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8월 특집> 인도네시아 두 개의 큰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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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특집 인도네시아 두 개의 큰 축제
인도네시아 두 개의 큰 축제
자신을 정화하고 혈육의 정을 나누는 정겨운 축제 - 르바란(Eid-ul-Fitri)
300여 종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숭고한 축제 - 독립기념일(Hari Kemerdekaan)
<글 박정자>
올해 8월에 인도네시아는 두 개의 큰 축제일을 동시에 맞는다. 바로 독립기념일과 르바란이다.
네덜란드 식민지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제국에 점령되기까지 수백 년 동안 다른 나라의 지
배를 받으며 살아온 인도네시아 인들의 독립기념일, 그날이 오면 억압의 세월만큼이나 큰 해방의
기쁨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늘 현재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슬람력을 기준으로 아홉 번째 달인 라마단과마지막 달인 하지는 무슬림에게 매우 신성한 달로
여겨진다. 이슬람 종교에서 요구하는 5대 의무를 실천하는 달, 단식과 금욕, 성지순례를 통해자신
을 정화하고 신앙을 회복하는 기간이기 때문이다.
기도(Sholat), 신앙고백(Shahadat), 단식
(Puasa), 희사(Zakat), 성지순례(Haji)가 이슬람의 5대 의무이다.
우리나라 역시 독립기념일과 추석이라는 대명절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도네시아의 축제일
들이 남의 얘기 같지만은 않다.
300여 종족을 하나로 아우르는 숭고한 축제
- 독립기념일(Hari Kemerdekaan)
처음 인도네시아에 와서 독립기념일을 맞는 한국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한다. 한국의 독립
기념일은 8월 15일인데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은 한국과 같은 해인 1945년이면서 날짜만 이틀
이 늦은 8월 17일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두고그때는 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연합군의 승전 소식
이 배를 타고 건너오느라 늦어진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인도네
시아에서는 독립선언이 늦어진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개시하면서‘대동아공영권’이라는 위장구호를 앞세
워 부족한 군수물자와 전쟁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동남아국가들을 침략했다. 당시 350여 년의네
덜란드 식민통치에 치를 떨고 있던 수카르노와
하타 등 인도네시아의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의 무력을 이용하여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일제와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덕분에 일본군은 야욕을 숨긴 채 인도네시아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고, 일본의 추격을 피할 수 없었던 네덜란드는 결국 항복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점차 패전으로 치달은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선심정책을 펴며 패전을 대비하기 시작
했다. 그 일환으로 1945년 3월, 62명의 온건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을 모아 일본인 스스로‘인도네시
아독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도록 독려한다.
일제가 자신들의 파트너로 온건중도파를 선택한이유는 젊은 세대보다 구시대 지도자들이 다루기
쉬우리라는 의도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정세가 급물살처럼 변하자 온건파인 수카르노와 하
타는 자국의 독립을 보장받기 위해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는일본남방군사령부의 데라우치 사령관
을 찾아갔다. 독립선언이 늦은 이유에 대해 우스갯소리로 하는 요즘말처럼 교통편이 여의치 못했
기 때문인지 그들 일행은 돌아오기로 한 예정일보다 훨씬 늦은 14일 밤에야 자카르타로 귀환할수
있었다.
바로 그 다음 날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아시아 다른 국
가들은 모두 독립을 하게 되는데, 정작 일본인들에 의해 독립을 보장받아온 그들은 어떻게 독립된
정부를 세워야할지 몰라 허둥대기만 했다. 그렇게빨리 자신들에게 독립이 찾아 올 줄 예측조차 하
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젊은 민족지도자들은자체적 독립을 주장하며 격렬한 어조의 독립선언
문을 써야한다고 주장했으나 수카르노와 하타는일본을 자극할 경우 아직 국내에 남아 있는 일본
군 잔류세력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로 간단한 성명조의 독립선언문을 고집했다. 결국
1945년 8월
17일 아침, 수카르노는 자카르타에있는 자기 집 밖에서 일부 지인들과 몇몇 시민들만
참석한 가운데 아주 조촐하게 독립선언문을 읽어 내려가고 그들의 독립기념일은 그렇게 소박한분
위기에서 결정되었다.
