagorawi Toll Road 한국수출입은행이 1992년 인 도네시아에 종합금융(리스) 현지법인 인도네시 아 한국수출입만디리은행(PT KOEXIM Mandiri Indonesia)을 설립했다. 1992년 이 은행 설립 당 시 인도네시아 측 합작은행은 만디리은행의 전신 인 방크다강느가라(Bank Dagang Negara)였다. KDB산업은행이 2019년에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에 사무소를 열었다. 앞서 코린도그룹의 클레몽종 합금융(PT Clemont Finance)이 1989년 설립해 영업을 하고 있다. 3) 한류 열풍을 타고 비상하는 유통·식품 산업 인도네시아는 2020년 기준 2억8천만 인구 가운데 생산가능인구는 전체 인구의 68% 한국의 스마트 팩토리 기술이 해답이 될 수 있다는 정책적 제언이 나오면서 한국과 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제 한국과 인도네시아는 수교 반세기를 맞았다. 양 국은 외교와 국방 한국투자증권 등 증권사가 진출해 있다. 인도네시아에는 2023년 현재 7개 은행 한식당 등이 설립됐다. 한인 중 일부가 가족 을 동반해 진출함에 따라 자녀들을 위한 학교가 설 립된 것. 인도네시아 한인들은 한인회를 필두로 종교단체 한인 슈퍼 한인사회 가 인도네시아에서 최대 외국인 공동체가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현지 통화의 가치 하락 덕분에 소 자본 창업이 가능해졌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 서면서 봉제 부문의 인도네시아 투자가 다시 성황 을 이뤘고 해외투자 자본의 성격도 좀더 자본집약 적 산업으로 전환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석유 화학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금 융지원이 절실하게 되었다. 1990년에 가장 먼저 현지법인을 설립한 은행은 한국외환은행이다. 이 어 1992년 한일은행(현 인도네시아 우리소다라 은행)이 현지법인을 설립한다. 1997년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인도네시아는 이듬해 5월 수하르토 정권이 붕괴된다. 이후 민주 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개혁시대(Era Reformasi) 를 맞는다. B.J 하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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