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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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2015) 회장을 비롯한 한인 인사들 과 1932~2004)와 소피안 와난디(Sofjan Wanandi 1941~)를 들 수 있다. 베니 장군과 소피안 회장은 서로 다른 배경을 지녔지만 공통점이 분명했다. 첫째 1946년 1월 6일 20년 뒤에도 참고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 해외 한인 언론의 중요 한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조: 뉴스는 오늘을 기록하지만 결국 내일의 역사 책이 됩니다. 이주민은 본국에서도 3년 뒤면 창간 30주년을 맞이합니다. 그동안 축적해 온 미디어 자산을 바탕으로 다가올 30주년을 향해 준비 중이신 특별한 기획이나 발전 구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신성철 대표(이하 신): 『한인뉴스』의 뜻깊은 창 간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30주년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30년은 뉴스를 생산한 시간이 었고 6.25 전쟁 등으로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김만수는 이후 한인사회의 맏형으로 서 교민 사회 형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AI 시대에 정당한 활용과 보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조: 지난 30년 동안 쌓인 기사들은 공동체의 기억 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기록은 기관과 단체 별로 흩어져 있습니다. 한인회와 상공회의소 [특별대담] 기록하는 언론이 디아스포라의 미래를 연다 한인뉴스 30년·데일리인도네시아 27주년 기념 기획 대담 인터뷰 “기록하지 않는 공동체에는 미래가 없다.” 1996년 7월 첫발을 내디딘 『한인뉴스』가 30 주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27년간 재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주요 현안을 매일 실시간으로 기록해 온 『데일리인도네시아』 역시 3년 뒤 창간 30주 년이라는 뜻깊은 이정표를 앞두고 있다. 1999년 인도네시아 최초의 한인 인터넷 신문으로 출발한 데일리인도네시아는 지난 27년간 정교한 취재와 깊이 있는 시선으로 동포사회의 정보 불균형을 해 소하고 지성적 공론장을 구축해 왔다. 월간 지면 매체와 데일리 디지털 매체라는 각자 의 영역에서 두 매체는 상호 보완적 연대를 통해 한인 미디어 생태계의 핵심 축을 이뤄왔다. 데일 리인도네시아를 이끌어온 신성철 대표와 조연숙 편집장 부부를 만나 그간 축적해 온 언론 아카이 브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timor ‘봉화 불’ 등)를 통해 민족의식 고취에 힘 썼으며 “이제 제가 고국에 들어가면 무엇을 하겠습니 까?” 이 절망적인 질문은 1940년대 중반 간호사 감시 등의 역할을 수행한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 * 김문환 『적도에 뿌리 내린 한국인의 혼』 (2013) / 공저 『인 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2020)/ 한인뉴스 칼럼 * 우스미 아이코 『적도에 묻히다 – 독립 영웅 격동의 시대 속에서 개인 이 감당해야 했던 고뇌와 선택 경험을 함께 축적하고 공유하는 공동 체입니다. 그 중심에는 신뢰할 수 있는 미디어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연결하고 계획이 일본 헌병대의 정보망에 걸려 실패 로 돌아갑니다. 결국 이활을 포함한 주요 당원 6명 이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고려독립청년당 당원 인 손양섭 고려독립청년당 혈맹 당원 9명은 2011년 서 훈을 받으며 뒤늦게나마 조국으로부터 독립유공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2) 재자바조선인민회: 동포 보호의 구심점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공 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합니다. 『한인뉴스』가 지난 30년 동안 공동체의 역사 를 기록해 왔다면 공식 외교관계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던 시기 개인적 신뢰와 네트워 크로 양국 관계의 토대를 닦은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베니 장군은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군과 정보 과거 친일 행적이 있었지만 이후 인도 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게 된 그룹으로 나 뉘었습니다. 1. 격동의 시대 국내와 외국 기업을 연결했다. 특히 한국 기업이 현지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문화 적·제도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지한파’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한 친분 때문이 아니다. 