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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판 단 위로 계란을 사던 한국과 다르게 여기에서는 kg 으로 알을 팔고 있다. 1kg을 맞추기 위한 아주머 니의 깡마른 손이 부지런히 알 무더기를 오고 간 다. 999g으로 맞추던 눈금은 이제 1.02g으로 맞 춰진다. 나도 익숙한 듯 “Terima kasih 2차 제조업 3차 서비스 산업 4차 디지털 산업 등으로 단계별로 산업이 발전했지만 4차 산업이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에 살아도 언어와 문화 Bekasi) 한인뉴스 2025년 2월호 I 57 마다 오던 딱 만물상이다. 대무대 위에는 꽃잎에 한 바구니 놓여있다.(힌두교인들이 기도할 때 쓴 다.)향을 팔기도 하고 bu”인 사를 나눈다. 코로나 상황은 더욱 심각 해졌다. 등교 수업이 금지가 되고 온라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학교를 안 가다니... 두 아이들은 좁은 원룸을 답답 함을 놀이 삼아 방을 정글로 만들었고 “Namo Buddhaya” (불교 인사) “Om Swastiastu” (힌두교 인사) “Salam Kebajikan” (유교 인사)” 등 각 종교의 인사말을 2~3개 섞어서 대중연설을 시작한다. 비평가들은 “종교분쟁은 종교가 이유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2000년대 아체에서는 강성 이 슬람과 온건 이슬람 주민 간 충돌 “Shalom” (기 독교 인사) 가습기도 각 종족을 대표하는 아나운 서 즉 외모가 다른 사람들이 표준 억양과 발음의 인도네시아어로 뉴스를 전했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와 인도네시아인들을 보면서 머리를 도끼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가 있다. 도끼로 머리를 맞으면 아프고 상처가 남지만 허물어진 경계를 넘는 새로운 생각의 촉수 도 생겨난다. 이를 통해 내 나날의 삶과 사고가 풍요로워지기를 바란다. [끝] 간식을 걸어 두었다. 하늘길이 열리면 바로 나갈 거라는 나도 믿지 못 하는 상황을 이야기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후 본가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 일주일 만 에 돌아온 문 앞은 또 다른 불평을 담은 여러 개 의 편지가 붙어있었다. 빈 집이었는데 말이다. 그 것도 일주일 동안. 모두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고 싶어 했던 같이 놀던 새 노래도 들려주었다. 나무 고아원. 버려진 나무들이 모여 심어진 그 곳에서 하루하루 희망을 찾고 겨울 여행을 시작한 이래 남편과 헤어진 지 12개월만에 드디 어 상봉을 하게 되었다. 살아있다는 현재형이 너무 감사했던 그때 고대 중동 사막에서는 현대 한국과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체계 가 형성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도네시아에 살면서 들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무슬림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1990년대만 해도 한국에서 접 하는 이슬람과 무슬림은 서구 언론이 보도하는 내용과 건설 노동자들이 경험한 아랍국가의 이슬 람이 대부분이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 골까르당과 연합개발당은 인물 중심의 여러 정당으로 갈라졌다. 한편 투쟁민주당은 수많은 성향의 집단이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총 재를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돈이 있어도 바나나를 마음껏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절대적인 공급 부족. 1990 년대 말 파푸아에서는 바나나가 귀했다. 파푸아는 토양이 척박하고 농사가 막 시작된 상황이어서 바나나와 파파야 같은 열대과일조차 귀했다. 도시처럼 사람들이 많은 지역에서 바나나와 파파야 를 먹으려면 재배하거나 타지역에서 재배한 것을 사와야(유통) 한다는 것. 당시에 한국은 농사도 유통도 발달해서 어디서나 비용을 지불하면 사과와 배를 마음껏 살 수 있었으므로 그들은 교역하면 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국가가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이슬람교 신자 즉 무슬림 수가 가 장 많은 국가이지만 세속국가이다. 세속국가는 종교국가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뒤 섞였다. 1분 거리로 걸어 다니던 아이들의 학교는 원룸의 위치로 25분이 걸리게 되었고 차는 이미 판 뒤였다. 열 평 남짓 원룸은 전면의 절반이 창으 로 되어있었다. 창에서 쏟아지는 빛을 가릴 커튼이 쳐지지 않은 아무도 살지 않았던 신축 원룸이었다. 급하게 얻 은 원룸은 햇빛 이외의 물도 천장에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장을 적실 뿐이었다. 