“우리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선언문에 의해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권리 이양 등 제
반 문제는 양심적으로 가능한 한 신속하게 처리될것입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선언문 전문아무리
조촐한 자리였다고 할지라도 길고 긴 식민역사(1602-1945)를 청산하는 그들로써는 얼마나 벅찬
감격의 순간이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 후에도 인도네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며 다
시 돌아온 네덜란드 때문에 몇 년을 더 유혈전쟁에 휩싸여야했던 인도네시아 인들에게 독립이라
는 말과 상황은 참으로 위대하고 숭고한 의미일 터이다.
독립국가에서 수카르노와 하타 두 사람은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지냈다. 인도네
시아 국제공항의 이름도 수카르노-하타공항이다.인도네시아에는 독립을 기념하는 조각과 동상
등많은 상징물이 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스광장에 세워진 독립기념탑과 가루다로 표
상된 군장일 것이다. 독립기념탑은 독립의 상징이며인도네시아의 심장으로, 높이가 132미터로 상
단부에는 시내를 한눈에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고 하단부는 독립기념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탑
의 받침대 가로/세로 길이가 45미터, 상단과 하단의 8개 모서리, 17개의 계단과 꼭대기에 설치된
금동횃불의 길이가 17미터. 이곳에 수까르노 초대 대통령과 하타 부통령이 선언했던‘독립선언문’
이소장되어 있고 선언 당시 음성도 보관되어 있다.
또 하나, 신성한 전설 속의 새, 인도네시아를
상징하는 군장‘가루다Garuda’는 45개의 목깃털과17
개의 날개깃털, 그리고 8개의 꼬리깃털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독립기념일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은 참으로 성대하고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평소에 한없이밀
리던 도심은 한산하고 동네는 축제와 함성과 땀으로 뒤범벅된다. 동네 입구마다 독립기념일을 경
축하는 현수막과 기념탑을 세우고 각종 경기와 노래경연으로 떠들썩하게 하루를 보낸다.
그날의 경기 중 껍질 벗긴 나무를 기름 발라 높이 세워 놓고, 꼭대기에 게양된 국기‘메라뿌티
Merah Putih’를 먼저 낚아채는 팀이 이기는‘삐낭나무타기’는 가장 인기가 좋은 경기이다.맨발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너무나 아슬아슬해서 가슴을 조이게 하는데 그것도 카다
르시스의 일종일까? 이긴 팀은 나무에 걸린 생필품을 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승리의만족감
은 두 배가 된다.
300여 종족과 언어, 17,000여 개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일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숭고한 의미를 지니며 아무리 많은 세월이지나도 항상 현실로 재현될 것처럼 보인다. 단일민
족이라고 민족의 순수성과 자긍심을 배우며 자란 한국 사람들은 그들의 축제가 너무 요란하다고
말하면서 내심 부럽다. 우리는 아직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니.
자신을 정화하고 혈육의 정을 나누는 정겨운축제 - 르바란(Eid-ul-Fitri)
르바란Lebaran은 또 하나 그들의 대축제일이다.이슬람력에 따라 매년 보름정도 앞당겨지는 르바
란은 무슬림들의 종교적인 축제날이다. 인구의90%
이상이 무슬림인 인도네시아의 종교 축제이니
얼마나 큰 행사인지 이 또한 두말이 필요 없다.
작년에는 8월 30일-31일이 르바란이었고 이슬람력으로 1433년이 되는
올해의 르바란은 그보다
빨라져서 8월 19일-20일이 된다.
무슬림들은 르바란을 맞기 위한 선행의식으로 라마단Ramadan이라는 의무적인 금식기간을 한 달
동안 지켜야한다. 라마단은‘타는 듯 한 더위와 건조함’이라는
아랍어‘라미다’에서 유래했다고한다.
라마단 기간에는 새벽기도 전에 식사를 마치고 낮 시간에는 금식과 금욕을 을 지키고 말과 행동을
절제한다. 이 한 달은 해 뜨는 시각부터 해지는시각까지 물 한 방울도 마시지 않는 고행으로 이어
진다. 어린이나 노약자, 환자는 예외이다. 사우나장이나 술집 등 대부분 유흥업소는 문을 닫는다.
라마단의 금식에 대해서는‘라마단증후군’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적지 않은 우려가 제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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