한국 경제의 성장 과정과 산업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고 이를 인도네시아 발전 모델과 연결하려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호영 전 주인도네시아 대사(2008.6~2011.3)는 2011년 발행된 소피안 와난디 평전(그라메 디아)에 “한국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소피안 회장을 존경의 의미로 ‘빡 회장님(Pak Hoe Jang Nim)’ 또는 ‘Mr. Chairman’이라 부른다”며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들에게 조언 과 지침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조언자 역할을 했고 한국 기업과 인도네시아 정 부 사이의 소통 창구 역할도 맡았다”고 썼다. 외교관 이전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류 오늘날 한·인도네시아 관계는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불린다. 그러나 이 관계가 처음부 터 제도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초창기에는 외교 인프라도 제도적 틀도 부족 했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사람과 사람 간(People to People) 교류와 신뢰였다. 베니 장군은 국가 와 국가 사이의 통로를 열었고 소피안 회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를 놓았다. 이들이 활동하던 시기는 오늘날처럼 외교 시스템이 정교하지 않았고 정치·경제·군사 영역이 뒤 섞여 있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개인의 판단과 신뢰가 국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지금보다 훨씬 컸 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국과 인도네시아 관계는 지금과는 다른 궤적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외교는 문서와 협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국가 관계의 초기 단계에서는 사람이 곧 외 교다. 베니 무르다니와 소피안 와난디는 그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제도가 미비하던 시절 이들은 신뢰와 인간관계로 두 나라를 연결했고 그 토대 위에서 오늘의 한·인도네시아 관계 가 형성되었다. 지금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것은 그들이 남긴 ‘성과’보다도 관계는 결국 사람이 만든다는 오래된 진실일 것이다. 국재 만 국재만 그 사실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함께 생각하게 하는 글이라고 믿습니다. Q5. 국내외 언론계에서는 생성형 AI가 기사 초안 작 성과 요약을 대체하면서 단순 정보 전달 방식의 ‘속 보전’이 의미를 잃고 있습니다. 정보의 일차 가공을 기계가 담당하는 시대에 그들이 사용하는 인 스타그램과 유튜브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새로운 독립 투쟁이라 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리고 조국 독립을 위해 이국땅 에서 처절하게 반일 무력 의거를 펼치다 산화하거 나 좌절했던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의 희생은 단순 한 역사의 기록을 넘어 그리고 차세대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정 보와 기록 그리고 평범한 동포들의 삶을 주제별로 정리해 후세에 남기는 작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Q2. 1998년 5월 사태부터 한·인니 수교 50주년 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기록들은 《인도네시아 한인 100년사》 같은 역사적 자산으로 쌓였습니다. 파편 화되기 쉬운 이주민들의 삶을 일회성 소비재가 아닌 ‘유효한 역사’로 전환시키기 위해 한인 미디어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저널리즘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신: 이민사회는 기록이 없으면 기억도 사라집니 다. 언론은 사건을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공동체 의 집단 기억을 보존하는 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당장의 조회수보다 10년 그리고 한인 미디어가 자립성을 갖고 지속될 수 있 도록 동포사회와 정부 기관 그리고 한인뉴스를 비롯한 한인 언론이 중심이 되어 공동체의 기록을 함께 수집하고 보존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으면 합니다. 기록은 남기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 연 결되고 축적될 때 비로소 공동체의 역사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지식 자산이 됩니다. Q9. 디지털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역설적으로 신뢰 도 높은 종이 매체의 심층적 가치가 재조명받고 있 습니다. 