그 다 음 날에는 구멍 뚫린 풍선에서 쏟아지듯 흐르기 시작했다. 아침 기존의 생각을 뒤흔들어 새로운 시각을 열 어주는 강력한 도구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후에 많은 작가와 문학 평론가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저명한 작가이자 평론가인 박웅현이 자신의 저서 『책은 도끼다』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널리 알려졌다. 내 입장에서 ‘책’을 ‘인도네시아’로 바꾸면 기타 이념과 종교 세력을 민족주의라는 이름으 로 모은 민주당(PDI. 현 투쟁민주당 PDIP)로 나눴다. 52 I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그래서 이념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아닌 종교적으로 이슬람과 비이슬람(민족주의)으로 나뉘는 것. 수하르토 대통령이 물러나고 개혁 시대에 접어들면서 나는 외국으로 나가기 위해 안 간힘을 쓰고 못 나가고 있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 했다. 그곳이 어디든 낯선 땅에 있는 배우자를 보 지 못하고 나는 주 의를 주느라 협박을 하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옆 집은 봐주지 않았다. 문 앞에 포스트잇이 테이프 로 붙여진 채 4장이 붙어있었다. 그 다음 날에는 찢은 공책이 붙어있었다. 연이어 나는 반갑지 않 은 러브레터를 받게 되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피 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했다. 죄송한 마음을 담아 편지도 써보고 나무에 새순이 나는 모습을 마스크에 갇힌 코로 흡입했다. 그 날 이후 새로운 백신이 나무에서 나 와 내게 신성한 면역력을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그 힘으로 2020년10월 20일 지난 난로도 필요없다. 대신 거의 모든 음식을 냉장 고에 보관해야 한다. 쌀을 상온에 두면 쌀벌레가 생기거나 곰팡이가 생긴다. 옷장에 제습제를 넣 “인도네시아는 도끼다” 한인뉴스 2024년 8월호 I 51 어두어도 옷을 입을 때 눅눅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현지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샤워한다. 한국 에서는 피부가 건조해진다고 샤워를 자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렇게 하면 ‘땀 띠’와 ‘습진’ 같은 피부질환이 생길 수 있다. 나는 성경 속에 묘사된 고대 이스라엘의 풍습들 이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늘 내게 좋은 물건을 현지인에게 보다 싸게 주 었다. 그게 잘못되었을까? 2년이 지난 어느 날 대걸레 대로를 벗어나면 저 소득국가의 풍경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자연환경이 다르면 생활방식이 바뀐다. 일 년 내내 덥고 습한 열대기후인 인도네시아에서는 여 름옷만 있으면 된다. 겨울옷도 대부분 국가는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있고 한국도 세속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정치면에서 민주주의 국가이고 경제면에서는 자본주의국가이다. 종교국가는 아니지만 이슬람교를 포함해 개신교와 가톨릭 도로에는 태평양전쟁 시기부터 1990년 최신 모 델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자동차 모델이 모두 달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생활에서는 자바어 나 순다어 같은 종족어를 쓰고 공용어는 인도네시아어(Bahasa Indonesia)다. 당시에 저녁 6시 에는 모든 채널에서 국영방송국이 제작한 동일한 뉴스를 방송했는데 도시 소비자 눈에는 농사도 유통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국가가 한국과 같은 단계로 발전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는 전국에 유선전화망이 설치되 기 전에 무선전화로 이동했다. 자기 집 전화번호를 가져보지 못하고 개개인이 핸드폰번호를 갖게 된 것이다. 인터넷도 유선망이 도시를 중심으로 깔리다가 이동통신으로 넘어갔고 독재자 수하르토 두 달... 그리고 기 약 없는 날이 늘어졌다. 원룸은 재계약을 했다. 전 세로 얻어야 할까? 워킹맘으로 지내면서 힘들다고 불평을 하며 살 았었다. 아침마다 아이 둘을 혼자 챙겨 한 녀석은 어린이집에 한 녀석은 학교에 넣고 둘째 아이는 유모 차에 넣고 나는 세계 여행을 떠났다. 한국인이 없 는 곳에서 생경한 다른 나라의 사람 사는 모습들 을 아이들과 나누고픈 욕심이었다. 날씨는 촛불에 세워두면 촛농이 떨어질 듯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이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기 싫은 장면과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혼신의 힘을 다해 눈에 또는 누가 걸린 것인지 알아내느라 동전을 던졌다. 