매달 깊이 있는 담론을 담는 종이 지면과 그리고 희생을 생 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의 복잡하고 때로는 비극적이었던 삶과 선택 은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굳건한 우호 관계를 맺는 데 든든한 초석이 되었으며 그의 처가 또한 중국 국민당 산하 비밀결사 조직과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김구 주석의 승인을 받아 ‘고려 독립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 조직의 총령(總領) 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가 김구 주석 에게 받은 태극기는 ‘재자바조선인민회’ 건물 앞에 휘날리며 조선인들의 구심점이자 조국 독립 의 염원을 상징했습니다. 2. 두 개의 독립 투쟁 급변하는 미디어 대전환 기 속에서 한인 미디어가 나아가야 할 비전과 전 략을 들었다. Q1. 데일리인도네시아는 1999년 창간 이후 인도네 시아 최초의 한인 인터넷 매체로서 27년간 현장을 지켜왔으며 기록도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이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11. 오랜 기간 칼럼과 뉴스를 통해 한인뉴스 독자 들과 지적 소통을 이어오셨습니다. 창간 30주년을 함께 축하하고 계신 독자 여러분과 재인도네시아 한 인 공동체에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나 당 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신: 『한인뉴스』 창간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지난 30년 동안 한인뉴스는 재인도네 시아 한인사회의 성장과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기록하며 공동체와 함께 걸어왔습니다. 앞으로도 사실에 충실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인사회의 공 론장을 지키는 언론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일수록 정확 한 정보와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는 언론의 역 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변함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함께해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조: 앞으로의 한인사회는 단순히 규모가 큰 공동 체를 넘어 '스마트 한인공동체(Smart Korean Community)'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 사관과 한인회 기업 기업들이 구축해야 할 ‘상생의 아키텍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 2·3세대는 단순한 독자가 아니라 콘텐츠 생 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인사회와 기업 기업인을 직접 만나며 신뢰를 쌓았다. 단순한 외교 업무를 넘어 한국 사회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그가 서울을 평양과 동급의 외교 파트너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도적 결정 이전에 이미 인적 신뢰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다. 이후 1973년 인도네시아가 한국 과의 관계를 대사급으로 승격시킨 배경에도 베니의 활동이 중요한 밑바탕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그는 단순한 외교관이 아니었다. 군인 출신답게 실무에 강했고 동시에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박정 희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 기자는 취재 와 분석에 집중하는 구조가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 AI를 경쟁자로 보기보다 좋은 편집 도구로 활 용해야 합니다. 다만 AI가 생산한 결과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경험과 검증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I 를 얼마나 잘 쓰느냐보다 어떤 시각으로 활용하느 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7. 자극적인 이슈와 알고리즘 중심의 소셜 미디어 가 대중의 주의를 분산시키면서 공동체의 여론이 파 편화되고 있습니다. 한인사회의 건강한 담론을 형성 하고 다양성을 아우르는 ‘공론장의 중심’으로서 미디어가 지켜내야 할 본질은 무엇입니까? 신: 공론장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합 니다. 언론은 특정 의견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조: 공동체가 건강하려면 서로를 이해하는 언어 가 필요합니다. 갈등을 확대하는 기사보다 갈등 쩨쩹 헤라완 주한인도네시아 대사 인터뷰 후 기념사진 한인뉴스 2026년 8월호 I 31 의 원인을 설명하고 해법을 함께 고민하는 기사 가 더 많아져야 합니다. 언론은 편을 가르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Q8. 한국 언론계에서도 십수 년간 축적된 기사와 데 이터가 생성형 AI의 학습 자료로 무단 활용되는 문 제로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한인뉴스와 데일리인도 네시아가 장기간 쌓아온 한인사회의 소중한 아카이 브를 보호하고 그 역사적·상업적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한 방안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신: 기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지적 자산입니 다. 장기간 축적된 기사 데이터의 저작권을 보호 하고 네덜란드는 재통치의 야욕을 품고 영국군을 앞 세워 구 점령지에 진주하게 된다. 식민화의 전철을 방임할 리 없는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일본군 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탈취한 일부 총기류를 들고 대적하여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수카르노는 족자카르타를 임시수도로 정하여 야음을 틈타 기차탈출을 감행하였으며 노무 노병한은 싱가포르 전출 명령 에 대한 불만과 조국 독립의 염원을 안고 암바라와 에서 일본군에 대한 무력 봉기를 시도합니다. 이들 은 무기를 탈취하여 일본인 관사를 습격하고 일본 군 위생병을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격전 끝에 민영학은 일본군에게 총상을 입 고 옥수수밭에서 “그냥 가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총구를 가슴에 대고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 후를 맞이합니다. 손양섭과 노병한 역시 다음 날 28 I 한인뉴스 2025년 7월호 위생창고에서 자결하며 “나는 할 일을 했다고 자 부합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의거는 단순 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조직에 바탕을 둔 해외 독립운동의 신호탄으로 역사적 의의가 큽니다. 수미레 마루호 탈취 기도(제2차 거사)도 결국은 좌절로 결말을 맺습니다. 암바라와 의거 소식을 접 한 고려독립청년당 총령 이활은 동지 3인의 죽음 을 기리며 ‘수송선 수미레 마루호 탈취 기도’라 는 제2차 거사를 계획합니다. 이들은 영국군 및 네 덜란드군 포로들과 연대하여 수송선을 탈취하려 했으나 논설위원 농장 직원 다 시 공동체의 역사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 다. 그런 마음으로 작은 행사 하나 당원들은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 조국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박 창원과 같이 귀국 후 한국 사회의 모습에 실망하여 유공자 포상을 거부하고 국토에 묻히는 것조차 거 부한 이도 있었습니다. 최후의 생존자인 이상문의 끈질긴 노력으로 암바라와 의거 의사 3인은 2008 년 동포 미디어가 독자에게 제 공해야 할 ‘대체 불가능한 인간적 통찰’은 어디서 나온다고 보십니까? 신: AI는 정보를 빠르게 정리할 수 있지만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몫입니다. 앞으로 언론의 경쟁력은 속도가 아니라 해석과 신 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 AI는 정보를 모을 수 있지만 현장을 대신 경험 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직접 만나고 두 개의 독립을 좇았던 조선인들의 흔적 조연숙 | 데일리인도네시아 편집장 인도네시아에 대한 천 개의 이야기 한인뉴스 2025년7월호 I 27 양칠성은 사후 46년만인 1995년 고국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국적 회복과 한글 묘비 교체식이 거행되 며 한국인으로서 재조명되었습니다. 양칠성 두 사람 모두 대 표적인 지한파 인사였고 둘째 디지털에서 축적 한 자료를 종이 매체에서 심층적으로 재해석하는 방 식이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10. AI 시대를 살아가는 한인 2·3세대는 정보 소 비 패턴과 언어 환경이 1세대와 다릅니다. 이들을 미 디어의 새로운 독자이자 주역으로 유입시키기 위해 또미 띠모르 매 일 신속하게 호흡하는 디지털 매체인 데일리인도네 시아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이상적인 미디어 협력 모델은 무엇입니까? 신: 디지털은 속도를 담당하고 종이는 깊이를 담 당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서로 경 쟁하기보다 역할을 분담할 때 더 큰 시너지가 만 들어질 것입니다. 조: 매일의 뉴스는 디지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 입니다. 반면 종이는 한 달 동안 있었던 중요한 흐름 을 정리하고 의미를 해석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두 매체가 함께 공동 기획을 하고 머나먼 인도네시아 땅에서 복잡한 운명과 마주했던 한 조 선인의 깊은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의 광복절 (8월 15일)과 이틀 뒤인 인도네시아의 독립기념 일(8월 17일)은 우리를 태평양전쟁 종전과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 열망이 격렬하게 타올랐던 혼란 스러운 시대로 이끕니다. 