사람이 무서웠던 그 때 모두 얼굴에는 눈만 보 이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가 코로나에 걸렸는 지 서로 티를 내지 않느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협박을 이겼다. 혹여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매일매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없던 위경련이 생긴 것은 그 즈음이었다. 일단 2달 을 견디기 위한 원룸을 급하게 구했다. 파사르의 두 번째 집은 건너편의 계단 옆에 붙어 있는 가게다. 물병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이 먹는 것은 허용했다. 2000년대 초반에 테러 사건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무슬림은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테러의 피해자들이었다. 실제로 인도 네시아에 처음 이슬람을 전파한 사람들은 인도와 중국 그리고 아랍 무역상들로 무엇을 사고 싶냐며 먼저 나가 온 해리 아저씨. 본인의 가게의 물건이 좋지 않으 면 이웃 가게의 야채를 품삯 없이 구해 주었다. 팁 이라도 주려고 치면 민주투사 메가와티 밥을 하다 불 교와 유교 불도 어둡 지 않았다. 컨테이너로 숟가락 하나까지 꽁꽁 싸 매어 보냈던 나는 처음에는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 말아지는 실리콘 도마를 비닐봉지... 어릴 적 트럭에 싣고 우리 동네에 5일 평범한 일상의 위로 Kenyamanan dalam Kehidupan Sehari-hari yang Sederhana [인도네시아 이야기] 공모전 일반부 최우수상 최하진 (ACS Jakarta 국어 교사 새 집을 멋진 나의 애마를 헐값에 넘겨 처분했다. 컨테이너로 짐을 보내고 세 달이 지 나고 나는 나무 도마를 주문했다. 스텐 젓가락과 숟가락을 골랐다. 기약이 없어짐을 느꼈기 때문이 다. 아직 내 곁에 아이들이 있음을 수업을 봐주다 청소 빨래를 하다가 엄마라는 사명 감으로 정신없이 버티고 있었다. 그 와중 옆집에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온 거다. 젊은 아가씨였다. 그 사람도 코로나로 인해 자택근무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아이들은 갑갑해서 뛰어 댔고 숨도 쉬었다. 상쾌한 나무 향기가 답 답했던 원룸 냄새를 날려버렸다. 가슴 벌려 뻗은 가지는 답답했던 내 마음을 하나 하나 접었던 가 지 펴듯 열어주었다. 두려운 것은 인간이 만든 것 이었지 시끌벅적하다. 수마트라에서 건너온 아라비 카의 초콜릿 향과 로부스타의 묵직한 쌉쌀 함이 눈으로 보이는 이곳에 왔다. 정신을 밝히는 신비의 음료는 반지하 공간의 습도 어린 땀 냄새 와 같이 뒤섞였다. 낮이었고 먼지 낀 전등의 깜박 임에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휴 우~”하 고 깊은 숨을 마시고 한 사람 겨우 지나갈만한 틈 을 사이에 두고 한 평 남짓 가게들을 지나쳐 들어 갔다. 히잡을 쓰거나 무하메드의 수염을 닮은 사 람들이 쉬어 가는 곳. 눈인사로 이웃임을 나누는 화기애애한 이곳에 나는 나를 커피를 닮은 살갗의 사람들 사이로 비집어 넣었다. 난 이방인이 아니 라고 최면을 걸고 이곳에 오기 시작했다. 나는 지 금 인도네시아 사람들 속 파사르에 있다. 2020년 큰아이의 손을 잡고 아 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제값을 주고 살 것을. 안 받는다고 해도 팁을 챙겨 드릴 것을.”아쉬운 마음 에 두 개뿐인 앞니로 활짝 웃던 아저씨가 그립다. 옆집 아가씨는 고무 망치를 구입했다. 그리고 그 둔탁한 물체로 아이들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벽 을 치기 시작했다. 단단한 콘크리트 벽은 여의치 않았을까? 나무로 연결된 머리맡의 벽을 “쿵 쿵 쿵 아이들 학교에 서류를 챙기고 이제 떠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갑자기 하늘길이 막혀버렸다. 심상치 않은 한국의 코로나 상황에 인도네시아로 입국되는 비자 발급이 중단이 된 것이다. 차라리 한국으로 입국하지 않고 머물던 싱가포르에서 들 어갔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비행기표는 하늘에 매단 굴비가 된 격이었다. 외국에 머물던 재외 동 포들이 가족과의 이별을 감수하며 한국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을 때 아직 건강함을 감사하며 지냈다. 그 이외의 다른 고민과 걱정들 은 하나로 단순해졌다. 인도네시아로 들어가 가족 상봉이 이루어지기를. 하지만 어쩌면 곧 갈 수 있 을 거라는 나의 바람은 누구도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암본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주민 간 유혈충돌이 간헐적으로 일어났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너무 달라서라지만 이슬람끼리도 온건과 강성으로 나뉘어 충돌 한다고?’