당시 이국땅에서 자신들 의 방식으로 격동의 운명을 헤쳐 나갔던 조선인 군 속(軍屬)*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일은 여전히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독자들은 단순 한 뉴스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설명 해 주는 언론을 더 찾게 될 것입니다. Q6. 거대 언론사들은 기사 아카이브를 AI 학습 데 이터로 구축하며 빠르게 체질을 개선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인력과 자원이 한정된 해외 한인 미디어 가 AI 도구와 디지털 환경을 수용할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요? 신: 규모가 작은 언론일수록 AI를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반복적인 업무는 AI가 맡고 미디어 교육 민영학 베니 장군과 소피안 회장 논설위원 신성철 한국과 인도네시아의 외교 관계는 1973년에서야 대사급으로 격상되었다. 그 과정에는 양국 관계 의 물꼬를 트고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이 쌓아 올린 기반 위에서 이후 제도 와 협력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는 최계월 코데코(KODECO 분위기 를 느끼고 불안정한 정세 속 에서 크게 네덜란드나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 은 그룹과 상공회의소와 정부 기관 세대를 잇고 세피아 소피안 회장은 경제와 민간 교류의 영역에서 그 길을 확장한 인물이었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출신인 소피안은 인도네시아 경제계에서 보기 드문 조정자였다. 기업인 수감되어 있던 혈맹 당원들은 종전 10일 후 석방되었으며 수디르만과 나수띠온 이 이끄는 정부군은 각각 중부자와와 서부자와의 산악지대를 수필 집필과 글쓰기 모임 을 주도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계십니다. 개인적 인 문학적 소통과 글쓰기 경험이 데일리인도네시아 의 편집 방향이나 뉴스를 바라보는 시선에 어떤 결을 더해주는지 궁금합니다. 조: 문학은 사람을 이해하는 작업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역사가 됩니다. 30주 년을 준비하면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지난 30년 의 기록을 다시 읽고 의미를 연결하는 작업입니 다. 인도네시아 한인사회의 변화 아직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기 이전에 제2대 주한 인도네시아 총영 사로 부임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먼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 북한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앞으로의 30년은 모두를 연결 하는 지식 플랫폼이자 스마트 한인공동체를 만들 어가는 구심점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기 대합니다. 앞으로의 30년은 축적된 기록을 지식으로 전환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기사와 사진 양국 연 대의 중요한 역사적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일본 군 포로감시원 외에도 동맹통신사 파견원 어수선한 정치계절 김문환/논설위원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일본군이 철수하게 되자 에너지 협력 영어를 자유 롭게 활용하며 공동체를 기록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기존 미디어를 보라고 하기보다 예총은 물론 한국문화원 외교를 아우른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과 의 관계에서 그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직책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통한 외교였다. 그는 1970년 외국인 투자자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며 특히 한국 기업들과 깊 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하던 초창기부터 조언자이자 후견인 역할을 했다. 제도도 정보도 부족했던 시절 이 들의 희생은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격동의 시대 이들이 내린 선 택은 과연 온전한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전범 처벌을 피하거나 생존을 위한 불가피 한 강요와 맞물린 결과였을까요? 이러한 이상과 생 존이라는 복잡한 동기가 작용한 그들의 고뇌에 찬 선택들은 오늘날 한국과 인도네시아가 굳건한 우 호 관계를 맺는 소중한 토대가 되었으며 이러한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양국 관계의 미래를 더욱 밝게 만들어나가는 중요한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복잡성을 이해 하고 타인의 고뇌를 공감하는 태도가 아닐까요? [주석] * 군속(軍屬): 군대에 소속되어 군의 업무를 보조하던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통역 이를 연구자와 차세대가 활용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큰 목 표입니다. 조연숙 편집장(이하 조): 30년은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될 만큼 긴 시간입니다. 매일 기사를 쓰 하비비센터 취재 후 기념사진 한인뉴스 2026년 8월호 I 29 다 보면 하루하루의 기록은 작고 평범해 보이지 만 이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하는 통합 아카이브는 아직 없습니다. 앞으로 는 대사관과 한인회 이병용 역 시 인도네시아에 남아 활동했습니다. 이활(李活 이억관)은 김구 주석의 승인을 받은 독립 운동가입니다. 중국어에 능통했던 이활은 자카르 타 화교들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으며 이활을 비롯한 10명의 조선인 군속들은 혈 서(血書)를 쓰며 조국 독립을 맹세합니다. 암바라와 의거(제1차 거사)는 비극적인 자결로 끝납니다. 1945년 1월 4일 인도네시아 독립 부대인 국민방위군(TKR) 산 하 ‘빵에란 빠빡 부대’에 합류하여 네덜란드에 맞서 싸우는 독립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의 마지막 편지에 담긴 “이제 제가 고국에 들어 가면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절망적인 질문은 고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희망을 찾기 어려웠을 그 의 불안과 고독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빵에란 빠빡 부대는 일본군 잔류자 아오키 상사가 이끌고 온 조 선인 군속 4~5명을 포함하여 총 30여 명의 일본 군과 현지인 부대원 수백 명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 였습니다. 결국 양칠성 인도네시아 연극영화 산업의 선구자가 됩 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고국에도 돌아가지 못하는 한을 품고 43세의 젊은 나이에 이국땅에 묻힙니 다. 이는 그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할 기 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입니다. 양칠성(梁七星): 포로감시원 시절 악명이 높았던 양 칠성은 전범 처벌을 피하기 위해 귀국선을 포기하 고 인도네시아 정부 차원의 정책 시행을 통해 양국 간의 외교와 경제교류에 지대한 공 헌을 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베니 장군이 정치·군사 영역에서 길을 닦았다면 인도네시아 측의 대표적인 지한파인 베니 무르다니(Benny Moerdani 인도네시아 한인의 중 요한 역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과거의 그 림자마저 이해하고 포용함으로써 인터뷰를 체계적인 디지털 아카이 브로 구축하고 일본의 패전 이 임박했기에 예상외로 가벼운 형량(징역 7~10 년)을 선고받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고 자바섬에서 비밀결사 조직인 ‘고려독립청년당’이 탄생합니다. 1944년 12월 29일 자원 개발 참여 등도 이 시기에 길이 열렸다. 1970~80년대 인도네시아 군부의 실권자이자 국방부 장관을 지낸 베니 장군은 인도네시아 내 한 인 사회가 발전하고 코데코 등 현지 한국 기업이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특히 코데코 최계월 회장과 한국의 첫 해외 유전 사업인 서부 마두라 유전 개발 사업 등 경제협력에 있 어 핵심적인 협력자 역할을 했다. 논설위원칼럼 한인뉴스 2026년 2월호 I 9 김문환 전 한인뉴스 논설위원은 베니 장군에 대해 “1974년 1월 소위 ‘말라리 사건’(Malari Incident)이라고 부르는 ‘반일폭동’ 직후 본국으로 급거 귀국한 이후 줄곧 인도네시아의 모든 정보 권력을 장악했던 실세였다”며 “곤경에 처한 한국 진출기업에도 여러 차례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물론 장윤원은 3.1 독립운동 의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과 구타 를 겪었음에도 장학 프로그 램 등을 꾸준히 지원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조: 언어가 달라도 정체성은 이어질 수 있습니다. 2·3세대가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 재 자바조선인민회 주최로 암바라와 의거에서 산화 한 동지 3인을 위한 제1주기 추도식이 거행되었 습니다. 이 날짜로 ‘고려독립청년당’은 정식으 로 해산되며 재자바조선인민회는 격동의 시기에 조선인 들의 구심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3. 비극적 선택의 오늘날 의미: 그들의 숭고한 유산 인도네시아라는 머나먼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과 새로운 삶의 터전을 위해 힘썼던 조선인 군속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친 일 행적에 대한 자책감으로 ‘국제 미아’가 되었 던 허영의 고뇌 저널리즘 은 사회를 이해하는 작업입니다. 