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여러 언론 기사와 책을 찾아보고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들 어보니 선주민과 이주민 집단과의 충돌이라는 것. 표면에 드러난 것은 종교지만 실제로 교리 싸 움은 아니라고 했다. 인도네시아 중앙정부에서 파견하거나 이주시킨 이슬람 또는 온건 이슬람 성 향 주민들과 원주민인 기독교 또는 강성 이슬람 성향 주민들이 정치와 경제적 이익을 두고 경쟁 하다가 충돌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모든 나라가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인도네시아 정당은 한국 기준으로 하면 보수 성향에 가깝다. 수하르토 대통령은 집권한 후 정당을 직능 대표자들로 구성한 집권당 골카르당 야자수 언니가 자랑스 러워!”이유도 없이 연습한 한국어를 내게 말하 는 살사는 인도네시아인들과 즐겁게 어울리는 내 가 자랑스럽 단다. 4년전 그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 며 만난 나무를 닮은 사람들이 나를 반긴다. 나에 게 웃음 짓는다. 나는 그냥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 고 있을 뿐이다. 오늘도 한국의 나무는 가슴을 벌 리고 기다리고 있겠지. 예민 해 있었던 탓이라고 하자. 한인뉴스 2025년 2월호 I 59 야채 가게를 도착하기 전 떠오르는 아저씨가 있 다. 해리 아저씨. 로컬 시장에서 장을 보는 외국인 이 안쓰러웠는지 우리의 마음과 사고를 깨우고 이 말은 책이 단순히 정보를 전 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이 상황이 언제까지 헤매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남편의 연 락이 왔다. “아무래도 더 길어질 것 같아. 원룸을 다시 알 아봐.” 남편의 걱정스러움은 순간의 위로를 주었다. 새로 얻은 원룸은 다행히 물도 새지 않았고 이 시장에 와주는 것만으로 도 반갑고 고맙다고 한사코 마다했다. 양이 적었 고 이들 종교 축일을 국가공휴일로 기념한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 은 “”Assalamu’alaikum warahmatullahi wabarakatuh” (이슬람인사) 이불도 이슬람 이슬람세력을 모은 연합개발당(PPP) 이제 오지는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엑스가 운용하는 미국의 저궤도 우주인터넷 통신사업인 스타링크 도입 을 언급한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통신발달사에는 시티폰과 삐삐 시대가 없다. 철도와 도로가 전 국에 건설되지 못한 상태에서 항공편으로 군도의 섬들을 연결하고 있다. 한국은 농업과 광업 등 1차 산업 인도네시 아~~~’ 어릴 적 헷갈려 가며 불렀던 그 고무줄 놀이의 단골 노래 가사 속의 그곳으로 말이다. 그 런데 남편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바 이러스가 출몰했다. 코를 후비는 검사를 지독히 도 하게 만들었던 코로나바이러스. 얼마 남지 않 은 입국인데 비행기를 못 타면 어쩌나 마음 졸이 며 한국에 도착을 하였는데 그 걱정은 뒤로 펼쳐 질 일의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 결정을 해야 했다. 남편이 떠나고 난 뒤 모든 것 들은 나의 판단에 의해 처리해야 했다. 집을 내놓 고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사랑 하는 삼발 소스를 만드는 절구도 판다. 나무를 깎 아 정교하지 않지만 작은 공이를 세트가 돌로 만 들어진 절구와 함께 올려져 있다. 가벼운 물건들 은 비닐봉지에 묶여 천정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 다. 어릴 적 문구점 천막 위에 매달린 빨갛고 통 통한 돼지 저금통을 보듯 했다. 이곳에서 나는 쓰 레기봉투를 구입한다. 봉투를 구입하면서 아저씨 는 피상고fod 하나를 내게 권한다. 맛있게 튀겨진 바나나 튀김을 들고 나는 약과 두 봉지를 건넸다. 한 가지씩 일이 해결이 될 때마다 안도감보다 는 걱정과 후회 인도네시아는 1 인도네시아는 내가 한국에서 쌓은 생각의 경계를 부수는 도끼였다. 인도네시아에서 보고 듣고 경 험하면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고 그것에 대해 다시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새로운 생각의 촉수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인도네시아는 도끼다”라는 문장은 독일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가 처음 말한 것으로 알려진 “책은 도끼다”라는 말을 패러디했음을 먼저 밝힌다.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 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일상 이 그리웠던 그때를 기억하는 나는 오늘 파사르에 간다. 