두 영역은 결국 사람을 향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수필을 쓰고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감정을 가까이에서 듣게 됩니다. 그 경험은 30 I 한인뉴스 2026년 8월호 뉴스를 쓸 때도 숫자와 사건 뒤에 있는 사람을 먼 저 바라보게 합니다. 좋은 기사는 사실을 정확하 게 전달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범 색출의 위협 속에서 인도네 시아 독립 투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양칠성의 비극적인 운명 정경비화 정부 기관 이 함께 청년 기자 양성 정수호는 1949년 네덜란드군에 의해 안타깝게도 사형당했으며 정수호는 서부자바주 가룻군에 있는 국가영웅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2) 또 다른 선택: 친네덜란드-친중국 세력과의 협력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네덜란 드나 중국 세력과의 관계 속에서 조선인들의 생존 과 활동이 이어졌습니다. 장윤원(張閏遠)은 조선인 보호에 헌신한 이국땅의 선구자입니다. 1920년 자바섬으로 이주하여 네덜 란드 총독부 고위 관리로 일하며 현지 화교 사회 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정착한 나라 에서도 소수자이기에 삶의 흔적이 쉽게 잊히고 사 라질 수 있습니다. 이주민 스스로도 일상을 ‘잠 시 스쳐 가는 시간’으로 여기며 기록의 가치를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론의 역 할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록하는 하루하루 의 순간은 개인의 기억을 공동체의 기억으로 정치인 조 국의 독립과 삶의 터전이 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두 개의 독립 투쟁’이라는 복잡 하고 다층적인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일본 패망과 동시에 연합군의 전범 색출이라는 위협 조선 어 교실을 운영하고 『조선인 민보』를 발행하는 등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동포들의 귀환을 돕는 데 힘썼습니다. 비록 허영과 양칠성 처럼 인민회를 떠나 다른 길을 택한 이들도 있었 지만 조선인 위안부 등 다양 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으며 조선인들의 복합적인 선택 1) 전범 색출의 그림자 속에서: 생존과 속죄를 위한 고뇌 일본의 패망은 조선인들에게 해방의 기쁨과 함 께 전범 색출의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특히 포로 감시원 출신 조선인 군속들은 연합군 포로를 가혹 하게 다룬 전력이 있을 경우 전범으로 지목될 위협 에 놓였습니다. 허영(許泳): 친일 행적을 보였던 허영은 종전 후 친 일 행적에 대한 깊은 자책감으로 조국으로의 귀국 을 포기합니다. 전범 색출을 피해 처자식이 기다 리는 일본으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국제 미아’ 신세가 된 그는 총칼 대신 연극과 영화라는 예술 적 무기를 들고 수카르노 망명 정부에 합류하여 인 도네시아 독립 전쟁에 뛰어듭니다. 수카르노 망명 정부의 공보 담당관으로서 연극과 영화(‘민족의 혼’ 조선인들의 안 전한 귀환과 권익 보호를 위해 ‘재자바조선인민 회’가 설립됩니다. 허영은 과거 친일 행적에도 불 구하고 일본군 제16군 사령부를 끈질기게 설득하 여 1945년 9월 1일 자카르타에 조선인 최초의 자 치단체인 재자바조선인민회를 탄생시키는 데 핵 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인민회는 일본군과의 협상을 통해 약 3년간 생 활할 수 있는 충분한 물자와 군표를 확보하여 귀 국을 기다리는 동포들의 생계를 지원했으며 종전 후 자신의 귀국 계획을 미루 고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의 구명 운동과 민간인 귀 환 문제 해결에 헌신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 니다. 그는 허영과 함께 ‘재자바조선인민회’ 설 립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고문 후유증과 고령으로 1947년 이국땅에서 한 맺힌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후손들은 인도네시아 에서 교육자이자 사업가로 성공하며 양국 관계의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김만수(金萬壽)와 이병용(李炳鎔)은 인간적인 연대 를 택한 사람들입니다. 조선인 군속 김만수와 이병 용은 일본군 감시원으로서 연합군 포로 체 육회 축적된 기사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한인사 회와 양국 관계 연구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Q4. 조 편집장님께서는 한국과 인도네시아를 오가 며 매체를 운영하는 한편 컬럼 코리아 타코마 코이카(KOICA) 특히 네덜 란드인 포로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했습 니다. 이들의 인간적인 배려는 전후 네덜란드 정부 로부터 표창과 고무 수출권 등 사업 이권으로 이어 지기도 했으나 틱톡 같은 플랫폼으로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 게 ‘당신도 한인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소속 김문환 선생님 인터뷰 후 외대 오바마홀 앞에서 기념사진 32 I 한인뉴스 2026년 8월호 감을 전하는 일입니다. 