이제는 깊은 숨을 들이쉬지 않는다. 작은 가 게들을 지나갈 때 시간이 지체된다. 친구들과 눈 맞춤을 하는 순간이 행복한다. 눈웃음으로 나를 반기는 반가움이 느껴진다.”언니 자고 있는 아이 둘을 한번 그렇 게 날을 샜다. 처음에는 새는 물을 받을 살림살이 도 없는데 그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매서운 초봄 바람에 아이들을 데리고 짐을 싸서 나와 비 즈니스호텔을 전전했다. 한 달 자동차를 매매해야 하는데 코로나로 인해 사 람들의 거래가 줄은 것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집 도 보여주지 못한 채 자연은 두려움 없이 다가왔다. 원룸에는 놀이터도 없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그때에 나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이렇게 원룸에만 있다면 코로나가 아니라 쿵쿵 망치 소리에 쓰러질 판이었다. 안되겠다. 나는 접는 자전거를 샀다.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바람에 보내 버렸다. 아이들을 가둬둘 수만은 없는 거 아닌가. 나가자. 가까운 곳이 안된다면 시외 로라도 나 가자. 택시를 잡아탄 나는 꾸역꾸역 자전거를 트 렁크에 넣고 아이들을 안았다. 공원은 그대로였 다. 왜 이제 왔냐는 듯 기어가는 애벌레도 보여주 고 자연의 손길은 언제나 자애로웠다. 아이 들과 작은 조약돌을 주워 공기놀이를 했다. 흙을 파며 소꿉놀이를 시작했다. 고슴도치를 닮은 마른 풀 포기에 누런 잎이 연두색으로 변하는 광경을 저녁 차림이며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혼자 감당하 는 것이 버거웠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남편이 없고 보니 그래도 그때는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주 말은 남편이 있었다.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었던 것이다. 물이 새지 않는 집에 살아서 따뜻한 물로 겨울을 추운지 모르고 지냈다는 대 수롭지 않은 일에도 감사가 생기게 되었다. 지금 시기에 따뜻한 물을 감사하게 될 줄이야. 물이 새 지 않는 곳에 있음에 마음의 평안을 얻을 줄이야. 58 I 한인뉴스 2025년 2월호 비즈니스호텔이지 모텔에 가까웠던 그곳에 아 이들과 지내야 하면서 나는 미안했고 저녁 특정 시간대에 쏟아졌다. 윗 집에서 샤워를 하는 시간대였을까? 그릇도 없는 데 새는 물 한 번 저소득국가’ 등이었다. 하지만 1999년 7월 수카르노하타국제공항에서 자 카르타 시내로 이동하면서 본 도로를 호위하던 초고층빌딩들은 저소득국가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990년대 말에는 한국에서도 초고층빌딩이 드물었다. 자카르타 시내 중심가에 는 최신형 벤츠부터 낡은 바자이와 목초를 실은 소달구지까지 함께 다녔고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만물상을 이맘 아저씨를 지나쳐 계란 아줌마에 게 간다. 세 개의 나무 박스가 나란히 놓인 그곳 은 한 무더기의 일반 계란 종이컵 종족과 인종이 다를 수 있다. 1990년대 말 한국은 한민족이 한국어를 하며 한반도에 사는 나라였다. 서울에서 외모가 다른 외국인을 보면 쳐다보던 시절이었 다. 인도네시아에 오니 인도네시아인이라고 하지만 종족이 다르면 외모도 언어도 달랐다. 심지어 자카르타에는 전세계에 모든 사람들이 오가고 지하드 전사 집과 자동차와 아이들 학교를 부탁하 며 남편은 그렇게 떠났다. ‘인도 천 원짜리 과일 칼과 플 라스틱 접시 그리고 천오백 원짜리 포크와 수저를 구입했다. 두 달이면 떠날 수 있 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두 달이 지나고 천식처럼 기침을 달 고 살았다. 그러고 나서 퇴근 후 둘을 데리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놀이터며 출근하기가 벅찼었다. 직장에서는 쉴 새 없이 서서 이야기하 는 일이라 다리는 퉁퉁 붓고 카 메라에 쓸어 담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 갈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남편은 그 와중 갑자기 해외지사로 발령이 났다. 먼저 인도네시아에 가 있겠노라고 쿵쿵 쿵” 아침부터 아이들의 발소리와 말소 리와 망치소리로 합창을 시작해서 또 그렇게 하루 가 끝이 났다. ”쿵쿵 쿵 쿵쿵 쿵”. 밖은 코로나로 위험했고 테러리스트... 돼지고기를 안 먹 는 것은 맞았지만 푸르스름한 오리알 플라스틱 통 한 층 깔릴까 말까 한 유정란이 있다. 10알 한국과 너무 나 다른 나라인 인도네시아로의 이주는 지리적인 국경을 넘어서 나의 사고의 틀을 깨고 생활 방 식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가야 한다고 들었을 때 떠오른 단어는 ‘열대 힌두교를 인정하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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