한인뉴스와 데일리인도네 시아 등 한인 미디어가 세대를 잇는 소통의 공간 이 된다면 평범한 삶의 이 야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공동체 관점에서 맥락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Q3. 신 대표님께서는 언론 경영을 이끄시는 와중에 도 학문적 깊이를 더하기 위해 박사 학위 과정을 이 어가고 계십니다. 현재 연구 진행 상황과 함께 하나의 비극 이 시기 인도네시아 내 조선인들은 각자의 방식 으로 독립을 향한 열망을 표출했습니다. 조국의 독 립을 위한 직접적인 투쟁과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 한 또 다른 투쟁은 때로는 얽히고설키며 비극적인 서사를 만들어냈습니다. 1) 고려독립청년당의 처절한 반일 의거: 암바라와와 수 미레 마루호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고 조선인 군속들의 불만이 쌓여가던 1944년 학위 를 마치신 후의 계획이 한인 미디어 및 동포사회 발 전과 어떻게 연결될지 듣고 싶습니다. 신: 박사 과정에서는 한·인도네시아 관계를 인적 네트워크와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언론이 현장을 기록한다면 학문은 그 기록에 의미 를 부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위를 마친 뒤에는 언론과 학문을 연결하는 연구 플랫폼을 만 들고 한-인니 관계 물꼬를 튼 주역 한국 군·정계 인사들과의 교류는 이후 양국의 군사·경제 협력으로 이어졌다. 한국산 무기와 군수물자 도입 한국 기업들이 의지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현지 인사였다. 실제로 수많은 한국 기업인들이 그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인”으로 기억한다. 소피안은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경영자총협회(APINDO) 회장을 지내며 정 부와 민간 한국과 인도네 시아 관계의 발전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등도 저마다 중요 한 역사를 만들어 왔지만 한국은 외교적으로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국가였다. 서울 주재 인도네시아 공관은 총영사급에 불과했고 예 산과 인력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베니는 이 조건을 한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관계 형성의 기회’로 활용했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정치인과 관료 한인뉴스와 데일리인도네시아를 비롯한 한인 언론 항만 노 동자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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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호 - 김문환 논설위원 컬럼 - 코리아 타코마

김문환/논설위원 제3공화국 정권의 2인자인 JP와 그의 셋째형 김종락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우애가 깊었다. 일본 니혼대 경제과를 나와 한일은행 전무를 거쳐 서울은행장까지 역임하는 동안 탁구협회, 야구협회를 주도했던 김종락이 운동기구 제작사업을 위해 대한체육회회장인 민관식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면서 미국 쾌속정 조선업체인 타코마(Tacoma)사의 관계자들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자기들이 만드는 군함을 한국에서 만들기 위한 합작사업을 제의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그 내용을 해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에게 전달하자, 마침 최신형 함정이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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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인도네시이아 현지에서 "서바이벌 인도네시아어 초급과정" "제1권"과 "제2권"의 종이책을 원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알려드립니다. 현지에서 종이책을 원하시는 분께서는 제 개인 카톡(아이디: kimjonglan)으로 연락을 주시면 좋겠습니다.참고로, 현재 현지에서 인쇄와 제본 중이니, 5월부터는 발송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격은 권당 Rp 150.000입니다.…
쫑란 202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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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바라 202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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